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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21화 (2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1화

    루칸다(3)

    “이거 놀랍군……. 이렇게나 빨리 의뢰를 끝마치고 올 줄이야…….”

    랄프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모험가가 된 17급의 소년이 하룻밤 사이에 고블린 부락 다섯 곳을 피곤죽으로 만들고 돌아온 것이다.

    그 증거로 랄프의 눈앞에는 고블린 주술사의 머리가 다섯 개나 놓여 있었고 말이다.

    이런 걸로 놀라지 않으면 뭘로 놀라겠나?

    늘상 파란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코 큰 늙은이가 사실은 감금당하고 있었다던가?

    그게 아니면 악수를 나눴던 주유소 직원이 사실은…… 아니, 이런 반전에 관한 얘기는 됐다.

    어쨌거나 랄프는 진심으로 놀란 기색이었다.

    미심쩍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하룻밤 사이에 고블린 부락 다섯 곳을 초토화시키고 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아니 무슨 요술을 부린 건가?”

    “원래 모험가 놈들은 기괴한 재주 하나씩은 지니고 다니는 법이죠.”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크하핫! 그렇긴 하지!”

    랄프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쪽을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입만 살아서 떠벌릴 줄만 아는 모험가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내가 큰 착각을 했구만. 자네는 다른 모험가들과 다르군. 그 거만한 말투나 눈빛도 지금 다시 보면 오히려 겸손할 정도야.”

    “기본적으로는 겸손한 편입니다.”

    “하핫!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말해봤자 농담으로밖에 안 들리네! 아차, 여기서 이렇게 얘기할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게.”

    랄프의 집으로 들어가자, 갖가지 향신료와 무두질을 끝마친 뒤의 기름 냄새가 뒤섞인 실내가 드러났다.

    “거기 잠시 앉아 있게.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 차를 내오겠네.”

    잠시 뒤 랄프가 나무잔에 담긴 차를 내놓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은 고블린킹 파르카의 퇴치 의뢰는 자네를 믿고 맡기겠네.”

    드디어 의뢰 수주가 가능하게 됐다!

    8천 벨에 달하는 거금과 당첨이 확정된 복권인 ‘봉인 스크롤’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고블린킹 파르카의 퇴치 의뢰에 어째서 높은 모험가 등급을 요구했는지 알고 있나?”

    랄프는 가져온 차를 어서 마셔보라는 듯 손짓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무잔에 담긴 차를 살짝 입술에 갖다 대자, 쌉싸름한 풀향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고블린킹이라고 불리는 만큼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죠.”

    “그래, 그런 이유도 있었지.”

    고블린킹 파르카는 내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몬스터다. 분명 류시혁이 이 아리카 섬에서 한동안 채류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 녀석의 타깃은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였으니까.’

    고블린킹 같은 잡몹을 일일이 신경 썼을 리 없다. 애초에 비탄의 숲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카타쿨라의 영역이 주된 무대였다.

    어쨌거나 고블린킹 파르카가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 강하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다.

    ‘오늘 만난 그 고블린 녀석도 규격 외였으니까.’

    루칸다라고 했던가?

    페이드레트의 루칸다.

    ‘페이드레트.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고유명사인데.’

    내가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내가 쓴 설정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작자 본인과 작품의 열성적인 팬. 둘을 놓고 비교하자면, 작품의 열성적인 팬 쪽이 더 작품 설정에 대해 이해도가 높다고 본다.

    설정이란 건 기획하고 의도해서 쓰는 것도 있지만, 원고 마감에 쫓겨 되는대로 척수 반사로 두들긴 것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마감에 쫓기다 보면 1/2이라던가 1/5이라던가 그런 것도 틀려서 욕도 좀 먹고 그런 거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닐세.”

    “다른 이유도 있다는 말인가요?”

    랄프는 차를 홀짝 마신 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탄의 숲에서 모험가를 노리는 도적 무리가 있는 것 같네.”

    “도적이라…….”

    “아무래도 고블린 같은 것보다는 모험가를 사냥하는 편이 돈이 더 되니 말일세. 참, 말세야. 마물에 맞서 싸우기에도 인력이 부족한 판인데.”

    “곤란하군요.”

    진심으로 곤란하다.

    비탄의 숲에 다른 인간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얘긴 금시초문이다. 진짜 마주쳤다간 큰일 날 뻔했다.

    ‘망할, 내 정체가 들통 날 뻔했잖아.’

    오늘부터 비탄의 숲에 고블린들을 풀어 정찰을 돌려야겠다. 도적놈들이 혹시라도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진짜 곤란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말이다.

    ‘모험가를 털던 놈들이니까 주머니 좀 두둑하려나?’

    고블린킹 파르카 퇴치 의뢰 외에도 푼돈 좀 더 챙길 기회이기도 했다.

    “실력이야 충분히 입증했네만, 혹여 모르니 길드에서 다른 동료들을 모아 의뢰에 임해도 상관없네.”

    “실력이 출중하고 믿음직한 동료 말이죠.”

    “그래, 혼자 활동하는 것보단 둘이 든든한 법이니까.”

    동료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이번 퇴치 의뢰를 함께할 조력자는 하나 구해놓은 참이었다.

    “마침 쓸만한 동료를 한 사람 구해 놨으니 걱정 없습니다.”

    * * *

    “쮸우! 쮸쮸! 쮸우, 쮸쮸! 쮸-!!”

    “형아 고막 터진다. 그만 해라 쥐새끼야.”

    “쮸!!”

    루칸다가 둥지를 찾아온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정확하게 찾아와 줬다.

    그리고 루칸다가 둥지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햄토리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고하신 전쟁 군주를 뵙습니다.”

    루칸다는 두 마리의 고블린과 함께 찾아왔다.

    오늘 아침 나를 기습했던 놈들이다. 부상이 채 낫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붕대를 감은 것이 보였다.

    “쮸, 쮸쮸!”

    햄토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당장 칼을 뽑아 달려들 기세였다.

    루칸다는 그런 햄토리와는 대조적일 정도로 여유로운 얼굴로 빙긋 웃어 보였다.

    “결투 신청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만. 렛맨 전사여, 주군의 의지보다 사심이 앞선다는 건 한 부대의 장으로서 자질이 의심되는군.”

    “쮸우으으으-!”

    스릉!

    햄토리가 검을 뽑으며 달려들려던 찰나, 나는 뒤에서 머리털을 붙잡았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루칸다. 우리 애를 너무 도발하는 것도 좋게 봐줄 수 없는데.”

    “죄송합니다, 누자베스 각하.”

    “햄토리. 한 판 벌이고 싶은 건 이해하겠는데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지 않냐?”

    “쮸, 쮸쮸! 쮸…….”

    “그래그래, 고르곤졸라 치즈가 맛있지. 형아도 알아.”

    햄토리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준 후 루칸다와 대면하듯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제안은?”

    “각하께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루칸다는 숨기는 기색 없이 조건을 밝혔다.

    “촌장 하라부가 통치하고 있는 숲의 서쪽 고블린 부락에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딱 절반이야?”

    “예, 거의 절반입니다.”

    “숲의 동쪽은 파르카 쪽이고?”

    “그쪽의 부락은 저희도 관여치 않겠습니다. 오히려 각하께서 파르카의 세력을 줄여 주신다면 저희로서는 박수를 칠 일이죠.”

    “나머지 조건은?”

    턱을 괴며 계속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루칸다가 이어 말했다.

    “그것뿐입니다. 누자베스 각하의 목표가 파르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더 이상 각하의 목숨을 노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뭐, 확실히 무리한 요구 조건도 아니었다.

    비탄의 숲에 서식하고 있는 고블린 중 절반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앞으로는 하라부의 부락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루칸다를 달래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절반을 포기해야 한다라…….”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절반이나 포기하는 대신 그쪽은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고블린 부락은 돈이 된다. 그리고 고블린 주술사의 지팡이에 박힌 마력석 역시 병력 확장에 불가결하게 필요한 물건이다.

    사냥감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내가 루칸다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냥감의 절반을 잃게 된다.

    그 만큼의 보상이 없다면?

    협상은 결렬이다. 햄토리를 말릴 이유도 없어진다.

    루칸다는 내 쪽에서도 요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인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고블린 부대를 잠시 관찰했습니다.”

    내가 비탄의 숲 입구에 설치해 놓은 부화장에서 생산해낸 병력을 말하고 있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오합지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전쟁 군주의 군세를 모욕할 셈인가? 그 배짱은 인정하지만, 신중하지 못했군.”

    “렛맨 전사들로 구성된 부대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루칸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언더 케이지 부대와 달리 고블린 부대는 현장에서 급조해서 바로 투입한 고기 방패들이다.

    이후에 천천히 활용 방법을 모색할 작정이었단 말이다.

    “제게 권한을 위임해 주신다면 이 루칸다가 부대의 훈련과 야전 지휘를 맡겠습니다.”

    루칸다의 실력은 이미 입증되어 있었다.

    렛맨들의 수비를 순식간에 돌파해서 내 목을 노릴 정도였으니까.

    아마도 고블린 부대가 롤모델로 삼아야 될 놈은 루칸다겠지.

    “기한은?”

    “누자베스 각하와 저의 공통의 적을 처리할 때까지입니다.”

    고블린킹 파르카를 처치할 때까지 실력 있는 고블린 부대의 지휘자를 얻는 것이다.

    게다가 루칸다 자체의 전투력도 상당했으니까. 고블린킹 파르카 토벌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좋다, 일시적 협조군.”

    조건을 수락하자, 루칸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혼돈의 의지께 맹세코 누자베스 각하께 승리를 헌상하겠습니다.”

    [765호 둥지에 챔피언 ‘루칸다’가 추가되었습니다.]

    ‘어? 챔피언이었어?’

    엘리트 렛맨인 햄토리와 동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대단한 놈이었던 모양이다.

    일시적 협력이긴 하지만 드디어 내 둥지에도 챔피언이 생겼다.

    [챔피언은 하이브 마인드를 대신하여 다수의 부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챔피언 ‘루칸다’의 영향으로 제2부대 ‘고블린 서비스’의 전투력이 25% 상승합니다.]

    [챔피언 ‘루칸다’의 영향으로 제1부대 ‘언더 케이지’의 통제력이 10% 하락합니다.]

    동종 마물 챔피언의 합류로 고블린 부대의 전투력이 상승되었고, 그 반대로 렛맨으로 구성된 언더 케이지 부대의 반발심이 강해졌다.

    [765호 둥지의 관계도가 갱신되었습니다.]

    [루칸다와 햄토리의 관계는 ‘적대’입니다.]

    [루칸다와 코틀러의 관계는 ‘양호’입니다.]

    “쮸쮸!”

    햄토리는 내가 루칸다를 둥지의 챔피언으로 받아들인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뺨을 잔뜩 부풀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렛맨 전사.”

    “쮸!”

    짜악!

    루칸다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햄토리는 그 손을 쳐내고는 렛맨들이 모여 있는 막사로 돌아가 버렸다.

    루칸다는 손등을 매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각하의 목숨을 노렸던 것 때문에 미움을 받은 모양입니다.”

    “우리 애들이 나를 좀 많이 좋아하지.”

    큭큭 웃으며 가볍게 넘기는 듯 말했지만, 루칸다는 나를 대신할 야전 지휘자.

    햄토리는 제1부대 언더 케이지의 리더였고 말이다.

    그렇기에 둘의 불화를 방조해서는 안 되었다. 고블린킹 파르카는 불협화음을 내면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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