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5화
고블린 사냥(1)
“아니, 그게…… 이 의뢰는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좀 유도리 있게 처리해 줄 수 있냐고 묻고 있잖아요.”
“아이고…….”
다울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내가 의뢰 게시판에서 떼서 가져온 종잇장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지 10분째였다.
“누자베스 님…… 모험가 길드는 어디까지나 의뢰를 중간에서 알선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의뢰주가 정해 놓은 조건은 저희 쪽에서 어떻게 임의로 편의를 봐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등급을 올려주면 되잖아요, 등급을.”
“그, 그것도 내규 심사에 따라 등급을 상향 조정하는 것이라…….”
도무지 합의점이 도출되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려서 모든 일이 쉽사리 해결된다면, 곤란한 일도 없겠지만.
‘마침 딱 좋은 의뢰가 있는데 모험가 등급이 걸리네.’
이딴 설정을 짠 놈이 누구냐면 말이다.
그게 바로 나다.
주인공 류시혁이 소설이 시작되고 5화만에 별의별 마물을 다 때려잡을까봐 걸어둔 제동장치란 말이다!
주인공의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초반엔 일단 고블린이나 잡게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험가 등급’이란 것이 지금은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망할…… 이래서 설정은 구멍을 많이 만들어 놔야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건데.’
바커스에서 들은 정보로는 굴덴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숲에 고블린 부락이 급속도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고블린 주술사를 사냥해야 할 이유도 생겼고, 렛맨 외에도 새로운 병력을 추가할 계획도 있었다.
‘하이브 마인드가 둥지 주변의 중립 몬스터들을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새로운 병사들!
마나석 공급!
거기에 길드에서 보수까지 받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다.
때문에 일부러 굴덴 마을의 모험가 길드까지 찾아와 고블린과 관련된 의뢰를 찾아보게 된 것이다.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고블린킹 파르카 퇴치’ 의뢰였다.
‘젠장, 보수가 너무 좋아서 다른 놈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데.’
의뢰서에 적힌 보수를 다시 확인했다.
‘의뢰 성공 시 바로 8,600벨. 진짜 이 돈만 받아도 개꿀이지.’
감이 확 안 오나?
우리 언더 케이지 애들이 토할 때까지 쥐새끼들을 잡아 죽여서 꼬리를 650개나 모아야 저 정도 금액이 된다.
그런데 고블린킹 한 마리의 목숨 값이 무려 8,600벨이다! 이런 의뢰를 못 받으면 분해서 잠도 안 올 것이다.
‘거기다 봉인 스크롤까지 하나 더 얹어 준다니.’
스크롤을 사용하면 소실된 고대의 기술을 얻거나, 마법을 스킬로 익힐 수 있게 된다.
봉인이란 어떤 스크롤인지 알 수 없게 처리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어떤 기술이나 스킬을 얻게 될지 복불복! 즉, 복권 같은 것이라는 설정이었다.
‘말이 좋아 복권이지.’
고백하겠다.
봉인 스크롤은 이미 1등 당첨이 확정된 복권이나 다름없었다.
왜냐면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는 노골적일 만큼 주인공을 밀어주기 위한 억지 전개가 넘쳐났으니까!
뭐가 나올지 모르는 스크롤!?
하지만 주인공이 까보면 무조건 개사기 오피 스킬!? 와! 주인공 운빨 개쩌네! 이딴 전개를 위해 까기만 하면 무조건 사기 스킬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봉인 스크롤만큼은 얻어야만 했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요즘은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 괜히 그런 기대가 된단 말이다.
“실은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다울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의뢰를 한 의뢰주를 직접 찾아가 조건 수정을 요청하면 됩니다. 물론 의뢰주가 허락해야만 합니다만…….”
“그러니까 이 의뢰의 수주 제한을 좀 낮춰달라고 부탁하란 말이죠?”
“예……. 그런데 그 의뢰의 의뢰주는 성격이 좀 괴팍하고 다혈질이라…….”
다울은 마치 나를 걱정하는 듯 말했지만, 그런 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성격 지랄맞기론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만큼 박태준 팀장하고 일해 온 세월이 무려 4년이다!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단 말이다.
게다가 만약 끝까지 말이 안 통한다면 아주 약간 강경한 방법을 취할 수도 있었다.
* * *
다울과 대화를 끝마친 후 지체 없이 길드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다울이 알려준 방향을 따라 걸었다.
굴덴 마을을 두르고 있는 높은 목책을 빠져나와 한동안 오솔길을 걷자, 조그마한 오두막이 하나 보였다.
그 뒤로는?
‘음침한 숲이구만.’
드문드문 초목이 자라난 평야와 짙은 어둠이 깔릴 만큼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난 숲. 딱 그 경계선에 지어진 오두막.
아마도 저 오두막 뒤편이 ‘비탄의 숲’이라는 굴덴 마을의 북쪽 숲일 것이다.
내가 다울에게 들은 정보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저 오두막이 이번 의뢰의 의뢰주인 사냥꾼 ‘랄프’의 거처일 것이다.
똑똑.
나무로 된 문을 노크해 봤지만 반응이 없다.
‘지금은 집에 없나?’
끼이익.
혹시 하는 마음에 문을 잡고 밀어보자 쉽사리 열렸다. 오두막 안쪽을 살펴보던 중 뒤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집을 훔쳐보는 게 취미라면 좀 더 은밀히 움직여야지.”
뒤를 돌아보자, 산발을 한 중년의 남성이 고블린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다부진 체격. 그리고 얼굴과 팔에 적지 않게 새겨진 상처들.
활과 단검. 저 중년의 남자가 랄프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길드 지부장 다울에게 얘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무두질을 부탁하러 온 건가? 가서 고블린 세 마리만 잡아오게.”
랄프는 내게 흥미도 없다는 듯 오두막 앞뜰에 고블린 시체를 던져 놓고는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두막 주변에는 고블린에게 벗겨낸 가죽을 널려서 말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무두질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럼? 이런 곳까지 말동무를 찾아온 건가?”
랄프는 짐짓 조소하듯 웃었다.
“고블린킹 파르카의 퇴치 의뢰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 수주 제한을 낮춰 줬으면 합니다.”
현재 내 모험가 등급은 17급.
랄프가 의뢰한 고블린킹 파르카 퇴치 의뢰의 수주 제한은 13급부터다.
내가 바로 용건을 꺼내자, 랄프가 손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관심한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경멸의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의뢰의 수주 등급을 낮춰달라고?”
랄프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보게, 모험가가 됐다고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낙오자 고블린이라도 잡아본 적은 있나?”
“지금부터 잡아보게 의뢰 수주 등급 좀 낮춰줄 수 있습니까?”
“까불지 마라, 애송이!”
랄프가 노성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붉어진 목에 핏발이 곤두설 만큼 화가 난 모양이다.
‘아니, 싫으면 싫다고 그러지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어쨌거나 혼 좀 났다고 그냥 돌아갈 거면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모험가 놈들을 잘 알지. 실력도 뭣도 없는 주제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놈들 아닌가? 자기 능력으로는 수습하지도 못할 일을 벌여 놓고는 꽁무니 빼고 도망치는 놈들이다. 책임감이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내가 뭘 믿고 의뢰를 맡겨야 하지?”
대화는 길 필요가 없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뭐?”
“그 의뢰를 받아갈 만큼의 실력과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뭐든 제시해 보시죠.”
나는 달변가일 필요가 없었다.
결과로 증명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 * *
“좋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실력 좀 구경해 보지.”
랄프가 조건부 허락을 한 다음날.
굴덴 마을의 길드에 새로운 의뢰서가 걸려 있었다.
“고블린 부락 5개 섬멸. 내일 동이 틀 때까지?”
다행히도 의뢰 수주가 가능한 등급에 제한은 없었다. 보상은 고작 50벨이 전부다.
한 마디로 다른 모험가가 실수로라도 수주하지 않도록 보수금을 터무니없이 적게 붙여놓은 것이다.
게다가 시간제한이 걸린 의뢰 아닌가?
“이딴 정신 나간 의뢰는 누가 받는 거야?”
“뭘 보고 있는 거예요, 페페?”
“아, 카를린 이거 봐봐. 여기 고블린 부락 토벌 의뢰서. 웃기지 않아?”
“내일 동이 틀 때까지 고블린 부락 다섯 곳 토벌이네요? 상위 모험자 대상의 의뢰일까요? 아니, 그런 것치곤 보상이 너무…….”
오늘은 웬일로 나 말고 다른 모험가들도 길드에 있었다. 5인 파티로 보이는 모험가 팀이다.
‘매우 클래시컬한 조합이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숨어 모험가 팀을 살폈다.
일단 성직자 같은 의복을 걸친 여자가 카를린인 것 같고, 의뢰 게시판에 붙어서 키득키득 웃고 있는 여자가 페페. 그러니까 겉모습만 봐서는 대충 검사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남자 세 놈이 모여 있었다.
‘저 로브를 걸친 놈이 마법사 같고, 한 놈은 중장갑. 나머지 한 놈은 뭐지? 궁수?’
어쨌거나 괜히 모험가 놈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은 없다. 잠자코 녀석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며 얘기를 엿들었다.
“페페, 우리가 고블린이나 잡으려고 이 섬까지 온 건 아니잖아.”
“나도 알아. 누가 고블린 토벌한다고 했나? 그냥 이 의뢰가 웃겨서 보라는 거였어.”
페페와 카를린이 얘기를 나누고 있자, 떨어져 있던 중장갑의 남성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런 시시한 의뢰를 하기 위해 먼 걸음을 한 건 아니지.”
“그래그래, 고블린 토벌 정도는 초보 모험가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잖아.”
테이블에 앉아서 화살대를 깎던 남자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둥지 토벌 의뢰는 들어오지 않은 것 같으니까 시간이라도 때울 겸 적당한 의뢰를 찾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둥지 토벌.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그래, 저것들이 바로 하이브 마인드의 주적이자, 하이브 마인드의 사망 원인 1순위인 ‘모험가’들이었다.
‘천벌을 받을 사이코패스 놈들…….’
그래, 비유하자면 저런 놈들이 바로 무단으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모조리 죽이고 돈도 뺏어 가는 강도 놈들이다!
선량하게 땅굴이나 파며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도란도란 살던 하이브 마인드를 찢어 죽이고, 그 시체를 불태우는 도적놈들이란 말이다!
너무 무서워서 손발이 바들바들 떨린다.
물론 저 강도놈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놈은 내가 만든 캐릭터인 ‘류시혁’과 ‘백주월’이지만!
“그나저나 둥지 토벌 의뢰는 진짜 안 들어오네. 이 섬에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가 전혀 없을 리가 없는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조만간 둥지가 발견되면 근처 마을에서도 토벌 의뢰가 들어오겠죠.”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잖아…….”
페페라는 여자애와 카를린의 대화를 잠자코 들었다. 정보는 중요하다. 적에 대해선 실마리 같은 정보 하나라도 더 알아두는 편이 유리하니까.
“이렇게 둥지 토벌 의뢰가 없으니까 찾아오는 모험가들도 우리 외엔 없…….”
응?
왜 말을 하다 말지?
슬쩍 시선을 돌려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할 때였다.
페페의 시선이 정확하게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슬쩍 보는 정도가 아니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저스 스트라이크네…….’
저 눈빛.
저 눈빛은 확실하다.
먹잇감을 포착한 범죄자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