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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20화 (20/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20화

루칸다(2)

마지막 다섯 번째 부락도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이제 슬슬 고블린 놈들에게 동정심까지 생길 지경이다.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 손톱만큼도 동정하지 않았다.

“이야, 아주 속이 뻥 뚫리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하이브 마인드 짓거리도 계속하지.”

초토화된 고블린 부락을 돌아보는 동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무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부락 하나가 박살 나버렸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이 소재로 게임판타지 한 편 써야겠다. 히든 클래스로 하이브 마인드가 돼서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죄다 쓸어버리는 내용으로.”

현재 제1부대로 설정된 ‘언더 케이지’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공급되고 있는 ‘고블린 부대’의 전후 협공!

그 결과 30여 마리의 고블린이 모조리 토막 난 고기 덩어리가 됐다.

물론 개체의 전투력이나, 규모는 제1부대인 언더 케이지 쪽이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제2부대로 설정된 고블린 부대도 충분히 쓸 만했다.

언더 케이지 부대가 먼저 진입해서 주의를 끄는 동안 후방 기습 정도는 해낼 수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고블린 부락 정도 초토화시킨 걸로 만족하고 있어선 안 되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류시혁 그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가 이 섬을 찾아오기 전까지 4달 정도 남았다.

그 사이코패스만 잘 피해 다니면 되냐고 묻는다면, 반쯤은 그렇다. 류시혁보다 더한 미치광이인 백주월도 잘 피해 다녀야 되니까.

일단은 전투가 종료된 후 이번 전투의 수확을 점검했다.

먼저 내 레벨이 무려 2나 올랐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병력이 받는 경험치의 일부를 나눠 받고 있었으니까.

이걸로 레벨이 12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얻은 전리품의 대부분은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라 급한 대로 고블린들에게 장착시켰다.

‘수입은 대략 3천 벨 정도.’

이쪽의 피해?

경미한 정도다.

만에 하나 전투 중에 렛맨들이 잔뜩 죽었다면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까웠겠지만, 다행히도 전사자는 2마리에 그쳤다.

급히 편성해서 투입시킨 고블린 부대에서 상당한 피해가 나오긴 했지만, 애초에 고기 방패 대용으로 만든 녀석들이니 아까울 건 없었다. 죽으면 또 그대로 부화장에 넣어서 재활용도 가능하고 말이다.

“앞으로 병력 생산에 필요한 마나도 적지 않게 얻었고…….”

새로운 부화장 설치와 재료 수급처도 얻었다.

앞으로 길드에서 고블린 관련 토벌 의뢰가 나온다면 죄다 받아서 추가 수익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제 랄프에게 가서 퀘스트 완료 보고를 해야지.’

그 순간.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일순 흔들리는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잔당이 남아 있었나?”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손을 들었다.

“쮸쮸!”

“쮸!”

신호를 본 렛맨 두 마리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고블린? 아니, 고블린 전사라도 저런 기묘한 행동을 취하진 않는데.’

지금까지 사냥한 일반 고블린과 고블린 전사의 수준을 떠올려보자면 그렇다.

이쪽을 발견했다면 녀석들이 취할 행동은 딱 두 가지뿐이다. 자신들이 우세하다고 생각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 테고, 반대로 열세일 경우 도망치기 바쁠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은밀하게 이동하며 이쪽을 살피는 건?

‘고블린이 아니거나, 평범한 고블린이 아니겠지.’

어느 쪽일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타다닷!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는 다섯.

나무와 바위를 엄폐물 삼아 재빠르게 구역을 이동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왔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카앙!

간발의 차로 숏소드를 뽑아냈다. 그리고 날아든 칼날을 쳐내며, 재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쉭!

콰악!

방금 전까지 서있던 곳에 다른 녀석의 검이 날아와 꽂혔다!

“캬르륵!”

“햄토리!! 나 죽는다!”

“쮸!”

손목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내가 직접 고블린 전사와 싸워본 건 아니지만, 지금 나를 습격한 고블린 놈들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부락에서 해치운 고블린 전사들과는 격이 다른 놈들이다. 수는 다섯. 많지는 않지만 서로의 빈틈을 커버하며 치밀한 연계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이쪽을 직접 공격해 오니 마인드 모드를 사용하는 건 무리겠군.’

부스럭!

그 순간 수풀 속에서 짐승의 가죽을 망토처럼 두른 고블린이 한 마리 더 나타났다.

‘저 놈이 리더.’

리더처럼 보이는 고블린은 거리를 두고 여유롭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키르륵! 키륵!”

“키르륵!”

“제엔자앙!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러지 마라, 진짜. 너희들 실수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냐?”

“캬아아악!”

휘릭!

고블린 전사의 마체테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캉!

막아내고.

“캭!”

쉭!

퍼억!

측면에서 파고들어 찔러오는 녀석을 발로 차 밀쳐냈다. 하지만 녀석은 자세를 다잡더니, 다시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이건 나도 한 마리 이상은 상대 못하겠는데…….’

격하게 움직인 덕분에 벌써부터 몸에 무리가 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숨이 차고, 팔다리가 피로했다.

하이브 마인드라고 몸 쓰는 걸 게을리 한 결과다.

아니, 솔직히 이렇게 최전선에서 칼부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캬아악!”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뒤쫓아 온 다른 고블린 전사가 몸을 날렸다. 동시에 방금 전 쳐냈던 두 녀석도 지면을 박차며 거리를 좁혀왔다.

“징그러운 새끼들!”

쉬익!

몸을 숙여 횡단을 베는 칼날을 피해냈다.

“캬그악!”

가장 먼저 왼편에서 달려든 고블린 놈의 허벅지를 베어냈다. 역시나 데미지가 들어갔는지 바로 물러나려 했지만!

“쮸, 쮸우-!”

햄토리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다음. 오른쪽.

흐르는 검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궤도를 따라 힘껏 휘둘렀다.

서걱!

확실한 손맛이 전해졌다.

몸을 날린 고블린 놈의 복부를 정확하게 공중에서 베었다.

“하…… 망할, 힘들어 죽겠네.”

기습을 해온 놈들을 쳐내는 사이 언더 케이지 부대가 내 주변을 감싸듯 집결했다.

나는 검을 쥐고 있던 팔을 밑으로 떨구며 거칠어진 숨을 토해냈다.

역시 이런 야만적인 짓은 어울리지 않는다.

“햄토리,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이대로 퇴각한다.”

이런 규격 외의 고블린들을 상대하는 건 계획에 없었다. 죽자 살자 덤벼들어 모조리 죽일 필요도 없었다.

만약 죽여야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지휘자인 내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전투를 속행하는 건 합리적이지 못하다.

“캬르아!!”

저벅.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부상을 입은 녀석들이 기성을 흘리며 위협을 가했지만, 여전히 달려들 기색은 없어 보였다.

저벅.

다시 한 걸음.

좋아, 이대로 거리를 벌리고.

저벅.

한 걸음만 더 뒷걸음질을 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줄행랑을 친다.

부스럭.

‘위?’

집중되어 있던 신경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위를 올려다 본 순간, 검은 잔영이 나무 위에서 추락했다. 무슨 마법인지 허공에서 지그재그를 그리며 사선 방향으로 접근해 왔고.

그림자는 지면에 착지한 후.

타닷!

일말의 주저도, 지체도 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햄토…… 컥!”

터엉!

묵직한 피격감이 전신을 덮쳐왔다.

그 끔찍한 통증이 머리를 울렸다. 충격으로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 만큼 말이다.

균형도 못 잡을 만큼 의식이 엉망진창이었다. 지면을 구르다 가까스로 멈춰 주춤거리며 일어나려 하자.

처억.

목덜미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어느 샌가 내 뒤에 서서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허튼수작은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렛맨 전사여.”

“쮸우! 쮸쮸! 쮸!”

“주군의 목이 몸뚱이에서 떨어져 흙바닥을 나뒹구는 꼴을 기어코 보고 싶다면 덤벼 들어도 상관없다만.”

“쮸!!”

“햄토리, 햄토리! 가만히 있어, 자식아!”

햄토리는 이빨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나와 렛맨들 사이의 거리는 5미터.

그에 비해 내 뒤를 잡은 고블린은 등에 바짝 붙어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뭐야, 말할 줄 아네?”

말하는 고블린이다!

“공용어를 할 줄 아는 고블린은 확실히 드물긴 하죠.”

내 뒤를 잡은 고블린은 끌끌 웃으며 내 말에 대꾸까지 해줬다.

“그럼 이 흉흉한 것부터 치우고 대화로 해결하면 안 될까?“

솔직히 말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지금까지 고블린 부락을 초토화시키며 모조리 몰살시킨 장본인이 대화로 해결하자고 해봤자 그게 먹히겠는가?

그래도 이대로 어처구니없이 고블린에게 목이 베여 죽는 것보단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나았다.

“파르카가 보냈냐?”

“…….”

내 뒤에 바짝 붙은 고블린은 입을 다문 채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냄새나는 고블린 주제에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각하께선 하이브 마인드치곤 경솔했습니다.”

“그으래? 그럼 경솔했던 대가를 치러야지. 시간 끌지 말고 끝내라. 오늘 여기서 내 목을 치지 않으면 다음에 목이 잘리는 건 파르카 그 녀석일 테니까.”

내가 상정해낼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미끼는 모두 던졌다.

이쪽을 습격한 고블린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던질 수 있는 모든 방향에 미끼를 뿌려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중에서 하나만 문다면, 내 활로가 열릴 것이다.

모두 꽝이라면? 여기서 목 떨구고 죽는 것일 테고.

“어째서 파르카를 노리시는 겁니까?”

내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고블린이 먼저 대답을 도출해냈다.

“우문이었군요. 하이브 마인드의 합리성에 부적절한 대상은 배제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고블린은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 군주이시여. 온전한 공멸과 불완전한 공존. 어느 쪽이 합리적이라 생각하십니까?”

“종용당한 선택에 합리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명답이십니다.”

고블린은 끌끌 웃으며 내 목에 닿았던 검을 치웠다.

그리고는 내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페이드레트의 루칸다입니다. 혼돈의 의지를 지상에서 대행하시는 자이자, 존엄하신 전쟁 군주께 불완전한 공존의 길을 제안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마지막에 던진 미끼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파르카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세력이 있었군.’

그렇다면 저 루칸다라는 고블린과 나의 이해관계에 공통분모가 생긴다.

“얘기는 들어보지.”

쓰라린 목덜미를 한번 훑어본 후 대답했다.

이건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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