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32화
삼각문해(4)
파르카와 녀석의 부대가 언더 케이지 부대를 쫓아 협곡의 중간 구간까지 도달한 순간.
[와탈라 : 키륵, 키륵키륵!]
와탈라가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위치를 표시했다.
먼저 퇴각하여 자리를 잡은 쪽은 고블린 서비스 부대. 협곡의 절벽 위쪽에 반으로 나눠져 사격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협곡의 아래쪽에는 햄토리를 포함한 언더 케이지 부대가 도착하여 진형을 갖췄다.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피해는 없었지만, 언더 케이지 부대에선 드디어 피해가 나왔군.’
렛맨 전사 다섯 마리 정도가 퇴각 중 파르카의 도끼질에 으깨져버렸다.
나머지 렛맨들 역시 퇴각을 반복하며 꽤나 체력이 떨어진 상황.
‘역시 고블린킹을 자칭할 정도라 렛맨 정도는 일격에 으깨버릴 수 있다는 건가.’
꽤나 속 쓰린 손실이다.
어쨌거나 고블린킹 파르카에게 걸리면 방어력이 높은 렛맨들도 갈려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햄토리 : 쮸으, 쮸…… 쮸쮸! 쮸, 쮸쮸!]
[누자베스 : 그래,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끝장을 봐야지.]
렛맨 부대가 멈춰 서자 고블린 정예 전사들 역시 밀집하여 달려들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녀석들의 가장 뒤쪽에서 파르카가 양손 도끼를 치켜 들며 기성을 내질렀다.
[누자베스 : 햄토리 너만 믿는다. 네가 뚫리면 우린 다 괴멸이야.]
[햄토리 : 쮸!]
[누자베스 : 와탈라는 내 지시에 따라 사격 개시한다. 언더 케이지 부대에게 가장 근접한 고블린 놈들부터.]
[와탈라 : 키륵!]
키잉!
검을 뽑으며 몸을 일으켰다.
협곡의 입구 쪽. 눈앞에 언더 케이지 부대와 대치하고 있는 고블린 무리가 보였다.
작전은 간단하고 심플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최소한의 코스트. 그것만이 이번 작전의 모토였다.
저벅저벅.
고블린 무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크카아앗!!”
파르카가 기성을 내지르며 전투 도끼를 치켜든 순간.
“캬르륵!”
“키륵, 키륵!”
고블린 정예 전사들이 렛맨 부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거 어째 몸 쓰는 일만 늘어나는 기분인데.”
불평을 주절거릴 여유는 없었다.
나는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고블린 놈들을 제치며 파르카를 향해 달려 나갔다.
“키륵……?”
내가 빠르게 접근하는 걸 눈치챘는지 파르카가 이쪽을 돌아봤다.
카앙!
똑바로 내려친 검격은 파르카의 도끼 자루에 가로막혔다.
녀석의 눈빛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설마하니 하이브 마인드가 직접 최전열에 나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직접 덤벼들다니? 그런 당혹 섞인 눈빛이었다.
“캬아아아아!”
하지만 당혹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파르카의 입장에선 호재임에 틀림없었으니까!
“그래그래, 걱정 마.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따까리들도 같이 보내줄게.”
척.
뒤로 물러난 뒤 자세를 갖췄다.
파르카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봤고.
“캬르카! 카르아!”
쿵, 쿵!
놈은 도끼로 지면을 두어 번 내려친 후,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그것도 고블린 정예 전사 세 마리와 동시에 말이다.
아니, 이런 졸렬한 새끼가…… 다이다이 뜨자고 했는데 4:1은 좀 비겁하지 않나?
“나도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타입이라.”
빌어먹을 하수도를 전전하며 시궁쥐부터 잡던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가장 추하고 천한 밑바닥에서 아등바등한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다.
절망적인 열세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백병전!
그런 것조차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만큼 정신이 닳아 있었다.
피웅덩이에서 뒹굴었던 나날의 비린내가 여전히 지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올바르게 정돈된 전장에서 칼부림을 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루칸다의 축 늘어진 오른팔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총탄이 꿰뚫고 지나가며 힘줄과 근육을 파열시켰고, 덕분에 완전히 오른팔이 뇌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오른팔의 통증보다 먼저 눈앞에 나타난 옛 전우의 모습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부풀어 올라 터질 만큼 발달된 근육질의 몸매.
두툼한 팔뚝에 새겨진 ‘붉은 종달새’의 문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얼굴.
모든 것이 루칸다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모습이었다.
“사크바하…….”
루칸다는 옛 전우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701호 둥지의 지휘자 사크바하는 씁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외딴 섬에서 다시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군, 루칸다.”
붉은 종달새는 ‘르 만타나 근위 유격대’의 상징이었다. 글로레나 왕조의 군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악명 높은 마물 부대다.
인간들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마물 부대.
상당히 이질적이고 모순된 것 같은 이 유격대는 오로지 제7왕녀 ‘피르에나’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였다.
인간의 왕국을 위해 싸우기 때문에 마물들 사이에선 ‘변절자들’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옛 전우를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얄궂은 플롯 아닌가? 만약 신이 우리의 운명을 이런 식으로 써 내린 것이라면 신은 성격파탄자거나, 혹여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것일지도 모르겠군.”
사크바하는 거대한 폴암을 들어 장전손잡이를 당겼다.
털컹!
슬라이드가 젖혀지며 드러난 탄피배출구에서 뜨겁게 달궈진 탄피가 튀어 나왔다.
머스킷과 마찬가지로 총탄을 발사할 수 있는 폴암.
그 개념은 간단했지만, 작동 원리는 현시대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조였다.
저것이 대륙의 ‘공학무기’라는 사실을 루칸다도 알고 있었다.
“물론 기도한다고 모든 일이 이뤄지는 건 아니지. 이번 경우엔 자네가 나머지 흑요석 검을 찾고 있다는 풍문을 근거로 움직인 걸세. 아리카 섬이라면 그런 유물이 한두 개쯤 묻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철컹!
사크바하는 새로운 탄을 넣은 후 폴암 자루에 달린 슬라이드를 거칠게 밀어 장전했다.
“자네의 숨통을 끊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 수 있겠나?”
“거부권은 없겠지.”
“어째서 왕녀님을 살해한 것이냐.”
사크바하의 눈빛에 좌절과 증오가 섞인 감정이 드러났다. 피르에나는 사크바하를 비롯한 마물들의 희망이자, 빛이었다.
그녀가 꿈처럼 속삭이던 다툼 없는 낙원의 이야기는 전장에서 많은 것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사크바하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존중과 공존.
그 어색하고 낯선 단어들이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르 만타나 근위 유격대는 피르에나 왕녀가 약속한 낙원을 위해 수많은 전장을 재패해 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저 언덕만 넘으면 낙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만이 유격대가 매일 반복되는 격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다.
피르에나 왕녀가 돌연 죽어버리기 전까진 말이다.
사크바하의 살기 어린 시선을 똑바로 직시하던 루칸다가 갑자기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으로 묻고 싶군, 사크바하. 그 인간 계집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단 말인가?”
“피르에나 님의 의지까지 모욕할 셈이냐.”
“왕위 계승권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어린 왕녀다. 왕위를 계승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것. 하지만 병력의 출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겠지.”
루칸다는 시간을 재듯 짐짓 느릿하게 말했다.
“결국은 인간 계집의 알량한 잔꾀다. 설령 낙원의 건국이 그 계집의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출혈로 인해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머리에 공급되는 산소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의식이 몽롱해졌다.
“고작해야 어린애의 망상 같은 이상일 뿐이다, 사크바하여. 어린아이의 망상을 현실에 투영해봤자…… 추잡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더 이상의 모욕은 듣지 않겠다. 입 다물어라, 루칸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나? 아, 혹시 자네도 그 계집의 몸을 맛본 것인가? 확실히 인간 계집치고는 나쁘지 않았지. 그 계집을 죽이기 전에 조금 망설였을 만큼 말이야. 참으로 아쉽군, 그 계집이 내게 목숨을 구걸하며 스스로 치마를 걷어 올리던 모습을 자네도 봤어야 했는데.”
“루칸다아아아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같은 꿈을 꿨던 동지의 입으로 직접 살해혐의를 부인해주길 바랐다.
여전히 같은 낙원을 바라보고 있길 간절히 바랐지만, 루칸다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을 뿐이다.
사크바하가 폴암을 치켜든 채 순식간에 20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약했다. 이미 노쇠한 몸뚱이라고는 해도 그 기량만큼은 녹슬지 않았다.
부웅!
폴암의 칼날이 허공을 가로질러 루칸다의 머리를 쪼개기 직전!
카가강!
세 자루의 칼날이 폴암을 막아냈다.
어느덧 나타난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 세 마리가 루칸다를 보호하듯 앞을 막아섰다.
평소의 사크바하였다면 이러한 가능성 역시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고블린 살수의 기척을 감지했거나.
하지만 지금 증오에 몸을 지배당한 사크바하의 눈에는 오로지 루칸다만이 보였다.
“살려서 돌려보내진 않겠다……!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루칸다아아아!!”
“죗값은 치러야겠지. 늘 언제나, 그래 항상 오늘이 아닐 뿐이다.”
퍼엉!
사크바하의 눈앞에서 매캐한 연막탄이 터졌다.
부웅!
사크바하가 폴암을 휘둘렀지만,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폴암을 사격 자세로 쥐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루칸다와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자리를 뜬 뒤였다.
* * *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코루렌을 포함한 고블린 머스킷티어 부대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전후에서 달려드는 100여 마리의 구울들! 거기에 갑작스럽게 통로의 양쪽 흙벽이 무너지며 상황은 더욱 혼잡스럽게 변했다.
“차, 착검! 착검이다!”
코루렌은 다급하게 명령을 외쳤지만.
“캬아아!”
“키륵, 키르르!”
“키르!”
패닉 상태에 빠진 고블린들은 흙더미에 파묻혀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순식간에 공세가 전환되었고, 고블린 종족의 특징 중 하나인 ‘빠른 전의 상실’이 문제가 되었다.
거리를 확보하고 공세를 유지한다면 고블린 같은 저급한 병력으로도 머스킷 부대를 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돌발 상황에선?
“신선한 고기에 불과하군.”
스칼렛은 여유롭게 걸어오며 말했다.
이미 수십 마리의 구울이 고블린들에게 달라붙어 몸뚱이를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전후의 퇴로가 완전히 막힌 상황!
몇몇 고블린들만이 발포를 하거나, 착검에 성공하여 백병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머리를 제대로 부수지 않는 이상 구울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코루렌의 부대가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사격에 당한 구울은 10마리도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철구슬을 사출하는 이 막대는 꽤나 흥미로웠지만, 야전 지휘자의 판단이 너무나 아쉬워.”
덜그럭.
스칼렛은 고블린의 시체에서 머스킷 한 자루를 붙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높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 후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해괴한 막대기는 내 부대가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겠네. 어디 보자, 이렇게 사용했던가?”
“그, 그만…… 제, 제발 목숨, 목숨만은……!”
스칼렛은 장전을 끝낸 머스킷을 들고 코루렌의 미간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장성한 수컷이 아기새처럼 지저귀며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유쾌하구만.”
타앙!
격발음과 함께 코루렌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걸로 초전 부대의 완전 괴멸. 701호 둥지에서 후속 부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스칼렛의 업무는 이걸로 끝이었다.
[루칸다 : 젖는 일에 실패했다.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까지 정비하도록.]
[스칼렛 : 필멸종이 이 늙은이를 혹사시키고 싶어서 일거리를 늘려 주는군.]
스칼렛은 끌끌 웃으며 머스킷을 어깨에 걸쳤다.
아직 쉴 때는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