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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7화 (1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화

    고블린 사냥(3)

    “장난하냐!? 이 산더미만큼의 철광석이 고작 9,250벨이라고? 뚫린 게 주둥이라고 이 새끼 이거 되는대로 지껄이는 거 아냐?”

    “누자베스 님…… 하지만 그게 연맹에서 책정한 적정 시세입니다……!”

    “햄토리야, 안 되겠다. 더러워서 둥지 관리자 짓거리도 못 해먹겠다. 그냥 오늘 이 새끼 조사버리고 사업 접자. 내가 철광석 다 그냥 줄 테니까 오늘 9,250대만 맞자.”

    “쮸! 쮸쮸!”

    “누자베스 님, 진정, 진정하시고 조금 더 가격을 쳐드리겠습니다……!”

    에르바키나 연맹 소속의 상인 ‘길리도’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삐쩍 마른 사내였다.

    본래 명망 있는 흡혈귀 가문의 후예라고 하지만, 몇 세대에 걸쳐 희석된 혈액의 농도 탓에 흡혈귀로서의 능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길리도는 여느 가정의 가장이 그러하듯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에르바키나 연맹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 집안의 기둥이었다.

    ‘헬베르카의 혈액을 썼다더니 진짜 성질 더럽네…….’

    길리도는 부러진 곡괭이 자루를 꾹 쥔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를 흘깃 바라봤다.

    누자베스는 곱상하고 유약한 외모와 달리 아주 성질머리가 끝장난 성격파탄자였다.

    “장사꾼 양반. 머리 잘 굴려야 돼. 괜히 중간에서 푼돈 좀 챙겨보려다 진짜 박 터져.”

    부웅!

    누자베스는 실실 웃으며 곡괭이 자루를 야구 배트처럼 허공에 휘둘렀다.

    “하…….”

    길리도는 서둘러 가격을 다시 책정했다.

    지금까지 가슴 졸이며 조금씩 철광석의 시세를 깎는데 성공했다. 누자베스는 처음엔 곧이곧대로 철광석의 시세가 떨어지고 있다는 얘길 믿었다.

    하지만 점점 불만이 쌓이나 싶더니, 드디어 오늘 폭발해버린 것이다.

    “누자베스 님…… 10,920벨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고 매입가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길리도 네 두개골이 복합골절되는 소리야?”

    “누자베스 님! 매입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거래를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이번엔 살짝 강경한 태도로 나서 봤지만.

    부웅!

    카앙!

    “히이잇!”

    “아이쿠, 미안. 내가 배팅 연습하다가 그만 벽을 쳐버렸네.”

    절대로 고의다!

    절대로 실수가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길리도의 머리 바로 옆을 스치듯 곡괭이 자루를 휘두를 리 없지 않나?

    길리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길리도. 나는 잃을 게 없는 놈이야. 여기서 상회의 끄나풀 한 놈 목을 따버려도, 끽해야 뒤지는 게 전부라고.”

    이번엔 누자베스가 길리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개털일 때 받은 도움은 잊지 않는 놈이거든. 상인이라면 눈앞에 놓인 푼돈을 쫓지 말고, 돈줄을 두툼하게 만들 궁리를 해야지. 안 그래?”

    “저, 저는 에르바키나 연맹의 상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전력으로 각하께 도움이 되고자…….”

    “15,000벨.”

    “예, 예?”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딱 그 정도만 달라고. 앞으로도 내 수중에 전리품이 이것저것 들어올 텐데 우선적으로 길리도 너한테 매각할 테니까.”

    “그, 그래도……! 15,000벨은 말이 안 됩니다! 차, 차라리 죽이십셔!”

    현재 철광의 시세를 따져봐도 저 정도의 양은 12,000벨이 적정가였다. 그중에는 길리도 같은 중간 상인들이 챙겨야 하는 유통 수수료도 있었다.

    그러니까 15,000벨을 주고 철광석을 산다면 완전히 적자. 생각할 것도 없이 적자였다.

    “그래? 그럼 죽자.”

    툭툭.

    누자베스는 곡괭이 자루를 들고 길리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길리도는 유학을 위해 수도로 떠난 아내와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얼굴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다.

    * * *

    24,000벨.

    지금까지 악착같이 모으고 또 모은 돈이다.

    지하 수도에서 렛맨 부대를 운용해서 시궁쥐를 모조리 잡아 죽이고, 코볼트들이 밤낮도 없이 땅굴을 파서 모은 철광석을 모조리 매각한 결과였다.

    물론 오늘 내 담당 상인이었던 길리도가 좋은 값에 철광석을 모조리 매입해준 덕분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신사적이고 상냥하게 부탁했더니, 적정 시세보다 높은 값에 철광석을 매입해 줬다.

    절대로 협박을 하거나, 무력을 행사한 적은 없다.

    혹시라도 이후에 이 기록을 읽게 될 독자들이 오해할 까봐 명확하게 말해두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붙었지.”

    고블린 부락을 토벌하다 ‘고대 유물’로 보이는 전리품을 입수하게 된다면 길리도 자신에게 매각할 것.

    입수한다고 무조건 매각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매각할 계획이라면 길리도에게 언질을 달라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이걸로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이걸로 방어구를 사는 게 좋겠어.’

    투구와 갑옷 말이다.

    물론 내가 쓸 건 아니다.

    일단은 보험 같은 것이다. 렛맨들이야 털복숭이인 걸 제외하면 체형 자체는 인간 어린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전신을 갑옷과 투구로 가리면 어느 정도 위장은 될 것이다.

    게다가 고블린 부락 토벌 작전을 앞두고 부대의 장비를 갖춰놔서 나쁠 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곧장 서신함을 뒤져 판매 카탈로그를 찾아냈다.

    “24,000벨을 모조리 쓴다고 해도 한 마리당 800벨 정도씩밖에 못 쓰겠네.”

    일단은 검과 방패는 지금 쓰던 걸 유지하도록 하자.

    카탈로그를 살펴보자 도저히 풀세트를 갖출 여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싼 장비만 사더라도 30마리 분의 장비가 필요하다. 군대를 무장시킨다는 게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지 싫을 정도로 체감할 수 있었다.

    조잡한 체인 메일 한 벌이 430벨.

    이걸 30벌만 사더라도 12,900벨이다.

    레더 글러브와 부츠가 각각 110벨과 100벨.

    ‘남은 돈으로는…… 4,800벨이니까.’

    적당한 투구를 골라 보기로 했다.

    ‘방어력도 중요하지만 일단 이번에는 얼굴 전체를 가려줄 위장용도도 겸하고 있으니까.’

    머리를 보호해 주지만 얼굴이 노출되는 투구가 많았고, 얼굴까지 가려주는 건 주둥이가 툭 튀어 나온 렛맨들에게 도저히 맞을 것 같지 않았다.

    ‘흐음…….’

    목록을 쭉 살피며 책장을 넘기자 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던 머리 장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거 꼭 역병 의사 가면 같이 생겼네.”

    딱 그런 형태였다.

    까마귀의 머리를 닮은 형태.

    부리 부분이 툭 튀어 나와 있고, 가면의 뒤쪽에는 흑색의 두건이 늘어져 머리 전체를 덮어준다.

    확실히 이런 형태면 렛맨의 머리에도 무리 없이 맞을 것 같다.

    물론 방어력은 금속 재질의 투구와 비교하자면 형편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방어력보다 위장에 신경을 써야했다.

    [피네르의 가면 -130벨]

    [슬레비나 지역의 원주민들이 즐겨 쓰는 가면이다. 종교적, 혹은 의료적 목적은 없으며 원주민들조차 이 가면의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피네르는 ‘가면’이란 의미다.]

    직역하자면 ‘가면의 가면’인가?

    어쨌거나 렛맨들에게 딱 맞는 가면을 찾아냈다.

    피네르의 가면까지 모조리 사면, 내 수중에 남는 돈은 800벨뿐이다.

    ‘역시 대규모 군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원료 생산지를 확보하고, 제작 기술 및 생산 설비를 확보해서 자급자족하는 게 맞겠지.’

    다른 하이브 마인드들 역시 같은 노선을 택하고 있었다. 광맥을 확보하고, 그 외에 장비의 재료가 생산되는 지역을 점거한다.

    그 다음 둥지 내부에 제련 및 생산 시설을 갖추는 것이다. 내 소설에 등장하던 상위급 하이브 마인드들은 모두 그러한 테크트리를 타고 있었다.

    뭐, 지금은 눈물을 머금고 비싼 값에 장비를 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 * *

    “쮸쮸!”

    “쮸우-!!”

    철겅, 철겅.

    새로운 방어구가 도착했고, 장비를 모두 착용한 렛맨 부대가 신나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이걸로 조금은 제대로 된 부대 같은 느낌이 나는군.’

    지금까진 렛맨 도적놈들인지 뭔지 분간이 안 가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똑같은 장비를 맞춰 입혀 놓자, 꽤나 그럴싸한 모습이다.

    무기는 숏소드, 방패는 세글리트의 미혹 파편.

    그러니까 다 낡아서 녹슨 철 쪼가리 방패다.

    그리고 방어구는 위에서부터 까마귀 머리 같은 ‘피네르의 가면’과 몸통은 체인 메일. 팔과 다리엔 각각 레더 글러브와 레더 부츠.

    역병 의사 같은 걸 단체로 뒤집어 쓴 무장 단체가 되었다. 저 기괴한 가면 덕분에 적들에게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준다면 더없이 완벽하겠지.

    “쮸!”

    햄토리가 나서서 부대를 정렬시켰고, 렛맨들이 햄토리의 지시에 따라 나란히 섰다.

    렛맨은 저렇게 귀여워 보여도 상당히 위계 서열에 민감한 종족이다.

    “좋아, 오늘밤 고블린 놈들 갈아버릴 준비는 됐나?”

    “쮸쮸!”

    “쮸-!”

    자, 여기까지 렛맨 부대의 추가 무장까지 새롭게 개장하길 끝냈고.

    이제 해가 지고 마을 주민들의 행동이 뜸해지길 기다리면 끝이다.

    랄프의 오두막 뒤편.

    비탄의 숲이 오늘밤의 전장이었다.

    * * *

    “역시 너무 심했나…….”

    늦은 밤 랄프는 자신의 거처인 오두막에서 나와 비탄의 숲을 바라봤다.

    누자베스란 모험가가 고블린킹 파르카의 퇴치 의뢰를 받는다기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한 것까진 좋았다. 대다수의 모험가들은 무모하고, 무책임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의뢰를 조건으로 걸면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객기를 부리며 받았다가 의뢰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누자베스란 모험가는 해가 질 무렵 다시 태연스럽게 랄프를 찾아왔다.

    ‘동이 트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는 주저 없이 비탄의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살 희망자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어째선지 승리를 확신한 투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랄프는 지금까지 꽤 많은 모험가들을 만나 봤지만, 그런 눈빛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나 참, 괜한 걱정이겠지.”

    랄프는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알아서 도망칠 것이다.

    그래도 역시나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막 모험가가 된 17급의 모험가가 무슨 수로 고블린 부락을 토벌할 수 있겠나? 그것도 한 곳도 아닌 다섯 곳이다. 제한시간도 오늘 동이 틀 때까지. 아무리 모험가들이 해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랄프가 오두막의 앞을 서성이며 괜한 걱정을 거듭하는 사이.

    그곳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숲속을 렛맨 부대 ‘언더 케이지’가 이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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