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8화
고블린 사냥(4)
소설에서 ‘선함’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개연적 요소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모든 캐릭터는 천성적인 선을 타고 났으며, 그 태생으로부터 타고난 성질의 결과물이 언제나 ‘선함’이라는 전개는 대다수의 납득을 얻으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캐릭터의 ‘악함’을 표현하기 위해 준비해야만 하는 수많은 인과적 사건과 뒤틀린 가치관.
그런 것들이 과연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겠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현실에서 인간이 악한 것에는 복잡한 이유가 필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간은 적당한 환경과 마땅한 이유만 존재한다면 충분히 악해질 수 있는 생물이니까.
‘오늘은 고블린이지만, 언젠가 같은 인간을 사냥해야 할 때가 온다.’
이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같은’ 인간이라니.
지금의 나는 인간도 뭣도 아니라, 마왕이 만들어낸 합성 생물체에 불과하지 않나?
어쨌거나 뒤이어 오늘 낮에 만났던 페페라는 여자와 그녀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둥지를 노리고 있는 모험가 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대화의 내용으로 유추해 보자면 지금까지 몇 번이고 둥지를 파괴해 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현재 내 둥지의 수준은?
‘하위 1%에 속할 만큼 허접한 수준이지.’
다른 둥지들을 털어본 놈들이 내 둥지를 노린다면 방어에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적다.
‘다른 수단을 강구해 봐야겠어.’
더 이상 인간을 죽일 수 있냐는 명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죽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
[햄토리 : 쮸쮸, 쮸, 쮸쮸!]
마인드 모드로 지켜보고 있던 찰나.
햄토리의 목소리에 의식이 환기되었다.
머릿속 정보의 우선순위를 두고, 의식의 방향을 다시 잡았다.
[누자베스 : 좋아, 언더 케이지 제군. 그대로 대기한다.]
현재까지 정찰 결과.
고블린 부락에 속한 몬스터는 대략 세 종류에 한정된다.
첫 번째는 가장 개체수가 많으며, 손쉬운 상대인 일반적인 ‘고블린’이다.
전문적인 전투 병력이 아니며 무기도 조잡한 죽창이나 날이 다 빠진 단검을 사용한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고블린보다 약간 더 수준이 높은 ‘고블린 전사’다. 고블린 전사의 전투력은 아마 내 렛맨 부대인 언더 케이지와 비슷한 수준.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부락에 한 마리씩 존재하는 ‘고블린 주술사’놈들이다. 이놈들이 바로 이번 사냥의 핵심 타깃이었다.
‘부락의 리더인 고블린 주술사는 한 마리. 고블린 전사는 대충 6마리에서 8마리. 나머지는 모두 일반 고블린.’
그렇게 30~40여 마리의 고블린이 부락의 평균 규모였다.
그에 비해 내 부대인 언더 케이지는 리더인 햄토리를 포함해서 30마리.
자, 그렇다면 승산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지.’
승패는 명명백백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효율적인 학살뿐이다.
뭐, 하나 더 추가하자면 햄토리의 자율 행동 능력을 실전에서 검증해볼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마인드 모드로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렸다.
[누자베스 : 첫 번째 부락의 토벌은 햄토리 네게 결정과 판단을 맡기겠다. 나쁘지 않은 성과를 기대하지.]
[햄토리 : 쮸!]
언더 케이지 부대의 위치는 고블린 부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부근이다. 그곳에서 바짝 엎드려 은폐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4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고블린들이 쳐놓은 조잡한 천막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고블린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냥한 짐승들을 뜯어 먹으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나오려나.’
햄토리가 렛맨들에게 짧고 간결하게 지시했고.
파스스.
드디어 수풀 속에 바짝 엎드려 있던 햄토리가 일어났다. 그 뒤로 렛맨들 역시 햄토리를 따라 일어났다.
부스럭, 부스럭.
햄토리를 중심으로 언더 케이지 부대가 일렬로 넓게 퍼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형을 이용한 기습의 이점을 살리지 않는 건가?’
창끝 형태로 정렬하여 돌진 기습을 벌인다면 초전에 기세를 잡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햄토리는 내 예상과 정반대로 일렬로 넓게 퍼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더 케이지 부대가 그 상태로 언덕을 다 내려오자,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던 고블린들이 한두 마리씩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발각된 것이다.
“키게에에엑!!”
키잉!
가장 먼저 언더 케이지 부대를 발견한 고블린이 기성을 내지르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 기성이 울려 퍼지며 다른 고블린들 역시 각자 무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블린 무리와 언더 케이지 부대의 거리는 대략 10미터. 여기서부터 달려든다면 확실히 난잡한 육탄전으로 발전될 것이다.
‘아무리 이쪽이 유리하더라도 병력의 손실은 최소화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소리를 뒤늦게 떠올리던 와중에 대치 구조가 확실하게 잡혀갔다.
처억.
햄토리가 방패를 전방을 향해 치켜 들었고.
퉁!
숏소드의 옆면으로 방패를 두들겼다.
렛맨들 역시 햄토리의 행동을 따라하듯 숏소드로 방패를 두들겼다.
“캬아아악!”
“키게에엑!”
고블린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더 이상 접근한다면 곱게는 안 끝난다고 위협을 하는 것이다.
처억!
하지만 언더 케이지 부대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한 발자국 내딛었다.
‘설마?’
처억!
앞으로 한 발 내딛고는 다시.
투웅!
방패를 두들겨 위협을 가하며,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일정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언더 케이지 부대와 고블린 무리의 거리가 좁혀졌다.
움찔!
순간 가장 앞에 나와 있던 고블린 놈이 흠칫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햄토리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아, 간을 본 거군.’
햄토리는 자신들이 지닌 절대적인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동은 그 이점을 행동으로 검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들은 30마리의 렛맨이 뭉친 ‘하나의 부대’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고블린들 역시 30여 마리의 고블린이 뭉친 ‘하나의 부대’일까?
그 질의에 대한 대답이 방금 도출되었다.
저것들은 하나의 부대가 아니라, 그저 30마리의 고블린이 같은 지역에 존재할 뿐이다.
“쮸!”
척!
햄토리가 방패를 걸친 왼손을 들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와 동시에 렛맨들이 방패를 바짝 당겨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듯 상체를 숙였다.
“쮸우, 쮸!”
척!
햄토리의 엄지손가락이 반 바퀴 회전하여 지면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언더 케이지 부대의 맹렬한 방패 돌격이 고블린 무리를 향했다.
터엉!
방패가 매섭게 고블린의 몸뚱이를 후려갈겼다!
“캬악!”
치명상에 달할 정도의 공격은 아니다.
하지만 방패로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진 고블린은 렛맨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쉭!
콰득!
역수로 쥐고 있던 숏소드를 쐐기처럼 쑤셔 박았다.
고블린의 머리통이 잘 익은 석류가 터지는 것처럼 붉게 흩뿌려졌다.
‘예상은 했지만, 아니 예상 이상이야.’
햄토리는 전투가 시작되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벌써 일반 고블린을 셋, 고블린 전사를 하나 쓰러뜨렸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과 방패를 치켜든 채 다음 사냥감을 찾아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다른 렛맨들도 상당히 침착하게 밀어 붙이고 있고.’
고블린 전사라도 1:1로 붙으면 렛맨과 동등한 수준이다. 하지만 렛맨들은 결코 1:1의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대열을 최대한 유지하고, 흐트러지더라도 2인 1조로 움직였다.
한 놈이 정면을 맡으면, 나머지 한 놈이 측면 혹은 후면에서 가세하는 전법을 취하고 있었다.
‘빠르고 안정적이고. 흠 잡을 구석이 없구만.’
목숨을 건 결투라면 1:1로 싸워도 된다.
하지만 이건 결투가 아니라 사냥이다.
적은 피해와 최단기 소요시간이 관건. 그렇기에 렛맨들은 둘이서 고블린 한 마리를 빠르게 처리하고, 계속해서 다음 타깃을 잡았다.
“쮸, 쮸쮸!”
“쮸우!”
일방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순식간에 고블린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남은 고블린들조차 전의를 거의 잃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이 전투를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캬르카, 르아나!”
쿵!
지팡이 끝을 지면에 찍으며 고블린 주술사가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자 도망치기 바쁘던 고블린들이 멈춰서더니, 진형을 잡아갔다.
“쮸…….”
햄토리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틀었다.
그제야 이 부락의 우두머리 ‘고블린 주술사’의 위치를 포착한 것이다.
고블린 주술사는 부하 고블린들의 방어 진형이 갖춰지자마자 음습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뭐였더라…… 고블린 주술사가 사용하는 주술의 종류가…….’
일단은 주변 고블린들의 기본적인 신체 능력을 향상 시키는 강화계 버프가 하나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공격 마법이다.
딱 거기까지 예상한 직후 고블린 주술사의 머리 위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자, 불꽃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점점 더 거대해져 갔다.
[누자베스 : 햄토리, 멍하니 보고 있을 여유는 없을 텐데.]
[햄토리 : 쮸!]
햄토리에겐 대열 전투 외에도 특기가 있었다.
병력이 햄토리 한 마리일 때부터 지하 수도를 전전하며 단독 전투를 벌인 경험이 빛을 발할 때였다.
햄토리는 주저 없이 방패를 내던지고 대열에서 뛰쳐나왔다.
“카르카!”
고블린 주술사도 단독으로 뛰쳐나온 햄토리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가까이에 있던 고블린 전사 두 마리가 고블린 주술사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지만.
“키이!”
“키이익!”
부웅!
순간 고블린 전사의 투박한 도끼날이 허공을 갈랐고, 햄토리의 머리털 몇 가닥을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뎅겅!
햄토리의 검이 고블린 전사의 목을 갈랐다.
나머지 한 마리는?
퍼억!
햄토리는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어깨로 들이받았다. 고블린 전사의 몸이 휘청거렸고.
푹, 푹푹푹푹!
짧게 쥔 숏소드로 복부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며 밀쳐냈다.
“키이이!”
고블린 전사의 갈라진 배에서 창자와 혈액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까지.
햄토리는 재빠르게 몸을 틀었다.
얼굴에 묻어 있던 혈액이 흩날렸고, 고블린 주술사와 햄토리 사이에 핏방울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찰나의 순간.
햄토리가 핏방울의 사이를 가로지르듯 몸을 날렸다. 순간 비호처럼 고블린들의 사이를 돌파한 직후, 뒤따라온 렛맨들이 나머지 고블린들을 덮쳤다.
콰득!
“캬르아아아아아!!”
햄토리의 검이 고블린 주술사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고블린 주술사가 필사적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근접전에서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햄토리는 이미 고블린 전사 두 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한 엘리트 렛맨이다. 고블린 주술사가 가까이 붙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믿고 있던 부하들마저 렛맨들에게 사정없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누자베스 : 이걸로 첫 번째 부락은 끝났군.]
언더 케이지 부대의 피해는 경미.
렛맨 다섯 마리가 부상을 입고, 한 마리가 죽었지만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누자베스 : 부상당한 녀석들은 바로 치료하고 나머지는 전리품을 챙겨라. 투자한 만큼 환급 받아야지.]
나는 슬슬 하이브 마인드로서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