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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25화 (25/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25화

동족포식(4)

콰직!

숏소드가 고블린을 향해 매섭게 내리 찍혔다.

틀림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늑골을 부수고, 장기를 찢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는 치명상이다.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캬르르륵!”

721호 둥지의 고블린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손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이 렛맨의 머리를 쪼개기 직전!

터엉!

햄토리가 측면에서 뛰어들어 방패로 고블린의 몸뚱이를 쳐냈다. 가까스로 살아난 렛맨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햄토리 : 쮸쮸!]

[누자베스 : 형아도 눈알 달렸다, 햄토리야. 나도 보고 있어.]

끔찍한 광경이었다.

100마리가 넘는 내 군세를 30여 마리의 고블린이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머릿수부터 병력의 질까지.

모든 요소에서 내 쪽이 우세했지만, 방금 전부터 전투는 고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히려 721호 둥지의 고블린 놈들이 한 마리도 쓰러지지 않은 것에 비해, 이쪽은 렛맨 한 마리와 고블린 사수 한 마리가 당했다.

‘단순히 맷집이 좋은 건 아니지.’

가슴이 꿰뚫리고, 목의 절반을 찢어내도 움직이는 고블린들이다. 게다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방패 돌진이라던가, 일제 사격을 통한 심적 저지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조금만 불리할 것 같으면 꽁무니 빼고 도망치는 게 고블린 놈들의 종특 아니었나?

‘외종의 유대 상태? 빈큐럼에 당한 구울의 특징과 비슷한데.’

서둘러 흡혈귀 관련 설정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721호 둥지의 관리자가 이미 흡혈귀를 완성했고, 그 흡혈귀가 외종에게 불사성을 부여하고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흡혈귀가 흡혈귀 외의 종족과 유대를 맺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하물며 하급 종족을 한없이 경멸하는 흡혈귀의 특징을 떠올려 보자면 더욱 부자연스럽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고블린과 피의 유대를 맺는 흡혈귀라. 확실히 개연성이 없다.

‘남은 가능성은…….’

혈루목의 수액을 고블린에게 마시게 한 것이다.

혈루목 역시 엄밀히 따지면 흡혈귀의 일종. 그 수액을 마신다는 건 ‘빈큐럼’ 행위와 유사성을 지닌다.

어느 정도의 불사성을 얻을 것이고, 혈루목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누자베스 : 혈루목의 빈큐럼으로 얻은 불사성이라면 상대하기 어려울 것도 없지.]

가설을 검증해볼 차례였다.

[누자베스 : 햄토리, 지금부터 둥지 바깥으로 퇴각한다.]

* * *

“젠장! 젠장! 이제, 이제 조금만 더. 이제 곧인데!”

워포레이는 지리멸렬한 혼잣말을 내뱉으며 혈루목의 수액을 끓이고 있는 가마 앞으로 다가갔다.

가마의 위쪽에 설치된 여과기를 통해 고이기 시작한 물방울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직 완성은 아니지만, 이제는 품질을 가릴 때가 아니지.’

불완전한 상태인 ‘테네브레의 눈물’이다.

이제 반나절 정도면 완성될 예정이었다.

아무런 문제도, 차질도 없이 흡혈귀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근접해 있던 둥지의 하이브 마인드가 쳐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워포레이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여과기에 설치되어 있던 플라스크를 거둬들였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곱게 죽이진 않겠다.’

흡혈귀만 복속시킨다면 이 섬에서 워포레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본도와 달리 아리카 섬은 고만고만한 군소세력이 치고 박고 싸우는 동네 아닌가? 그나마 덩치가 있는 세력인 군주 갈라우드와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는 소강상태이니 말이다.

그리고 워포레이의 둥지를 쳐들어온 하이브 마인드 역시 그런 고만고만한 군소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불완전한 각성이라고 할지라도 흡혈귀에 대항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딸칵.

워포레이는 플라스크를 들고 서둘러 가사 상태의 흡혈귀가 놓인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혈루목의 수액을 마시게 하여 광폭화시킨 고블린들이 시간을 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한 병력으로 얼마나 더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본관은 이렇게 끝날 수 없다.’

워포레이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자신은 이런 촌구석에서 끝날 존재가 아니었다.

워포레이가 철창 앞으로 다가가려던 찰나.

따각.

경쾌한 구두굽 소리가 바로 정면에서 울렸다.

마치 워포레이와 흡혈귀의 사이를 가로막듯 말이다.

“타임 오버입니다. 유감이군요.”

“이, 이…….”

워포레이의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

그 검은 그림자는 장막을 벗어 던지듯 망토를 걷었고, 그 안에서 루칸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쟁 군주여,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길 바랍니다. 누군가 이 추악한 짓거리를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낱 고블린 주제에……! 캬악!!”

서걱!

루칸다의 곡검이 워포레이의 팔을 잘라냈다.

몸뚱이에서 솟아나 있던 수십여 개의 팔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통증에 워포레이는 바닥을 뒹굴었다.

“으갸아아악! 거래를, 거래를 제안한다! 모, 목숨만 살려준다면 흡혈귀와 혈루목 전부를 넘기겠다!”

워포레이가 재빨리 거래를 제안했지만, 루칸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둥지의 심부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전쟁 군주여. 그 거래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과 동시에 루칸다의 뒤편에서 그림자가 몇 개가 더 드러났다. 고블린 살수로 구성된 부대 ‘비르겐슈타인’이었다.

“흡혈귀도, 혈루목도, 이 둥지의 모든 재화도. 하물며 귀관의 목숨까지. 모두 누자베스 각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둥지의 심부까지 침입을 허용한 순간.

워포레이에겐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칩은 더 이상 없었다.

“둥지 합병에 협조적이라면 누자베스 각하께서 귀관의 목숨 정도는 살려주실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저 끔찍한 시설의 관리자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겠죠.”

루칸다는 혈루목과 그 근처의 시체를 훑어보며 혀를 찼다.

그러는 와중에 워포레이는 루칸다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흑요석 검을 발견하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

루칸다 역시 워포레이의 그런 이상을 눈치채고, 그를 내려다봤다.

“네, 네놈을 보…… 본, 적이 있군…… 프로릴에서 말이야…….”

루칸다는 워포레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제7왕녀의 병단에서 유격대를 이끌고 있지 않았나? 브람스의 근위돌격대를 일개 중대 규모의 병력으로 퇴각시켰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아, 이제야 이름이 기억나는군…… 그 흑요석 검! 흑요석 검을 지니고 있는 고블린!”

“…….”

“하……! 이제야 알겠군, 이 동포의 배신자 놈! 이번엔 또 무슨 흉계를…… 컥!”

촤악!

루칸다의 검이 워포레이의 몸뚱이를 가로질렀다.

절단면이 깨끗하게 보일 정도의 참격!

워포레이는 순간 단말마를 내지르며 지면에 축 늘어졌다.

루칸다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직후.

[누자베스 : 한창 재밌었는데 거기서 끊냐.]

누자베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워포레이가 내뱉었던 말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다.

[루칸다 : 721호 둥지의 관리자를 처리했습니다, 각하.]

[누자베스 : 그건 봐서 알고 있고. 본도에서 꽤나 활약했던 모양인데 그 에피소드는 아직 미공개야?]

[루칸다 : 죽기 직전에 정신 나간 하이브 마인드가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아리카 섬 태생의 하이브 마인드가 본도에서 일어난 일을 어찌 알고 있겠습니까?]

[누자베스 : 아아, 생각해보니 그렇네.]

[루칸다 : 내부 분열을 노리고 분란이 될만한 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이겠죠.]

루칸다가 그렇게 일축한 후, 뒤이어 물었다.

[루칸다 : 둥지의 병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교전중이라면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누자베스 : 모조리 불태워서 스텔라 님의 곁으로 보내드렸지.]

누자베스가 취한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721호 둥지의 고블린들은 혈루목의 수액으로 불완전한 불사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의 결점도 얻게 되었다.

첫 번째는 흡혈귀를 이용한 ‘빈큐럼’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명령이 불가능해졌다는 점. 그저 혈루목을 지키기 위해 침입자를 향해 달려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흡혈귀의 약점 역시 고스란히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누자베스는 이 두 가지 약점에 착안해서 너무나 당연한 판단을 했을 뿐이다.

동굴 밖으로 퇴각했고, 동굴 밖으로 뛰어나오게 된 고블린들이 모조리 햇빛에 불타는 동안 숨통을 끊은 것이다.

햇빛 아래에선 불사성의 특성도 약해지니 쓰레기를 주워 담듯 쉬운 작업이었다.

[누자베스 : 그럼, 이번 사냥의 결과나 집계해 볼까?]

[루칸다 : 정리해 놓겠습니다.]

첫 번째 둥지 점령은 무난하게 정리되었다.

* * *

최종 점검이다.

이번 전투를 무사히 끝마친 후, 제1부대 언더 케이지의 부대원들 평균 레벨은 20에 도달해 있었다.

제2부대 고블린 서비스의 경우 16~18에 달했고 말이다.

아주 약간의 병력 손실이 있었지만 그건 부화장을 통해 금방 보충할 수 있었다. 이제는 병력을 생산하기 위한 시체나 마나석의 양은 충분한 정도다.

문제는 대규모 병력을 운영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운영 및 유지비가 든다는 것이다. 현재 100마리 남짓한 규모로 운영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유지비로 둥지가 파산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슬슬 양보다 질을 신경 써야 할 때가 온 거겠지.’

소수의 정예 병력.

적은 유지비와 높은 기대 효율!

이 쥐꼬리만한 섬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덩치를 너무 키우는 것도 곤란했다.

그리고 내 스테이터스도 꽤나 올라가 있었다.

특히 721호 둥지의 관리자인 워포레이를 처치하고 둥지를 차지한 순간 깜짝 놀랄 만큼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름 : 누자베스]

[레벨 : 24]

[클래스 : 하이브 마인드]

<스테이터스>

[근력 : 15]

[민첩 : 15]

[체력 : 13]

[마력 : 53]

[지배력 : 60]

‘오 꽤 많이 올렸네.’

눈에 띌 만큼 크게 성장한 자신의 능력치를 보던 중, 뭔가 한 번 경험해 본 듯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진화 진행도가 100%가 되었습니다.]

[2차 진화가 곧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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