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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31화 (3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31화

    삼각문해(3)

    푹!

    “캬악!”

    마체테에 꿰뚫린 고블린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토해졌다.

    “키륵, 키륵!”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고블린 정예 전사는 마체테를 뽑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전우들 역시 전투를 끝마치고 숨을 돌리고 있었다.

    파르카의 부대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하라부 휘하의 고블린 전사들을 토막 내고 있었다.

    고작해야 부락 규모의 전투 경험이 전부이며,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에 힘쓰고 있는 고블린 전사들이 어떻게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파르카가 이끄는 이 정예 전사들은 아리카 섬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전투에 모조리 참가했던 베테랑들이다. 비록 고블린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지만, 쌓이고 쌓인 전투 경험과 노하우는 결코 우습게볼 수준이 아니었다.

    복잡한 전술이나 전략은 없다.

    고블린의 머리로 구상해낼 수 있는 작전이란 그리 다양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행동 원리이기에 파르카의 고블린 부대는 난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복잡한 계획 없이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왔다. 그렇기에 전장의 변칙 요소에 유연하고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키르, 키르륵, 키륵!”

    뒤늦게 나타난 거대한 덩치의 고블린.

    고블린이라기 보다는 오크에 가까운 크기였다. 몸 곳곳에는 오랜 상처가 선명히 남아 있었고, 견고해 보이는 금속 흉갑도 여기저기 깨지고 닳아 있었다. 이 고블린이 얼마나 많은 격전을 치르고 살아남았는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의 고블린. 파르카는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한 후 곧장 명령을 내렸다.

    “키륵!”

    이번 부락에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전사는 모조리 처리했다. 이제 남은 고블린들을 생포하여 아비엥의 둥지로 보내야만 했다.

    파르카의 명령에 따라 고블린들이 모이기 시작한 순간.

    저벅저벅.

    수풀 속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파르카와 그의 부대원들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볼 때였다.

    척!

    수풀 속에서 나타난 수십 마리의 렛맨 전사들이 방패 돌격 자세를 취했다. 거리는 20여 미터.

    “키륵?”

    휘릭!

    파르카가 손에 들고 있던 도끼로 언더 케이지 부대를 가리켰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몰살’이었다.

    “캬아아악!”

    “키르륵, 키륵!”

    “키익!”

    고블린들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부대의 규모는 고블린 정예 전사 210마리. 고작 60여 마리의 렛맨 부대에 지레 겁을 먹을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쮸, 쮸쮸!”

    언더 케이지 부대가 2열로 늘어서 충돌에 대비했다.

    전열은 방패를 바짝 몸에 붙이고, 후열의 렛맨들이 그 뒤에 서서 상단부를 커버하는 것과 동시에 숏소드를 치켜드는 자세를 취했다.

    터엉!

    가장 먼저 달려든 고블린 전사들이 방패에 맞고 주춤거린 순간.

    쉭!

    푸욱!

    “캬악!”

    “크카악!”

    후열의 렛맨들이 재빠르고 짧게 찔렀다.

    그와 동시에 쏜살같이 뒤로 물러났다.

    “키륵!! 키르륵! 키륵!”

    파르카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 렛맨 부대는 일반적인 고블린 전사들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전투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병력 규모의 차이가 4배 이상은 나는 상황.

    전투에서 규모의 경쟁은 절대적이다.

    확실히 방패 보병의 2열 전법은 유효하지만, 이 정도의 규모차라면 파훼법은 당연히 존재한다.

    매우 간단하다. 바로 사면 포위다.

    파르카의 명령에 따라 고블린 전사들이 산개하여 렛맨 부대를 둘러싸려는 순간!

    “쮸!”

    렛맨 부대가 재빠르게 진영을 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키르륵!”

    “키륵!”

    당연히 고블린 전사들이 뒤쫓으려 했지만.

    파바박!

    푹, 푸욱!

    그때 언덕 위 수풀 속에 엎드려 있던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엄호 사격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고블린 정예 전사 두 마리가 당했다. 단 한 번의 충돌과 매복 사격조의 기습으로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렛맨 부대는 유유히 전장을 빠져나갔고, 엄호 사격을 끝마친 고블린 부대도 자리에서 벗어났다.

    “캬아아아아! 키륵, 키르륵!”

    머리끝까지 악이 오른 파르카가 괴성을 내지르며 도끼를 허공에 휘둘렀다.

    [누자베스 : 제대로 야마가 돌아버린 것 같다야. 우리가 하꼬 둥지라 같이 진흙탕에서 뒹굴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야마에 스팀 치솟았겠지.]

    누자베스는 큭큭 웃으며 언더 케이지 부대의 퇴로를 확인했다.

    [누자베스 : 그나저나 우리 스칼렛 씨는 자택경비 일 잘하고 있습니까?]

    [스칼렛 : 아, 그렇지 않아도 상대의 병력이 입구 부근까지 도착한 모양일세.]

    스칼렛은 혈루목의 수액이 담긴 와인잔을 그대로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끈적끈적하고 역한 향을 머금은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며 타는 듯한 통증을 유발시켰다.

    스칼렛은 거칠게 소매로 입술을 닦아낸 후 깊고 천천히 날숨을 토해냈다.

    [스칼렛 : 간트리아 성의 로만 장군은 지독한 겁쟁이였지. 숨이 멎은 적군의 시체를 토막 내서 모조리 불태우지 않으면 무서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는군.]

    스칼렛은 길게 이어진 둥지의 통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스칼렛 : 이번 적도 로만 장군 만큼 현명할지 기대해 보겠네.]

    그녀의 붉은 동공에 그림자가 비쳤다.

    701호 둥지의 머스킷티어 부대. 고블린 전열보병의 등장이었다.

    * * *

    전열보병!

    전장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으킨 혁명적인 병종이다. 플린트락 방식의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이 고블린 부대는 말도 안 될 정도의 범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가 보병이든, 중갑으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든.

    궁병 부대든 기병 부대든.

    산악 지역과 평지. 혹은 이러한 둥지 내부에서의 전투까지!

    모든 상황과 지역, 상대의 병종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막강한 화력과 우세한 사거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인 명중률은?

    그건 3열로 정렬하여 일제 사격을 통해 화망을 형성하면 해결될 문제다.

    탄약의 공급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보다 더 유용하게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병종도 없었다. 훈련 기간도 길지 않다.

    값싸게 징집할 수 있는 고블린들을 활용하여 부대를 구성해도 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고블린 전열보병은 중장갑 미노타우로스 부대까지 벌집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뭐냐 저 시체는?”

    701호 둥지의 제5부대. 레드포지의 부대장 ‘코루렌’은 눈앞에 대치한 적을 확인한 후 쓴웃음을 머금었다.

    고블린 백인장 코루렌이 이끌고 있는 전열보병의 규모는 90여 마리에 달한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다는 제약이 있지만,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다면 전열보병은 규모의 두 배 이상의 효용성을 지닌다.

    게다가 코루렌의 전열보병 부대를 맞이한 것들이란 다 죽어가는 시체 무리가 아니던가?

    [코루렌. 네 임무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이다. 765호 둥지의 가용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서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코루렌이 승리를 확신한 직후였다.

    701호 둥지의 지휘자 ‘사크바하’의 전언이 들려왔다. 베테랑급의 오크 전사였던 사크바하는 언제나 신중한 성격이었다.

    ‘더러운 오크 주제에 잘난 척은…….’

    하지만 코루렌은 사크바하를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701호 둥지에 먼저 와서 죽기 살기로 싸워온 건 자신이다. 그는 둥지의 관리자인 아비엥에게 더욱 충직하고, 더 많이 헌신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치된 늙은 오크가 지휘자의 자리를 꿰찼으니 도저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일부러 공적을 세우지 못하게 하여 아비엥 님의 신임을 독차지할 셈이겠지. 그 빤한 수작질이 역겨워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힘들군.’

    언제나 그랬다.

    사크바하는 코루렌에겐 가장 위험한 전초전을 맡기고, 이후 요리가 차려지면 자신의 본대를 보내 맛있는 부분을 독차지해 왔다.

    그 공적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왔던 것이다.

    ‘저런 시체 무리조차 제압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아비엥 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뻔하지.’

    탐색전이 본래의 임무이긴 하지만, 코루렌은 자신의 재량으로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판단했다.

    최소한 저 시체 무리만 모조리 쓸어버리고 돌아가도 아비엥의 평가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거리는 100미터 남짓.

    대열을 갖추고 사격을 개시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우워어어어!”

    “으어어!”

    그 직후였다.

    코루렌의 부대를 향해 구울 무리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흐느적거리던 시체들이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재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결국 구울은 구울이다.

    생각보다 빨랐을 뿐이지 그 속도는 100미터를 좁혀오는데 30초는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초탄 사격 후 퇴각이 정답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런 수준의 병력이라면 여기서 박살을 내놓을 수 있었다. 코루렌은 지휘용 검을 치켜들며 마음의 방향을 정했다.

    * * *

    우레와 같은 격발음이 둥지의 통로를 울렸다.

    수십여 발의 철구슬이 화망을 형성했고, 그 화망에 걸린 구울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초탄 사격만으로 달려오던 구울의 8할이 당했다. 20마리 중 4마리만이 남아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1열 재장전!”

    코루렌은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저런 오합지졸을 상대로 구태여 퇴각할 필요는 없었다. 사크바하 역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코루렌의 판단에 동조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적의 병력이 대등하거나 그와 비슷하여 아군의 손실이 우려될 경우가 아니라면 조금 더 밀어붙여도 될 법했다.

    “역시 본대는 파르카의 병력을 막으러 간 모양이군.”

    코루렌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통로의 안쪽을 내려다봤다.

    지금 이 둥지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걸어 다니는 과녁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울 무리다.

    코루렌은 이 765호 둥지 관리자의 목을 직접 참수하는 상상을 했다. 하이브 마인드의 목을 친다는 건 더없이 큰 공적이다.

    아비엥 역시 그 공적을 크게 치하해 줄 것이다.

    “전진이다! 대열을 유지하며 전진한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구울 무리가 달려들었다.

    대략적으로 20마리씩 뭉쳐 접근을 시도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전열보병 부대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달려들 때마다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코루렌의 부대는 쓰러진 구울의 시체를 밟고 넘으며 점점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렇게 세 번 정도 구울 무리를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코루렌의 부대가 지나온 길에는 쓰러진 구울들이 수북했다.

    눈짐작으로 봐도 50마리는 족히 넘어 보였다.

    아군의 피해는 제로.

    그 어떤 코스트도 없이 50마리의 적을 처리한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지금 이대로라면 수백 마리쯤 있길 바랐다. 처리한 적의 머릿수가 늘어날수록 코루렌의 공적 역시 커질 테니까.

    코루렌이 부대를 이끌고 둥지의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드디어 다음 구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일제히 달려들어 승부를 볼 생각인지 50마리쯤 되어 보였다.

    하지만 헛수고다. 3열로 정열한 전열보병의 위력은 연속 사격 속도에 있다. 50마리가 일제히 달려들어도 녀석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재밌는 무기로군. 굉음과 함께 뜨겁게 달궈진 쇠구슬을 발사하는 병기라. 먼 동쪽에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은 있지만 병기로 사용되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세.”

    그때 코루렌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스칼렛은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어쨌거나 피차일반이로군. 나는 그 기묘한 병기를 처음 보는 것이고, 그쪽은 구울을 처음 보는 것 같으니.”

    “구울?”

    코루렌이 되묻자 스칼렛은 재밌는 얘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깔깔 웃기 시작했다.

    “제대로 머리를 부쉈나? 그게 아니라면 은말뚝을 심장에 박았나? 미처 말뚝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목과 사지를 잘라 불에 태웠나? 혈액이 모두 마를 때까지 햇빛에 말렸나? 성소의 유물로 정화된 물을 끼얹기라도 했나? 신의 공인을 받은 성직자가 축복한 무기를 썼나?”

    “그게 무슨…….”

    “그중 무엇 하나도 해당하지 않는다면 유감스러운 결말이 되겠군.”

    스칼렛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루렌과 그의 부대 뒤편에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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