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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29화 (2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9화

    삼각문해(1)

    “그 가정은 흥미롭지만 썩 좋은 아이디어 같지는 않군.”

    스칼렛은 종아리까지 닿은 스커트의 끝자락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귀공이 사실은 다른 세계의 작가이며, 이 세계가 귀공이 쓰던 소설 속의 세계라는 가정이었지?”

    “그래, 머리를 쥐어 짜내도 도저히 원고가 안 나와서 끙끙대던 차에 이렇게 하이브 마인드로 소환되었다는 가정이다.”

    걷어 올린 스커트의 레이스 밑으로 가늘고 새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살짝 빈약해 보일 정도로 선이 얇았지만, 그 덕분에 무릎뼈가 도드라져 보여 기묘한 미려함이 느껴졌다.

    스칼렛은 내 시선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지 그대로 걷어 올린 스커트를 허벅지 중간 부분에서 묶었다.

    “그리고 귀공이 무사히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여기서 겪은 일을 소설로 써서 대중에게 공개할 계획이고?”

    “과연 벌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다중 세계선 가설과 흡사하지만, 귀공의 가정대로라면 평형의 세계가 아닌 상하의 위계가 존재하는 다중 세계로군.”

    스칼렛은 소매까지 걷은 후 암벽 구석에 세워 놨던 검을 한 자루 집어 들었다.

    “재밌는 얘기지만 그 계획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하네. 뭔지 알겠나?”

    “글쎄. 소설이 아니라 기행문이라는 점?”

    “아닐세. 소설의 결말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이라네.”

    과연!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이곳에서 겪은 이야기를 기록해서 출판한다는 성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즉 소설이 출판된다는 건, 귀공이 무사히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1화부터 결말이 빤한 소설이었다니……!”

    그게 맹점이었다.

    거기까진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뭐, 그런 문제점이야 아주 약간의 서술 트릭을 이용해서 독자들을 속일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닐세.”

    스칼렛이 검을 뽑아 들었고, 나도 검을 뽑아 들며 자세를 취했다.

    “진짜 문제는 귀공의 검술 실력이 절망적일 만큼 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이거 수련하는 장면도 소설로 써야 되니까 트렌드에 맞는 대사로 해줘.”

    “하이브 마인드는 때려치우고 순진한 시골 처녀애나 꼬셔서 농사나 짓게.”

    “…….”

    괜찮다.

    나중에 저런 대사는 다 각색을 해서 출판할 거니까 말이다. 스칼렛의 대사는 ‘귀공은 천만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검술의 천재일세! 이거 가르칠수록 너무 빨리 배워서 놀랍구만!’으로 결정했다.

    스칼렛이 내 둥지의 챔피언으로 영입되고 일주일째였다. 첫날부터 스칼렛에게 부탁해 검술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모처럼 류시혁과 백주월의 스킬을 얻었으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어야겠지.’

    그런 심산으로 본격적인 수련에 돌입한 것이었다.

    물론 천하제일검의 경지를 노리는 건 아니다. 그저 내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 놈들의 허를 찌르고 도망칠 시간을 벌 정도면 충분했다.

    공교롭게도 스칼렛이 어느 정도 인간의 검술에 식견이 있었고, 검술 훈련을 시작한 건 좋았다만.

    “그럼 검술 말고 처녀 꼬시는 법이나 가르쳐 주지 그래?”

    “흠…… 그것도 나쁘지 않군. 남여를 불문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은 익혀놔서 나쁠 건 없네. 귀공은 기본적으로 미형의 인간 형태로 의태했으니 기술만 살짝 익히면 어렵지 않을 걸세.”

    척.

    스칼렛이 검을 중단으로 잡은 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다시 들어와 보라는 듯 검끝을 까딱였다.

    “인간의 심리는 단 세 가지만 기억하면 되네.”

    타닷!

    5미터 정도의 거리를 한순간 도약하며 스칼렛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길게 빼놨던 검을 앞을 향해 짧게 찔렀다.

    휘익!

    벌침처럼 매섭게 쏘아진 검은 스칼렛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카앙!

    스칼렛은 손목의 스냅만으로 내 검을 크게 쳐냈다.

    “큭!”

    근력 자체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손목이 다 시큰거렸다. 게다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첫 번째는 독점욕이지.”

    가까스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다시 스칼렛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사선을 그리며 허공에 궤적이 그려졌다.

    키잉!

    이번엔 흘려내지 않고 그대로 검을 멈춰 세웠다.

    내가 양손으로 꽉 쥐고 있는 검을 한 손의 힘만으로 멈춰 세운 후 스칼렛이 이어 말했다.

    “두 번째는 상실에 대한 공포감이겠고.”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창자가 모조리 철렁였다.

    스칼렛의 구두굽이 내 복부에 꽂힌 게 보인 순간, 입에서 절로 쇳소리가 토해졌다.

    “커억……!”

    “세 번째는 서로를 파괴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희열일세.”

    복부의 통증으로 무릎이 풀릴 뻔했지만, 스칼렛이 물러날 공간을 선점했다.

    오른발.

    그리고 뒤이어 날아올 검격의 궤도를 예측하며 팔을 들었다.

    카앙!

    역시나 우측에서 밀쳐내며 몰아붙일 작정이었던 것처럼 스칼렛의 검이 내리쳐졌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일세. 부서지고 부서져서 너덜너덜해진 것들끼리 끌리는 법이지. 그게 사랑이라든가 우정 같은 애매모호한 개념의 감정보다 훨씬 독하고, 질겨. 일종의 저주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 관계만이 인간의 마음을 갉아먹고, 옭아매는 법이라네.”

    내리쳐진 검을 막으려던 찰나.

    툭.

    스칼렛의 어깨가 먼저 내 가슴에 닿았다.

    올렸던 팔을 내릴 새도 없이 스칼렛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쿡 찔렀다.

    “여전히 배우는 게 느리지만 처음보단 아주 조금 나아졌군.”

    “껍데기만 남은 상태가 이 정도면 전성기 땐 얼마나 강했다는 거야…….”

    스칼렛이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쿡쿡 웃었다.

    “3천 년 정도 여흥으로 배운 검술일 뿐일세. 여흥으로 3천 년 정도 계속하다 보면 누군가 수십 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갈고닦은 경지에 필적하는 법이지.”

    스칼렛은 빙긋 웃어 보인 후 묶어 놨던 스커트 끝자락을 풀었다.

    이걸로 오늘의 검술 수련은 끝.

    셔츠의 단추를 풀고 땀을 식히고 있자, 일전에 스칼렛에게 맡겨 놨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발견했던 그 동굴은 어찌 됐어?”

    “아…… 슬슬 완성이 됐을 것 같은데, 보러 갈 텐가?”

    신규 챔피언 스칼렛의 고유 능력인 ‘패러사이트 블러드’의 효과를 확인해 볼 차례였다.

    * * *

    “으어어어…….”

    “어…….”

    “으어…….”

    둥지에서 비탄의 숲 방향으로 나와 30여 분 떨어진 거리였다. 얼마 전 루칸다가 발견했던 그 동굴에선 벌써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전투를 위해 나선 것은 아닌지라 나를 따라 나온 인원은 루칸다와 스칼렛 둘뿐이었다.

    “젠장, 역겹기 그지없군요.”

    루칸다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동굴은 단순히 시체 썩는 냄새만 만연한 게 아니었다. 안쪽에는 수십여 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고, 개중에는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걸어 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트레카 마을의 자경단 시체들을 여기에 모아 놨지.’

    그리고 이 동굴은 본래 비탄의 숲에서 활동하던 도적놈들의 소굴이었다. 루칸다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도적 무리를 모조리 전멸시켰고, 그 뒤로 모든 인간의 시체를 모아 놓았다.

    시체가 쌓인 구역을 스칼렛의 피로 오염시킨 결과가 지금 눈앞의 광경이었다.

    “이건 용서받지 못할 행동입니다, 각하! 죽음은 온전히 밤의 어머니가 관장하는 영역. 이런 식으로 죽음을 기만하는 행위는 언젠가 재앙을 불러들일 겁니다!”

    루칸다는 분개하듯 소리쳤다.

    “필멸종이여, 꽉 막힌 소리를 하는군. 이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허락 하에 이뤄지는 유예에 불과하네. 나의 아버지인 나르시안으로부터 혈맥의 계승자들이 그 방법을 전수받았지.”

    “이래서 흡혈귀 놈들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루칸다는 스칼렛을 무시하며 내게 말했다.

    “아니…… 나도 저 냄새나는 구울들이 사랑스러운 건 아닌데…….”

    “그런 감상이 중요치 않다는 건 귀공이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전쟁이란 1차적으로 규모의 경쟁이네.”

    스칼렛의 주장은 정론에 가까웠다.

    현재 이 동굴에서 생산 중인 구울을 모조리 합치면 내 병력은 순식간에 두 배가 된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부대 운용비가 소모되는 기존의 부대에 비해 구울로 구성된 이 부대는 제로 코스트에 가까웠다.

    ‘스칼렛의 혈액을 극소량 소모하는 것뿐이니까.’

    한 방울의 혈액과 나머지는 스칼렛의 정신력으로 이 구울 부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쪽에선 한 푼도 쓰지 않고 병력이 두 배가 되는 것이니 상당한 효율성이었다.

    “그리고 진짜 죽음을 기만하고 있는 쪽은 누구일까?”

    쿡쿡 웃고 있는 스칼렛과 달리 루칸다의 눈빛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구울 부대의 운영은 내게 맡겨주게. 저 까탈스러운 필멸종에겐 맡기기 힘들 것 같으니.”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스칼렛이 말을 끝마친 뒤 바로 새로운 부대가 편성되었다.

    [지휘자 직속 제1부대 : 그레이브 야드]

    -부대장 : 없음(스칼렛)

    -부대원 : 구울 94체

    -정보 : 이 썩은 내 진동하는 부대는 죽음에 관한 원초적 공포를 상기시킵니다. 그 누구도 걸어 다니는 시체들과 맞붙길 원하지 않습니다. 시체 무리에 새롭게 합류하길 원하는 얼간이가 아니라면 말이죠.

    이번 고블린킹 파르카와의 전면전에서 가용할 수 있는 부대의 종류와 규모를 다시 헤아려 보았다.

    렛맨 부대인 ‘언더 케이지.’

    고블린 사수 부대 ‘고블린 서비스.’

    루칸다의 직속 부대 ‘비르겐슈타인.’

    스칼렛의 직속 부대 ‘그레이브 야드.’

    모두 합치면 210마리쯤 되는 규모였다.

    “구울 생산은 순조로운 것 같고.”

    나는 루칸다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파르카는 요즘 어때? 잘 지내?”

    루칸다에겐 일주일 동안 파르카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령을 내려놨었다.

    파르카는 비탄의 숲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 채 기존 추장인 ‘하라부’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

    물론 그동안 우리가 녀석의 부락을 야금야금 갉아먹긴 했지만, 파워 밸런스가 그 정도로 깨질 리는 없었다.

    “아직까진 눈에 띌만한 행동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어디 감히 고블린 나부랭이 주제에 전쟁 군주가 하는 일에 끼어들 수 있겠냐.”

    하이브 마인드란 직위는 마족들 사이에서 꽤나 유용했다. 스칼렛처럼 수천 년 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세상물정 모르는 마물을 제외하곤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리 비탄의 숲에서 잘나가는 고블린이라고 해도 결국은 빽이 없는 중립 마물이다.

    그에 비해 하이브 마인드는 마왕 아일라드라는 어마어마한 뒷배가 있는 존재.

    어떤 이유에서든 하이브 마인드와 대립한다는 건 바체트 령에 군림하고 있는 마왕에게 도전하는 행위다.

    대놓고 마왕군과 싸우고 있는 인간들이나 하이브 마인드를 건드리는 법이다.

    ‘물론 대놓고 목까지 치려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당장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누구나 나중에 죽는 편을 택한다.

    그러니까 파르카의 입장에선 당장 내가 자신을 노리지 않는 이상 섣불리 선수를 치기 까다로운 상황인 것이다.

    “선공권은 이쪽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 스칼렛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그리 단정할 수 있겠나?”

    “그럼 우리가 선빵을 맞을 확률도 있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 그러니까 귀공에게 협력하고 있는 저 필멸종처럼. 그 파르카라는 필멸종 역시 붙을 구석이 있지 않겠나?”

    “꽤나 극단적인 가정인데.”

    “귀공이 다른 세계의 작가였다는 가정보다는 현실적일세.”

    확실히 고려의 범주에 들어가는 가정이다.

    “루칸다. 이 근방에서 내 사정권에 들어오는 다른 둥지가 있었나?”

    “아마 고개 너머 산의 중턱쯤에…… 설마.”

    “어떤 새끼가 내 사냥감의 뒤를 봐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찢어 죽이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지 않나?

    하이브 마인드란 원래 그런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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