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27화 (2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7화

    밑작업(2)

    동족포식의 원리는 간단하다.

    이긴 놈이 전부 갖는다.

    패배한 놈은?

    당연히 모든 걸 잃는 것이다. 목숨까지 말이다.

    2차 진화를 끝마친 후 다시 혈루목이 위치해 있던 심부로 돌아왔다.

    이 둥지의 관리자였던 워포레이의 시체가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고, 루칸다가 혈루목의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손에 넣은 보수는 이 냄새나는 나무 한 그루뿐인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나타나자 루칸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조잡하긴 하지만 제대로 수액을 생산해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나쁘지 않군요.”

    “우리가 혈루목의 수액을 사용하는 시설이 있던가?”

    “현재까진 없습니다. 하지만 가공 시설을 따로 차린다면 혈루목의 수액으로 ‘레드문 포션’을 생산 가능합니다.”

    “레드문?”

    “일종의 도핑 포션입니다.”

    “아! 여기 고블린 놈들이 칼로 쑤셔도 안 죽던데, 그게 레드문 포션인가?”

    거의 좀비 고블린급으로 끔찍했다.

    다행히 불완전한 상태였기에 햇빛에 취약하였고, 구체적인 명령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상대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버프 효과입니다. 혈루목의 수액을 원액 그대로 마신 것과 달리 부작용도 적고, 효과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진 않습니다만.”

    레드문 포션을 생산하여 병력들에게 지참하게 한다면 꽤나 유용하다고 한다. 오늘 721호 둥지에서 봤던 그 좀비 같은 고블린들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민첩성, 자연 회복속도, 광란에 의한 진통 작용.’

    지속 시간은 10분.

    연속으로 도핑을 계속하면 체력이 심하게 떨어지지만, 한 번 정도라면 체력의 1/10 정도를 소비한다고 한다.

    “뭐, 테네브레의 눈물은 우리가 더 만들 이유는 없지. 레드문 생산 시설을 여기다 차리도록 하지.”

    그리고 워포레이가 죽기 직전 생산해낸 테네브레의 눈물이 남아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크에 담긴 무색무취의 액체.

    플라스크를 잠시 바라본 뒤 시선을 돌렸다.

    혈루목의 맞은편.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면이 철창으로 둘러진 공간이 있었고, 그 안쪽에는…….

    “설마 이게 흡혈귀야?”

    “정확히 말하자면 가사 상태의 흡혈귀입니다.”

    “무슨 미라 같은데.”

    바짝 마른 장작처럼 생긴 시체였다.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땅 밑에 묻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기묘하게도 몸에 두르고 있는 새하얀 드레스는 새것처럼 깔끔했다.

    “워포레이 녀석은 이 흡혈귀를 핵심으로 테크트리를 짠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혈루목과 테네브레의 눈물 생산 시설이 말이 되지 않는다. 초반의 작업 인력과 병력을 최소화한 후 모든 코스트를 혈루목과 테네브레의 눈물 생산 시설에 투자한 것이다.

    “루칸다. 네가 보기엔 저 흡혈귀한테 테네브레의 눈물을 써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냐? 이거 한 방울이면 언더 케이지 부대의 장비를 새것으로 싹 교체해줄 수 있다는데.”

    “글쎄요. 저도 흡혈귀에 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저 상태만 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도 추론하기 힘들군요.”

    “여자겠지?”

    “여장 취향을 가진 흡혈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철창 쪽으로 다가가 흡혈귀를 살펴봤다.

    “장신구가 없군요. 가문이나 혈맥을 증명할 만한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고 있으니, 아마도 유배자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정보는?”

    “체구가 작습니다. 인간으로 치자면 10살 남짓한 수준일 겁니다.”

    “살짝 대박의 예감이 들지 않냐, 루칸다?”

    “저도 잠깐 그 생각을 했습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린 소녀나 소년의 형태를 하고 있는 흡혈귀는 상당한 고위급일 가능성이 있었다.

    흡혈귀의 주식은 인간의 피.

    대다수의 흡혈귀들은 인간을 매료시키기 가장 적합한 신체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여성 흡혈귀라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정도의 체형으로 둔갑한다. 그 편이 인간 남자를 유혹해서 피를 빨기 편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견이라면?

    “스스로 흡혈 행위를 하지 않아도 존속이 가능한 상위종.”

    “그게 아니라면 쇠약하여 최대한 부피를 줄이는 식으로 변이한 걸지도 모릅니다.”

    확률은 둘 중 하나.

    플라스크에 담긴 테네브레의 눈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쓴 소설인데 이렇게도 정보가 부족해서야…….’

    참고로 아리카 섬을 거쳐 갔던 류시혁의 에피소드에선 흡혈귀와 조우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녀석이 이 섬에 올 때까지 흡혈귀가 깨어나지 못했거나, 조용히 이 땅굴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젠장, 머리통 굴리기도 귀찮네. 일단 깨운 뒤에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병력의 바리에이션을 늘리는 쪽으로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판단입니다, 누자베스 각하.”

    가사 상태의 흡혈귀를 깨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테네브레의 눈물을 입술 사이로 흘려 넣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깨웠다간 오히려 흡혈귀한테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반드시 자신의 혈액에 테네브레의 눈물을 섞어 마시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피의 유대 상태로 만든 뒤에 각성시키면 이쪽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팔꿈치의 안쪽을 베어 피를 와인잔에 흘린 뒤, 그 와인잔에 테네브레의 눈물을 섞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

    철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흡혈귀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발 상위종이길 기도해라, 얘들아. 이 비싼 거 마시게 하는데 잡종 같은 거면 실망할 거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와인잔을 기울여 흡혈귀의 입술 사이로 혈액을 흘려 넣었다.

    * * *

    “721호 둥지가?”

    레오란드는 뒤늦게 보고를 받고는 바로 수정창에 흐르고 있는 문자열을 확인했다.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 경미한 손실로 완전 제압. 721호 둥지의 관리자 워포레이 침묵.”

    그 기록을 읽은 후 레오란드는 아리카 섬의 파워 밸런스가 급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하이브 마인드 간의 동족포식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포식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게 일반적이다.

    721호 둥지의 관리자는 765호 둥지보다 먼저 자아를 각성한 개체다. 그런데 자신보다 늦게 각성한 하이브 마인드에게 역으로 당하다니?

    ‘이렇게 빨리 동족포식을 시작할 줄이야…….’

    상당히 빠른 진행 속도다.

    게다가 자신보다 먼저 각성한 개체의 둥지를 노렸다.

    도저히 일반적인 하이브 마인드의 판단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레오란드 님.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가 2차 진화를 끝마쳤습니다.”

    그의 집무실에 찾아와 있던 보랏빛 피부의 마족 여성이 추가 보고를 했다.

    “산란장 시설까지 갖추게 되겠군요.”

    레오란드는 바로 765호 둥지의 발전 상황을 유추해냈다.

    “현재 부화장이 두 곳. 혈루목, 가사 상태의 흡혈귀를 손에 넣었고, 거기다 산란장까지 갖추다니 이제 아비엥 외엔 북서부에서 감히 동족포식을 노릴 둥지는 없겠군요.”

    누자베스는 너무나 운이 좋은 개체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핵심 시설을 손에 넣고 있었다.

    산란장으로 대규모 병력을 생산해내고, 혈루목을 이용해 ‘레드문 포션’을 생산해낸다면 일대를 휩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카타쿨라의 콧수염까지 건드리게 될 테고 말이다.

    “아, 아니 그게…… 초월 의지 진화를 선택하였습니다.”

    “초월 의지라구요?”

    레오란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북동부를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는 테크트리가 뻔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탐욕이 아닌 초월 의지를 택했다?

    “이제는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레오란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765호 둥지의 관리자 누자베스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까지 생길 정도였다.

    분명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이다.

    하이브 마인드가 고작 스킬 두 개를 더 얻어봤자 둥지의 전투력이 얼마나 상승하겠나? 그럴 바엔 산란장을 빠르게 확보해서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레오란드의 예상을 벗어나는 선택을 반복해 왔다.

    그리고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누자베스가 또 어떤 식으로 자신을 놀라게 할지 기대해볼 만했다.

    * * *

    와인잔을 비우자 이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고목 같던 피부가 점점 부풀어 오르나 싶더니 매끈하게 변했다.

    지푸라기 같았던 머리카락도 점점 윤기를 되찾았고, 이내 비단결처럼 매끈한 검은 생머리가 되었다.

    여기서 피부에 혈색까지 돌면 완벽한 인간 소녀였겠지만,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는 여전했다.

    “…….”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그런 심경이다.

    100만 원 정도를 고스란히 꼬라박아 100연 가챠(Gacha)를 돌린 심경이란 말이다.

    과연 그 결과는!?

    뭐 그런 국면이다.

    “후우…….”

    말했다!

    아니, 말했다기보다는 깊은 날숨을 토해낸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살아난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흡혈귀는 길게 숨을 토해낸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은 전체적으로 새까맣게 옻칠을 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에 가늘게 새겨진 동공은 맹금류와 비슷했다.

    창백한 피부 덕분에 그 섬뜩한 눈초리가 더욱 돋보였다.

    “맛없군.”

    “어?”

    “남들 못지않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이렇게 맛없는 테네브레의 눈물은 이게 처음일세.”

    흡혈귀는 긴 혀를 입 밖으로 내밀고는 하얀 드레스 소매로 비비기 시작했다. 새하얀 소매에 검붉은 핏자국이 번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지를 찢은 뒤에 척추를 뽑아 죽이고 싶을 만큼 맛이 없네.”

    눈을 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런 흉흉한 말이라니. 게다가 지금 마시게 한 테네브레의 눈물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나한테 따져도 억울하다.

    “그런 것치곤 얌전한데. 역시 피의 유대는 거스를 수 없는 건가?”

    흡혈귀는 피의 유대를 맺게 되면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얌전한 것도…….

    “귀공은 고작 한 번 피의 유대를 맺은 걸로 나를 복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겐가? 우습기 그지없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소매에 묻은 피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기 시작했다.

    “내가 귀공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일세.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진미이기 때문이지.”

    “그 말은 즉…… 다른 녀석이었다면?”

    “이미 죽었네. 내 단잠을 깨운 것도 모자라 그런 조잡한 테네브레의 눈물까지 마시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겠나?”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내 혈액이 흡혈귀님의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척추 뽑힐 뻔했다.

    ‘뭐야 척추, 제 ×발 돌려줘요.’ 라는 멘트를 칠 뻔했단 말이다.

    “……기왕 잠에서 깼으니 이쪽 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거절하겠네.”

    “그, 그러면 이름이라도…….”

    “귀공에게 진명을 가르쳐 줄 이유도 없지. 스칼렛이라 부르게.”

    “좋아, 스칼렛. 그러면 직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아? 브람스에 비하면 어느 정도인지 라던가.”

    “브람스? 감히 프로릴의 플리스커스 정도와 나를 비교하려는 건가?”

    틀리다.

    브람스는 프로릴의 군주 직위를 지닌 흡혈귀다.

    그는 자타공인 불사의 왕 아닌가?

    스칼렛과 내가 지닌 정보의 차이가 생겨났다.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혹은 마음을 읽은 것인지 스칼렛은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그 꼬맹이가 이제는 프로릴의 가장 강력한 혈맥이 된 것인가?”

    스칼렛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밤의 어머니께서 혈족과 가축들에게 최초의 밤을 선물하기 이전에 태어난 존재. 이러면 이해하겠나, 헬베르카의 말예여.”

    혈족과 가축.

    저런 말을 쓰는 흡혈귀는 드물다.

    특정 혈족이 아닌 이상은 ‘혈족과 가축’이란 표현은 사어에 가깝다. 그러니까 아주 드물게 오래된 흡혈귀들만이 ‘모든 것’을 ‘혈족과 가축’이라 부른다.

    ‘최초의 밤 이전이라면…….’

    반 르낙시아.

    밤이 오기 전에 태어난 마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잠깐, 반 르낙시아라면…… 상속 신분이잖아!’

    고혈종.

    직계는 아니겠지만 브람스의 대모뻘 되는 흡혈귀가 눈앞에서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