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34화 (3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34화

    낙원의 추방자들(1)

    “루칸다. 우리의 모든 관계가 죽음 혹은 이별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논리적 오류가 없는 정언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조차 반드시 불행해야 될 필요는 없겠죠. 스텔라 님께서 지상 위 만유의 생명들에게 허락한 권리는 오로지 용서받을 권리랍니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날붙이도, 권세도 감히 박탈시키지 못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지 마세요.”

    제7왕녀 피르에나.

    오랫동안 고착 상태에 빠져 있었던 호크루카 평야의 전선을 붕괴시키며 나타난 인물이었다.

    당시 호크루카 평야의 수문장은 마왕 아일라드 직계 참모 ‘투스터크.’ 그의 군세를 호크루카 평야에서 30년 만에 뒤로 물리는 쾌거를 올리며 등장한 것이다.

    송곳 왕녀.

    쐐기검의 처녀. 혹은 쉘터 시저스.

    모두가 피르에나 왕녀를 칭하는 이명들이었다.

    그녀가 이끄는 ‘르 만타나 근위 유격대’는 오로지 마물로만 이뤄진 기묘한 부대였다. 마물의 조력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유격대의 활약이 거듭될수록 그런 불신의 목소리도 잠잠해져 갔다.

    승리의 전보를 전하기 위해 날리던 종달새는 어느덧 르 만타나 근위 유격대의 상징이 되었다. 적군의 피로 흠뻑 젖어 붉어진 종달새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전진했다.

    마왕군의 방어선이 무색할 만큼 파죽지세의 기세였고, 불가능할 것이라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불사왕 브람스의 영지까지 꿰뚫렸을 땐 전쟁이 곧 끝날 것이란 희망적인 관측이 왕국 내에서 나돌았다.

    가장 마왕의 영지에 근접했던 부대였다.

    이대로 가면 마왕 아일라드의 토벌 역시 불가능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 만연했다.

    르 만타나 유격대가 마왕의 영지 내에서 치룬 첫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주하기 전까진 말이다.

    아니, 그 당시까진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피르에나 왕녀만 살아 있다면 다시 병력을 모아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피르에나 왕녀가 돌연 시체로 발견되기 전까진 말이다.

    첫 패배의 좌절감 혹은 다음 전투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니다. 피르에나 왕녀의 활약으로 왕위 계승권이 위태로워진 왕세자의 사주로 암살당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피르에나 왕녀를 배신하여 살해한 건 유격대 소속 마물의 소행이다.

    여러 설이 세간에 떠돌았지만 어느 하나 진위가 밝혀진 사실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피르에나 왕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자는 유격대의 선봉장 루칸다였다는 사실이었다.

    “루칸다…… 이제는 당신마저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가요.”

    루칸다의 뇌리에는 피르에나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피르에나의 입술 사이로 토해졌던 모든 언어들이 뇌를 불로 지진 것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차갑게 일렁이는 겨울밤의 풍경 속에 루칸다의 기억은 멈춰 있었다. 점점 탁해지는 동공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웃어 보였던 피르에나의 모습은 색이 바래지 않고 지금껏 더없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밤은 아마도 비가 내렸다.

    마지막으로 토해진 날숨의 끄트머리에 맺혀 떨어지는 건 빗방울이었다.

    * * *

    “생명에 지장은 없는 모양일세. 단순히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은 것뿐이니. 오히려 귀공의 꼴이 더 처참하구만.”

    “나도 깜짝 놀랐어. 하이브 마인드란 건 의외로 튼튼한 생물체구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걸세.”

    파르카의 토벌을 완료한 후 둥지로 돌아와 병력을 정비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크게 다친 건 나 자신이었다.

    스칼렛은 홀로 둥지 방어에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고, 701호 둥지에 잠입하여 아비엥의 암살을 시도했던 루칸다는 적의 매복에 걸려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도 팔을 관통당한 것이라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하루가 지났다. 베인 상처나 멍은 스칼렛의 타액으로 어떻게든 급속 회복을 시켜놨지만, 삐걱거리는 관절과 근육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흡혈귀의 타액에 그런 편리한 효과가 있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

    미리 말해두지만 이상한 상상은 그만둬주길 바란다.

    그렇게 기대해봤자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런 에로틱한 신은 없었으니까! 그냥 스칼렛이 상처 부위에 침을 뱉어서 손으로 문지르는 것 뿐.

    따지고 보면 스칼렛은 나보다 수백 배는 더 살아온 흡혈귀 아닌가?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할머니가 손자의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것 같은 민간요법이란 말이다. 딱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면 된다.

    가능? 가능이라고? 가능은 또 뭐야, 미친 가능충 새끼들이……. 베×토카가 젊은이들의 뇌를 망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그래, 어쨌거나 이번에 새롭게 마련된 심부의 개인실에서 스칼렛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스칼렛은 잠시 입을 멈추더니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입으로 직접 핥아주길 원했다면 미리 말하지 그랬나? 귀공에겐 꽤나 맛있는 냄새가 나니 무심코 물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결과 보고를 계속해주세요, 스칼렛 님.”

    그런 과격한 플레이까진 취향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스칼렛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 이어 말했다.

    “이쪽의 손실은 크지 않네. 언더 케이지 부대와 그레이브 야드 부대에서 각각 손실이 나왔지만, 렛맨은 부화장을 가동시켜 금방 병력을 보충할 수 있네.”

    “구울은?”

    “현재는 남은 시체가 있지만, 다 떨어지게 되면 인접한 인간 마을을 습격해 시체를 보충해 놔야겠지.”

    이번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것은 스칼렛의 직계 부대인 그레이브 야드였다.

    구울 부대는 701호의 제5부대 ‘레드포지’를 구울의 특성과 코볼트 작업대를 활용하여 전멸시킨 후 빠르게 머스킷으로 무장했다.

    스칼렛은 머스킷으로 무장한 전열보병의 특성을 이해했고, 제5부대의 야전 지휘자 코루렌이 사용하던 전술을 답습했다.

    그리하여 비탄의 숲 입구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적의 후속 부대까지 깔끔하게 내쫓은 것이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구울 부대라. 확실히 701호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겠네.”

    전열보병 부대끼리의 전투가 그렇지 않나? 대열을 갖춘 두 전열보병 부대가 거리를 두고 나란히 마주선 뒤에 번갈아 가며 사격을 주고받는 형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백병전에 돌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단순히 사격을 주고받는 경우만 따졌을 때 구울 부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일제 사격으로 화망을 형성하는 건 머스킷의 명중률이 낮기 때문이지. 100미터의 거리라면 머리를 노리긴커녕 몸뚱이에 명중할지 빗나갈지도 모르는 거잖아.’

    하지만 구울은 머리통만 멀쩡하다면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서 사격이 가능하다.

    싼 맛에 고블린을 머스킷 사수로 사용하고 있는 아비엥의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머스킷의 사용법이 간단하고 약한 마물이 사용해도 위력은 같다는 점에서 싸구려 고블린을 잔뜩 채용한 건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다.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가 나서기 전까진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잠시 관리창을 열어 부대 정보를 확인했다.

    [지휘자 직속 제1부대 : 그레이브 야드]

    -부대장 : 없음(스칼렛)

    -부대원 : 구울 머스킷티어 82체

    -정보 : 시체 썩은 내와 화약의 잔향! 아아, 전장의 향기! 이 부대는 전장의 넌센스입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우며 죽음과 가장 무연한 부대이기 때문이죠. 착검 돌격 따윈 필요 없습니다! 이빨 돌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와우!

    생각치도 않은 수확이다.

    머스킷티어 부대를 손에 넣기까지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예기치도 않게 머스킷티어 부대가 생겨버렸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초석은 더럽게 비싼데…… 대부분이 대륙이나 본도에서 수입해 오는 거고.”

    화약을 생산해내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초석과 황이 필요하다. 황은 현재도 소량 생산이 가능하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초석이 문제였다.

    초석을 구하기 위해선 에르바키나 연맹 놈들과 거래를 해야 되는데, 모두가 잘 알다시피 그놈들은 바가지 씌우는 게 디폴트 아닌가?

    빌어먹을 에팔이 새끼들.

    “701호 둥지의 병력 대다수는 머스킷티어 부대입니다. 일반적인 둥지의 재력으로 그 정도 규모의 머스킷티어 부대가 소모하는 초석값을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별거 아닌 상처였습니다. 더 이상 누워 있다간 없던 병까지 생길 지경입니다.”

    루칸다는 싱긋 웃어 보인 후 내 쪽으로 다가와 스칼렛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가정은 두 가지겠군. 첫 번째는 701호 둥지에 막대한 초석값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매장되어 있거나.”

    “초석 그 자체가 나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루칸다는 701호 둥지의 정탐 결과를 보고했다.

    여러모로 초석 그 자체가 채굴되고 있다는 정황적 추론의 근거가 나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루칸다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후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701호 둥지의 지휘자 사크바하는 제가 알고 있는 오크입니다.”

    “어떻게?”

    “한때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 면식이 있다는 얘기잖아. 아비엥 뒤통수 때리고 이쪽에 붙으면 두둑이 챙겨준다고 꼬셔봐. 나중에 엘프 포획하면 가장 먼저 한 마리 챙겨준다고 하면 환장하는 거 아냐?”

    “……사크바하는 금욕적이고, 금욕적인 만큼 신중하며, 촉이 좋은 오크입니다. 그리고 오크가 엘프에 환장한다는 풍문은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고블린이 인간 여자 무투가 좋아하는 건?”

    “낭설입니다.”

    그럼, 뭐…… 공주 기사나 성직자 취향인가? 확실히 그쪽이 더 클래식한 테이스트라 마음에 든다.

    요즘 애들은 공주 기사와 고블린의 멋짐을 모르고 그저 여자 무투가만 좋아해서는…….

    “귀공…… 그런 역겨운 망상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하고, 향후의 계획을 검토해 보도록 하지.”

    “크흠! 그래, 일단 나는 인간 마을에 좀 다녀와야 되니까 스칼렛은 지금처럼 둥지 주변 경계를 맡아주고, 루칸다는…….”

    생각해보니 루칸다는 파르카 토벌까지만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파르카 토벌에 성공했으니 이쪽에 협력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비탄의 숲에 서식하는 고블린들은 내가 손닿는 곳까지는 관리해볼 테니까 걱정 마라.”

    역시나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칸다가 만든 고블린 서비스 부대나 비르겐슈타인 부대는 여전히 내 둥지에 남겠지만, 루칸다가 떠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이 도움도 받았고, 정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떠나게 되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존귀하신 전쟁 군주의 휘하에서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루칸다는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내 둥지에 남아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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