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9화 (1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9화

    루칸다(1)

    첫 번째 고블린 부락의 제압이 끝난 후.

    슬슬 산길을 걸어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도착했다.

    “쮸우, 쮸쮸!”

    전리품을 모아 놓은 곳에서 쉬고 있던 햄토리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왔다.

    햄토리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전리품이 쌓인 쪽을 바라봤다.

    “그래그래, 잘했다. 우리 햄토리 없으면 내가 이 짓거리 일찍이 때려치웠지.”

    용맹한 선봉장이 있다는 건 꽤나 듬직하고, 편리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 전투마다 내가 직접 전장에 나서야 했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번 전투로 언더 케이지 부대의 렛맨들이 1레벨씩 상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부락 토벌에 따른 전리품! 그리고 돈이다!

    ‘이번 부락에서 챙긴 돈은 820벨. 고블린 놈들이 어디서 이렇게 돈을 모아놨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쏠쏠하네.’

    그것뿐만이 아니다.

    고블린들의 시체를 갈무리해서 얻어낸 박도나 도끼 같은 것들도 있었고, 어느 정도의 식량도 챙겼다.

    “말이 좋아서 보급식이지, 그 딱딱하게 굳은 빵을 돈 주고 팔아먹는 거잖아?”

    “쮸!”

    “어쨌거나 에르바키나 연맹 그놈들이 가장 적폐야. 군인공제회 같은 놈들이야 아주.”

    “쮸쮸!”

    전리품들을 모조리 매각하면 많지는 않겠지만 추가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전리품 더미를 둘러보던 중.

    ‘이 자식 이거 왜 이렇게 자꾸 뒷걸음질을 쳐?’

    햄토리의 거동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뭐야, 뭘 뒤에 숨긴 거야?”

    “쮸……! 쮸쮸! 쮸!!”

    “아니긴 뭐가 아냐? 손에 든 거 내놔.”

    “쮸…….”

    햄토리가 손에 쥐고 있던 건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이노무 쥐새끼가 감히 전리품을 슬쩍해?”

    “쮸우우…….”

    “다음에 또 전리품 훔치다 걸리면 16배 계왕권 맛을 보게 된다. 기억해 둬라.”

    두루마리를 받아 정보를 확인했다.

    [파이어볼 스크롤]

    [마력이 담긴 스크롤. 파이어볼의 주문 술식이 적혀 있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사용할 수 있다.]

    [남은 횟수 : 3회]

    ‘스킬 스크롤.’

    이건 꽤나 도움이 되는 전리품이다.

    비록 상당히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현재 근접전 위주의 부대만을 운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원거리, 그것도 물리적 공격이 아닌 마법 공격이다.

    이후 변칙적인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자, 그럼 마나석이 박힌 지팡이도 얻었고. 고블린 주술사 목을 미리 쳐놔라. 모아놨다가 아침에 랄프한테 가져다 줘야 되니까.”

    “쮸쮸!”

    햄토리는 스킬 스크롤을 빼앗긴 것 때문에 삐쳤는지 뺨을 잔뜩 부풀린 채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고블린의 부락이 위치해 있던 공터를 한 바퀴 천천히 돌며 주변 환경을 살폈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지만 이쪽은 상당히 넓은 공터로 이뤄져 있군.’

    이 정도 넓이면 전진 기지로 충분히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들 덕분에 멀리서 관측이 되기 힘들고, 이곳을 왕래하는 주민들도 없으니 말이다.

    ‘저 거대한 고목 밑에 괜찮은 크기의 구덩이가 있군. 시야 차폐도 괜찮겠어.’

    크기도 딱 알맞았다.

    잠깐 다시 마인드 모드로 돌아가서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 * *

    와르륵!

    고목 밑의 구덩이가 무너져 내리듯 뚫렸다.

    무너져 내린 흙더미들이 꿈틀거리기더니 그 밑에서 코볼트들이 기어 올라왔다.

    “키…… 코탈린 더는 일 못한다. 일 못한다. 잠을 자야한다.”

    온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코탈린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말했다.

    “우는소리 하지 마라, 코탈린. 한국에선 잠 못 자고 일하는 게 당연한 거다! 코리안 스타일! 오케이?”

    “키…… 코리안 스타일 불량! 한국 불량!”

    코탈린의 항의를 대충 귓등으로 흘리며 고목 밑의 구멍을 확인했다. 적당히 사선으로 파서 이동하기 어렵지 않은 형태였다.

    고블린 사냥에 나서기 전부터 코탈린에게 비탄의 숲 방향으로 채굴하라고 지시해 놨다. 그리고 오늘 정확한 위치를 마인드 모드로 다시 설정한 것이다.

    그 결과 이제 내 둥지는 두 곳의 구멍과 연결된 것이다.

    ‘굴덴 마을로 이어지는 하천의 하류 쪽. 그리고 비탄의 숲.’

    어쨌거나 폭이 2미터 남짓한 구덩이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고블린 주술사의 지팡이에 박혀 있던 마나석을 정제소에 넣었을 때였다.

    ‘정제된 마나가 511이나?’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당한 양이었다.

    부락 하나를 토벌하는데 소요되는 코스트에 비하자면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추가적인 부대 구성을 궁리해야 할 차례였다.

    애초에 고블린 부락 사냥에 나선 것도 부족한 마나석을 구해 병력을 늘리기 위해서였으니까.

    현재 마나 저장소에 저장된 마나의 양은 560정도.

    일반적인 렛맨만 생산한다면 56마리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마나였다.

    하지만 기왕 새로운 지역에 나섰는데 계속해서 지하 수도의 부화장만 가동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전리품 더미의 반대편에는 방금 전 사냥한 고블린 시체가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

    ‘앞으로 언더 케이지 부대는 지하 수도보다 비탄의 숲에서 고블린 부락 사냥을 할 계획이고.’

    이번 지역에서 최종 목적은 고블린킹 파르카까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빠르게 보충할 수 있는 부대를 새롭게 신설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바로 비탄의 숲과 연결된 구덩이 근처에 새로운 하급 부화장을 설치했다. 이전에 설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며 구멍이 생겨났다.

    [하급 부화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좋다. 이걸로 전진 스포닝풀…… 아니, 전진 부화장의 완성이다.

    “부락을 사냥할수록 고블린의 수가 늘어난다라. 고블린 놈들에겐 새벽의 저주가 따로 없겠군.”

    현장에서 재료를 수급해서 산지에서 바로 가공! 그리고 공급! 그리고 그 즉시 전장으로 투입! 함락되는 부락이 많아질수록 내 고블린 부대가 늘어난다.

    ‘조금 더 시간이 단축되겠어.’

    바로 고개를 들어 다른 부락의 불빛 쪽을 바라봤다.

    다음 희생양들은 저쪽이었다.

    * * *

    “루칸다아아아아!!”

    “루칸다! 루칸다!!”

    “종족 최고의 전사 루칸다아!”

    수백여 마리의 고블린 전사들이 목이 찢어지도록 기성을 내질렀다.

    장엄함을 넘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다면, 십중팔구 숨을 쉬는 것마저 잊게 될 것이다.

    모여든 고블린 전사들은 각자 자신의 무기를 치켜들며 ‘루칸다’라는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오거 슬레이어 루칸다!”

    “초월종!”

    “고블린의 몸으로 위업을 거머쥐는 자여!!”

    둥! 둥둥!!

    수많은 찬사와 찬미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와중.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에 맞춰 광란 상태에 빠져 있던 고블린 전사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보는 것처럼 둘로 쩍 갈라져, 길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소란스럽군.”

    그 길의 끝에 서있던 한 마리의 고블린.

    다른 고블린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체구였지만, 수 없이 많은 전투로 다져진 근육이 다부져 보였다.

    한쪽 눈을 낡은 거적으로 감싸 놓았고, 나머지 한쪽 눈은 섬뜩할 만큼의 예기가 감돌고 있었다.

    루칸다는 고블린 전사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와탈라’라는 고블린이 따라 나서며 웃음을 머금었다.

    “루칸다 형님의 인기가 여전한 겁니다.”

    “시답잖은 사냥질에 이 정도의 인기라.”

    루칸다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위대한 전사 루칸다. 그를 가까이에서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거품을 물며 실신하는 고블린도 적지 않았다.

    ‘전통을 등진 방랑자에게 이 정도의 환대라니. 이곳도 꽤나 아이러니해졌어.’

    선망과 동경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칸다는 담담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지위 유지에 급급한 추장이 체면까지 버려가며 나를 불렀다는 건…… 파르카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겠지.’

    루칸다가 다다른 곳은 거대한 제단이었다.

    그 제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는 앙상하게 마른 늙은 고블린이었다. 이 비탄의 숲 절반을 거느리고 있는 추장 ‘하라부’는 루칸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왔는가, 위대한 전사 루칸다여.”

    루칸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예를 다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털썩.

    루칸다가 추장 하라부와 대면하듯 마주 앉았다.

    “일몰 이후 순식간에 네 곳이 당했네.”

    “지금까지 신중했던 것치곤 상당히 대범하군요.”

    자신을 ‘고블린킹’이라 자처하며 나선 한 마리의 고블린이 있었다. 그 고블린의 이름은 ‘파르카’였다.

    본래 이 비탄의 숲은 추장 하라부가 군림하고 있던 지역. 하지만 근 3년 새에 파르카의 등장으로 세력이 둘로 나뉘게 되었다.

    “파르카가 경계를 넘어 부락을 습격하는 일은 드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몰 이후 네 곳이나 당할 정도라면.”

    전면전의 가능성.

    드디어 오늘밤 끝장을 볼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았다.

    하지만 추장 하라부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왕의 수족이 나타났네.”

    “설마…….”

    “그래, 하이브 마인드일세.”

    “그럴 리가! 카타쿨라가 비탄의 숲에 관여치 않겠다는 약조를 맺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카타쿨라 님의 군세가 아닐세. 숲의 남쪽에 새로이 터를 잡은 하이브 마인드가 나선 것이니.”

    게다가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의 약조라고 해봤자 기한이 제시되지 않은 가벼운 협조에 불과하다. 애초에 이곳에 사는 중립 마물들은 카타쿨라에게 있어서 어찌 되어도 좋은 미물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먼저 대화를…….”

    루칸다가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하라부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역시 거기까지 말하고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하이브 마인드가 둥지에서 나와 직접 전장에 나섰다.’

    이 말은 즉,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의미다.

    한 번 전투에 나선 하이브 마인드는 애매모한 결과를 남겨서는 안 된다. 무자비와 무관용. 그것이 불가능한 하이브 마인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미물들의 부탁 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루칸다 네게 부탁을 하고 싶구나.”

    “…….”

    루칸다는 추장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

    ‘하이브 마인드를 죽인다는 건 마왕에 대한 반역 행위. 대죄에 해당한다. 추장이 직접 나선다면 성패에 관계없이 이 부족의 미래는 없다.’

    하지만 부족의 외부인이라면?

    방랑자 루칸다는 사정이 다르다.

    거기까지 이해가 닿자 루칸다는 자신의 머지않은 운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고도 없는 먼 타지의 동포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루칸다는 잠시 모순투성이의 이상을 품고 있던 인간 소녀를 떠올렸고, 자신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는 두 자루의 검을 손끝으로 훑으며 각오를 끝마쳤다.

    복잡기괴한 세공이 새겨진 흑요석 검은 그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알겠습……”

    “안 돼!! 안 돼, 루칸다! 가봤자 죽을 뿐이야!”

    그때 암컷 고블린 한 마리가 제단의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전사들에게 붙잡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루칸다! 도망쳐,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어!”

    “키륵! 입 닥쳐라 암컷!”

    “이 암컷을 끌어 내려라!”

    고블린 전사들이 메루를 난폭하게 대하려는 순간.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루칸다가 바로 대답을 끝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단에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내려가 전사들에게 붙잡힌 메루의 앞에 섰다.

    그리고 루칸다가 전사들을 노려보자, 그 눈빛만으로 전사들이 메루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루칸다! 안 돼, 안 돼…… 이제야, 이제야 겨우 이렇게 돌아왔는데…….”

    메루가 루칸다에게 매달리며 사정했지만, 루칸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을 읽은 메루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루칸다는 그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