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3화 (1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화

    마스커레이드(1)

    “요즘 젊은 모험가 놈들은 패기가 없어, 패기가! 나 때는 말이여…….”

    굴덴 마을의 촌장 바커스.

    초라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탄탄하게 단련된 상체에서 정정함이 묻어나는 사내였다.

    젊었을 적엔 아리카 섬을 떠나 모험가로 활동했었고, 왕국 내에서도 꽤나 이름을 알렸을 만큼 실력도 있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그가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비록 젊었을 적엔 바체트 령의 이곳저곳을 떠돌았지만, 자신의 고향인 굴덴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그렇기에 노후 이렇게 마을로 돌아와 촌장 일까지 도맡아 하게 된 것이다.

    “촌장님, 시궁쥐 보상금이 너무 적은 걸 어쩌겠어요. 요즘 아리카 섬을 찾는 모험가들도 줄어서 다른 마물 토벌 의뢰도 밀린다니까요.”

    모험가 길드 ‘굴덴 지부’의 지부장인 ‘다울’이 웃는 얼굴로 바커스를 타이르며 길드 건물의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바커스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것인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요즘 것들은 돈돈! 돈!! 돈만 준다면 자기네 애비애미 토벌 의뢰도 받을 새끼들이여!”

    “아이고, 촌장님…….”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이 근방 지하 수도에 시궁쥐를 계속 방치해두니까 이제는 땅 위로 올라와서 밭까지 다 망쳐놓지 않나?”

    “일단은 영주님께 피해 상황을 보고하고 있으니 조만간 인력을 파견해줄 겁니다.”

    “다울 자네 나한테 그 소리한 지 반년이 지났어!”

    시궁쥐는 토벌하기 어려운 마물은 아니다.

    제대로 무장만 한다면 평범한 성인 남성도 한 마리 정도는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길드를 찾는 모험가들에게 시궁쥐 토벌 의뢰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시시한 의뢰를 받기 위해 이런 벽지의 섬까지 찾아오는 모험가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하 수도라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 더욱 기피하는 분위기다.

    냄새나고, 어둡고, 더러운 곳에서 커다란 시궁쥐를 하루 종일 잡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의뢰의 보수금이라도 짭짤하다면 일을 맡을 모험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궁쥐 한 마리의 보수는 고작 10벨.

    여기서 촌장 바커스가 마을의 운영자금을 써서 한 마리에 13벨을 지급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궁쥐를 잡겠다고 나서는 모험가는 없었다.

    “현재는 이곳을 찾는 모험가들을 둥지 토벌에 돌리는 게 고작이에요. 시궁쥐야 밭의 작물이나 좀 갉아먹는 것으로 끝나지만, 둥지는 놔두면 진짜 큰일 나잖아요.”

    “끄응…….”

    다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시궁쥐야 기껏해야 작물을 파먹거나, 사람을 공격하는 정도다. 그건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를 방치하다 생기는 재앙에 비하자면 경미한 수준의 피해였다.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젊은 것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 했을 게야!”

    “압니다, 알죠.”

    바커스는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져 있던 감자밭을 떠올리자, 속이 타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지하 수도에서 증식하는 시궁쥐를 모조리 박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삭신이 쑤시고 허리가 삐걱거렸다. 게다가 젊었던 시절 입었던 부상 때문에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촌장님, 오늘은 이만 들어가셔서 쉬십쇼. 제가 마땅한 모험가가 찾아오면 바로 시궁쥐 토벌 의뢰를 맡겨 볼게요.”

    가뜩이나 길드의 굴덴 지부를 찾는 모험가도 줄고 있는 실정이다. 길드 건물 앞에서 바커스가 엄한 소리나 하고 있다간, 기껏 찾아와준 모험가들의 심기를 건드릴 염려가 있었다.

    그렇게 다울이 이 곤란한 늙은이를 어서 돌려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길드 건물에서 마을의 중앙 광장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 누군가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을 한 소년이었다.

    못 보던 얼굴.

    이 마을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게다가 허리에 채워진 한 자루의 검.

    차림새를 보면 떠돌이 모험가다.

    조금 어려 보이긴 하지만, 바커스 역시 16살이 되던 해 마을을 떠나 모험을 시작했다. 저런 나이대의 모험가가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역시나 모험가였는지 소년은 길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아, 모험가 분이십니까? 의뢰 수주는 안쪽의 접수처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혹시 저희 길드를 이용하시는 게 처음이면 모험가 등록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울이 허겁지겁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바커스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비실비실한 놈이구만.’

    소년은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놓은 듯 유약해 보였다.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단발의 머리카락과 허름한 옷차림.

    거저 줘도 쓰기 싫을 만큼 질 나쁜 숏소드 한 자루.

    바커스는 금방 견적을 냈다.

    ‘실력 있는 모험가라면 저런 거지같은 행색을 하고 다닐 리가 없지.’

    모험가들이 둥지 토벌을 할 때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꽤나 상당했다. 게다가 길드에서 ‘성지’급으로 분류한 둥지의 토벌 보수금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저 소년은 이제 막 모험가 생활을 시작한 초짜. 실력도 보잘 것 없는 초짜가 틀림없었다.

    소년은 커다란 눈망울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궁쥐.”

    짧고 간결한 어투.

    “시궁쥐 토벌 의뢰를.”

    그 소년의 목소리는 바커스에게 그야말로 구원처럼 들려왔다!

    * * *

    “누자베스?”

    “아, 예.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대륙 출신인가? 바체트 령에선 희귀한 이름이구만.”

    “그런가요? 어쨌거나 모험가로 등록도 했고, 제대로 시궁쥐 토벌 의뢰서에 동의하는 서명도 했습니다. 이걸로 촌장님의 걱정도 하나 줄었군요.”

    “몇 마리?”

    “일단은 20마리짜리 토벌 의뢰를 맡겼습니다. 그다지 실력 있는 모험가는 아닌 것 같으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요.”

    바커스는 작게 혀를 차며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그런 비리비리한 놈이 시궁쥐를 잘도 잡겠구만. 오히려 시궁쥐한테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누자베스라는 소년이 걱정됐다. 제대로 된 장비나 무구도 없고, 실력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동료도 없지 않았나?

    아무리 시궁쥐가 약하다고 해도, 마물은 마물이다.

    ‘이런 푼돈 벌이에 목숨을 걸고 하진 않겠지.’

    바커스는 파이프를 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적당히 도전해 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토벌 의뢰를 포기하겠다고 다시 찾아올 테고.’

    바커스는 자신의 어렸을 적, 아버지의 유품이었던 검을 들고 모험가가 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실패하고 도망치는 게 일상이었지.’

    오늘 시궁쥐 토벌 의뢰를 받아간 누자베스라는 소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에 다시 길드를 찾아오면 내게 보내게. 아마 한번 부딪쳐보고 금방 도망쳐 돌아올 테니 말일세.”

    누자베스라는 소년이 성공적으로 시궁쥐 20마리를 사냥해 올 확률은 0%에 가까웠다.

    바커스는 30년 넘게 모험가로 살아왔고, 그 정도 안목은 있었다.

    * * *

    렛맨으로 구성된 부대 ‘언더 케이지’의 실전 능력은 이미 입증이 완료되어 있었다.

    싸구려 숏소드와 다 낡아 부서져가는 방패로 무장한 게 고작이지만 말이다. 상대가 시궁쥐라면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누자베스 : 좋아, 이번엔 꽤나 많이 몰았구만.]

    [햄토리 : 쮸쮸!]

    마인드 모드로 언더 케이지 부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둥지에서 한참 떨어진 지하 수도의 막다른 길.

    20여 마리의 시궁쥐가 구석에 몰려 있었고, 녀석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렛맨 7마리가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누자베스 : 역시 사냥은 몰이사냥이지. 햄토리 후딱 해치우고 오늘 시마이 치자. 슬슬 꼬리 환전하러 가야되니까.]

    [햄토리 : 쮸!]

    어제 굴덴 마을의 모험가 길드에서 시궁쥐 토벌 의뢰를 받은 지 딱 24시간이 되던 차였다.

    벌써 렛맨의 수가 7마리가 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시궁쥐 꼬리도 상당한 양이 모이게 되었다.

    ‘하루 만에 시궁쥐만 58마리를 잡았지. 아, 지금 몰아넣은 놈들까지 합치면 78마리!’

    한 마리당 13벨을 준다고 했으니까.

    대략 계산해서…….

    ‘1,014벨이다!’

    무려 초기지원금의 2배나 되는 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개고생해서 캐낸 철광을 에르바키나 연맹 놈들에게 판매해 봤자 저런 큰돈을 못 버는데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모은 꼬리를 한 번에 모조리 가져가면 의심받을 테니 30개만 가져가자.’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궁지에 몰린 시궁쥐 놈들이 언더 케이지 부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궁쥐라도 20마리나 모이면 그 위세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아마 내가 혼자 시궁쥐 20마리에게 둘러 싸였다면?

    ‘순식간에 넝마조각이 됐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전투 경험이 축적된 렛맨 부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팔랑크스 진형을 어쭙잖게 흉내 낸 것뿐이지만.’

    상대가 무작정 달려드는 게 전부인 시궁쥐라면 유효한 진형이었다.

    터엉!

    일렬로 선 렛맨 부대는 방패로 전방과 서로의 측면을 보호하며 돌격을 막아냈다.

    그 다음은?

    콰득!

    역수로 쥐고 있던 숏소드를 그대로 시궁쥐의 등에 꽂아 넣고, 그대로 빼내며 다시 방패로 밀어낸다.

    [누자베스 : 키야-! 달달하다, 달달해. 편하게 들어오라 그래. 편하게 편하게.]

    순식간에 공방의 주도권이 뒤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기세 좋게 달려들던 시궁쥐들은 전의를 잃고 점점 구석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기세를 몰아 렛맨 부대가 거리를 좁혀갔다.

    [햄토리 : 쮸, 쮸쮸!]

    [누자베스 : 그래그래, 이것이 바로 동족상잔의 희극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

    시궁쥐들이 렛맨 부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보니, 그간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렛맨 부대의 규모가 얼마나 늘어날지 기대해볼 만했다.

    * * *

    사냥을 끝마친 후 시궁쥐 꼬리를 30개 정도 자루에 담아 둥지를 나섰다. 둥지부터 지하 수도를 통해 한참 걷다보면 굴덴 마을의 하천 부근과 이어진 출구가 나온다.

    하천의 하수구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높이가 15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탑이 하나 보인다.

    바로 저게 모험가 길드의 건물이다.

    ‘어제 왔을 때 모험가 등록도 무사히 끝마쳤고.’

    인간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의심받는 일 없이 무사히 모험가로 등록할 수 있었다. 이렇다 할 호구 조사도 없었고 말이다.

    ‘경력이 없으니 17급부터 시작이라.’

    내가 받은 모험가 증명서는 ‘17급 모험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험가의 등급에 따라 길드에서 수주할 수 있는 의뢰가 달라진다. 물론 시궁쥐 토벌 의뢰 정도야 17급 모험가도 충분히 수주할 수 있었다.

    길드의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오늘도 한적한 실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렇게 모험가가 없는데 잘도 철수하지 않는군. 길드는 마물 토벌 의뢰를 알선하고, 중간에서 그 수수료를 챙기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말이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시궁쥐 꼬리나 후딱 돈으로 환전해서 둥지로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에 굴덴 마을의 지부장 다울이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