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28화 (2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8화

    밑작업(3)

    최초의 밤.

    르낙시아라고 불리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조금 케케묵은 신화를 언급해야만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일상적인 밤을 게르나의 고어로 ‘나크랏’이라고 하며, 최초의 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르낙시아’였다.

    그렇다면 르낙시아라는 괴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엔?

    하루 종일!

    365일 24시간이 쭉 낮이었단 말이다.

    솔직히 그런 행성이 실존한다면 어떻게 유기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신화니까 대충 넘어가자.

    그 나사렛의 암소에서도 마구간에서 그아아앗!! 하지 않나? 나사렛이 아니던가? 마구간이 아니라고? 어쨌든.

    태양의 여신 스텔라가 주신으로서 창조한 세계가 바로 이 세계였고, 한동안은 스텔라가 자신의 피조물들과 하하호호 하며 잘 지낸 것 같다만.

    어떤 곳이든 그러하듯 잘난 놈과 못난 놈들이 생겨났고, 기회의 공평함을 추구했던 스텔라는 피조물들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스탠드를 추구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루저 놈들은 허구한 날 처맞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현재는 마족이라고 불리는 종족들이 그랬지.’

    어쨌거나 인간들에게 처맞고 핍박당하던 마족들을 가엾이 여긴 또 다른 여신이 있었다.

    그게 바로 밤의 어머니이자 혼돈의 의지라고 불리는 여신 ‘테네브레’였다.

    테네브레는 핍박당하고 박해받던 마족들을 자신의 치마폭 아래에 숨겨줬고, 그것이 바로 최초의 밤인 ‘르낙시아’였다.

    ‘그러고 보니 당시 인간 영웅이었던 신궁 아실리벨이 밤하늘을 향해 불화살을 쏴서 구멍을 뚫었다는 설화도 있었지.’

    불화살이 테네브레의 치맛자락을 뚫은 자국이 밤하늘에 보이는 별과 달이 되었다는 설화다.

    어쨌거나 현재도 테네브레가 치맛자락을 이 세계에 두르면 밤이 되고, 스텔라가 그 치마를 걷어내면 낮이 된다는 식의 신화다.

    중요한 건 이 르낙시아 이전에 존재했던 마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허구한 날 반신급의 인간들과 투닥거리고 살던 마족들이란 말이다. 물론 처맞고 다니긴 했지만, 아니 거의 비등하게 싸웠던 놈들이다.

    현재 피가 희석되어 약해진 마족들과 비교하면 그 능력은 신화에 나올 수준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아즈얼라 같은 놈들이다.

    ‘사룡족 벤테인, 나르시안의 자손들, 리케릴 성찬회, 밤의 시종 헬베르카, 3인의 윤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덟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놈들까지. 모두가 ‘반 르낙시아’라고 불리는 고혈종이다.

    참고로 마왕 아일라드 역시 그 여덟의 기둥 중 한 사람이었다.

    ‘반 르낙시아에 속한 흡혈귀라면 나르시안의 직계 자식이거나, 손녀뻘 되는 놈이지.’

    이거 꽤나 상당한 거물급 인사가 행차하신 모양이다. 프로릴의 프린스인 브람스만 하더라도 백주월이 미처 끝매듭을 짓지 못하고 포기했을 만큼 강대한 흡혈귀 아닌가?

    그런 브람스보다 더 혈맥이 짙은 흡혈귀라니!

    자리를 옮겨 내 둥지의 심부로 돌아왔다.

    스칼렛이 마저 잠이나 다시 자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순순히 나를 따라와 줬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군. 코흘리개가 프로릴의 군주가 되어 있고, 헬베르카의 적손은 이런 허름한 토굴 생활이라니.”

    내 둥지에 도착한 스칼렛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흑철전쟁은 어떻게 됐지?”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흑철전쟁은 서부가 이겼어.”

    내가 짜놓은 설정이라 확실하다.

    주저 없이 대답해주자 스칼렛은 사뭇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모습만 보면 어딘지 모르게 토끼 같은 이미지다.

    하지만 스칼렛은 이내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결국 여덟 기둥이 서부를 차지하는데 성공했군. 바하무트의 역량으로는 전세를 뒤집기 힘들었나. 아, 딱히 귀공의 동혈을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네.”

    나도 모르던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흑철전쟁에 헬베르카의 핏줄을 지닌 마족이 동부군으로 참전했던 모양이다.

    “바하무트는 내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사내 중 하나일세. 아, 이 상처가 남아 있었군.”

    “어? 잠, 잠깐…… 우왁!? 뭐야, 뭐하는 거야!”

    나는 드레스의 앞섬을 풀어 헤치려는 스칼렛을 황급히 저지했다.

    “귀공의 동혈에게 당한 상처라도 보여줄까 싶어서…….”

    “안 보여줘도 돼! 아니, 부탁이니까 보여주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음, 알았네.”

    스칼렛은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내 말에 따라주었다.

    “그래서 이런 변방의 섬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아무래도 스칼렛의 흥미를 끈 것은 내 존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녀의 관점에서 헬베르카는 유서 깊은 명문가. 한때 대륙의 동쪽 절반을 차지했을 만큼 막강한 집단이다.

    그런 헬베르카의 피를 계승하는 자가 바체트 령의 조그마한 섬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헬베르카는 이미 명맥이 끊긴 가문이야.”

    혹시나 내가 모르는 적손이 생존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론 헬베르카는 이미 신화에나 등장하는 먼 옛날에 존재했던 가문이다.

    나는 내가 헬베르카의 적손이 아닌, 그 혈액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합성 생물체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리고 나를 창조해낸 녀석이 8대 마왕 중 하나.

    아니, 스칼렛이 활동하던 시기엔 ‘여덟의 기둥’이라고 불렸던 녀석들 중 하나인 아일라드가 나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스칼렛은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미간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모든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이해했네. 귀공이 그 하이브 마인드라는 잡종이라는 것과 아일라드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네. 그래서 귀공의 군세는 어디 있다는 말인가?”

    “지금 보고 있잖아.”

    이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렛맨과 고블린들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스칼렛은 한쪽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귀공은 재미난 농을 할 줄 아는군. 이 늙은이를 웃기는 건 이제 됐네. 농은 빼고 군세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저게 전부인데…….”

    “고작해야 백 마리도 안 될 것 같네…….”

    “아슬아슬하게 100마리 정도는 된다만.”

    “군대가 아니라 양아치 패거리로군. 뒷골목에서 패싸움 정도 하면 딱 알맞겠구만.”

    스칼렛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어 말했다.

    “심연의 여제 카셀로나가 부랴부랴 급하게 징집한 오합지졸들도 2만은 됐네. 그 정도 규모도 안 되면 군대라고 부르면 안 되지.”

    “그때랑은 시대가 다르니까 말이야. 여러모로.”

    흑철전쟁 때는 10만 병력도 대수롭지 않은 규모였을 것이다. 스칼렛은 아마도 그 당시에 활동했던 흡혈귀. 현재의 군사적 패러다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일차적 목적은 이 섬을 점령하는 것이란 말이지?”

    스칼렛은 턱을 괸 채로 그렇게 말했다.

    “스칼렛 님께서 도와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만.”

    대충 비위를 맞추며 은근슬쩍 조력을 구하려 해봤다.

    “일단은 아일라드 녀석의 끄나풀을 도와줄 이유나 필요성은 못 느끼네.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로는…….”

    “초극 시험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나이를 너무 먹어서 노망이 난 흡혈귀들은 가끔 분수도 모르는 도전을 하는 법입니다.”

    뒤늦게 심부에 도착한 루칸다가 스칼렛의 말허리를 끊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칼렛은 루칸다를 흘깃 본 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초극 시험?”

    내가 되묻자 루칸다가 간결하게 설명했다.

    “한 마디로 신이 되려고 했던 겁니다. 살점과 혈액과 뼈, 그리고 정신을 제물로 바쳐 신이 되기 위한 시험에 도전하는 의식을 초극 시험이라고 합니다.”

    루칸다의 목소리에는 옅은 경멸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르시안의 실패로부터 무엇 하나 배우지 못한 가엾은 종족들이죠.”

    “필명종 주제에 아는 게 많구만.”

    스칼렛은 킬킬 웃는가 싶더니 루칸다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반쯤은 틀렸네. 내가 초극 시험에 도전했던 건 사실이지만,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 건 경솔하군.”

    “실패한 게 아니면? 혹시 성공했어?”

    “아닐세. 귀공도 결론을 내는 게 너무 성급하네.”

    “그럼?”

    “초극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까지는 사실일세. 하지만 도중에 귀찮아져서 이 섬까지 당도한 이후 잠에 들고 말았지.”

    단번에 이해했다.

    절로 이해가 된다.

    나도 그랬으니까! 시험 시간만 되면 잠이 쏟아지고, 다른 때보다 더 꿀잠을 잘 것 같고! 그런 느낌 아니겠나?

    “그러니까 귀공이 보고 있는 이 모습은 그저 내 껍데기에 불과하네. 육혈골령이 결손된 상태이니, 내게 도움을 구해도 곤란할 뿐이지.”

    스칼렛은 대수롭지 않은 옛이야기를 하듯 가벼운 어조로 떠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신이 되려 했던 그 시도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하물며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이라면 이미 신에 필적하는 능력을 지닌 흡혈귀였을 것이다. 그런 흡혈귀가 뭐가 아쉬워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이 되려 했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중요한 시험에서 단지 귀찮아졌다는 이유로 중도 포기했다고?’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얘기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직후.

    “하지만 흡혈귀로서의 종족적 특성은 아직 남아는 있으니.”

    스칼렛은 눈을 가늘게 뜨며 둥지를 둘러본 후 이어 말했다.

    “잠도 깬 겸 심심풀이 수준으로 귀공의 일을 거들어 줄 수는 있네. 물론 아일라드의 수족이 아닌, 헬베르카의 말예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말일세.”

    “우리는 늘 일손 부족이니까. 부분적 협력도 감지덕지야.”

    “귀찮지 않고 흥미로운 일이라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게.”

    “혼돈의 의지께 맹세코?”

    “밤의 어머니의 이름에 맹세코.”

    미리 말해두지만 혼돈의 의지나 밤의 어머니나 모두 테네브레를 칭하는 이명이다.

    스칼렛이 테네브레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 순간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765호 둥지에 챔피언 ‘스칼렛’이 추가되었습니다.]

    [챔피언 ‘스칼렛’은 고유능력 ‘패러사이트 블러드’를 통해 지정된 지역을 ‘오염’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챔피언 ‘스칼렛’의 영향으로 제1부대 ‘언더 케이지’의 전투력이 5% 상승합니다.]

    [챔피언 ‘스칼렛’의 영향으로 제2부대 ‘고블린 서비스’의 전투력이 5% 하락합니다.]

    [챔피언 ‘스칼렛’의 영향으로 모든 부대의 통제력이 10% 하락합니다.]

    그리고 루칸다가 추가되었을 때처럼 관계도가 갱신되었다.

    [스칼렛과 루칸다의 관계는 ‘경계’입니다.]

    [스칼렛과 햄토리의 관계는 ‘양호’입니다.]

    [스칼렛과 코틀러의 관계는 ‘보통’입니다.]

    루칸다 외엔 모두 양호한 관계성.

    그나저나 고블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무슨 이유 때문이지?

    “자, 그럼 나는 이 누추한 군세를 어떻게 다듬어봐야 할지 고심 좀 해봐야겠구만.”

    스칼렛은 루칸다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심부를 빠져 나갔고, 루칸다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찬 후 내게 말했다.

    “각하, 저는 흡혈귀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사로서의 긍지라고는 발톱만큼도 없는 놈들입니다.”

    루칸다도 거기까지 말한 후 할 일이 남아 있는지 심부에서 나가버렸다.

    “쮸, 쮸쮸!”

    “그래그래, 햄토리야. 나도 그 생각을 했어. 하렘물은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니까. 보통 그런 상황이면 히로인들끼리 머리끄덩이 붙잡고 나뒹굴어야 정상이지.”

    남아 있던 햄토리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고블린킹 파르카의 토벌을 준비해야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