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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8화 (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8화

    군단의 첫걸음(1)

    아리카는 게르나의 고어로 ‘홀로 존재하는’이란 뜻이었다. 혹은 이를 마족의 고대어 살라브 식으로 번역하자면 ‘독존극’ 혹은 ‘촌극의 주역’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혹자는 게르나의 고어인 ‘아릿카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765호 둥지의 누자베스.’

    레오란드는 길게 쭉 뻗은 복도를 걸으며 오늘 나눴던 신임 하이브 마인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아의 형성이 상당히 빨랐던 탓에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개체였다.

    거기에 초기 지원금을 모조리 사용해 코볼트 10마리를 고용했고, 성체 부화에서 어째선지 인간 소년의 형태를 취했다.

    모든 것이 엉터리였고, 모든 판단이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모든 언행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은 아직까지 레오란드의 허용 범위 안이었다. 어느 정도 상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단 말이다.

    지금껏 하이브 마인드 감찰관으로 일해 온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변칙적인 생물체인지는 레오란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누자베스와 나눴던 짧은 대화는 레오란드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불에 달군 쇳덩이로 지진 것처럼 선명했다.

    “아리카 섬의 점령.”

    그 말을 중얼거린 것만으로도 몸에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아리카 섬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족들이 희생됐는가? 이제는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 덕분에 대규모 병력의 출진은 더 이상 없었지만.

    마왕 아일라드에게 아리카 섬은 여전히 애증의 대상이었다. 혹은 계륵이기도 했고 말이다.

    ‘이 해상 요새를 온전히 손에 넣는다라…….’

    아리카 섬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외부에서 공세를 펼치기 어려운 구조였다.

    게다가 인간들이 최초로 점령한 바체트 령.

    이 만큼 방위 시설과 병력 주둔 시설이 발달한 섬도 없었다. 한 번 손에 넣으면 어지간해선 점령당할 리 없는 요새 그 자체였다.

    물론 지금도 아리카 섬을 손에 넣기 위해 하이브 마인드를 뿌리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지원은 기대하기 힘든 곳이다.

    끼익.

    자신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레오란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오늘은 대금 지급일입니다, 감찰관 나리.”

    에르바키나 연맹의 상인 코쿠라가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군요. 그런데 군수품 대금을 받으러 코쿠라 공이 직접 올 필요가 있습니까?”

    “전에도 말했잖습니까.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가만히 있으려니 밑에 애들 보기 눈치 보여서 직접 다닌다고.”

    “피차 고생이 많군요.”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감찰관 나리 얼굴도 보고 재미난 얘기도 들으며 시간이나 때우는 거죠.”

    코쿠라의 뒤편에 서있던 여인이 대여섯 개 정도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레오란드에게 건넸다.

    레오란드는 양피지를 자신의 책상에 놓고 말했다.

    “오늘 내로 결제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재밌는 얘기가 없습니까?”

    “코쿠라 공은 나를 감찰관이 아니라 이야기꾼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있잖습니까? 전에 얘기했던 그 기묘한 하이브 마인드.”

    레오란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코쿠라 공은 아리카 섬을 마왕 폐하의 군세가 다시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음?”

    코쿠라는 파이프에 담뱃잎을 채워 넣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꽤나 황당무계한 질문이다.

    “감찰관 나리.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겁니까?”

    “반반입니다.”

    “크하핫! 반씩이나 진담입니까? 감찰관 나리와 내가 이 지긋지긋한 촌구석에서 출세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다는 말씀이십죠.”

    코쿠라는 어깨가 들썩일 만큼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시키고, 담뱃잎을 채워 넣으며 대답했다.

    “보자…… 아리카 섬이라면 영주 갈라우드가 전권을 쥐고 있는 섬이고. 아리카 섬에는 마왕 폐하의 군세가 관여하지 않으니 그 상대는 하이브 마인드의 군세일 진데.”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대결 구도가 그려졌다.

    현재 아리카 섬에서 영주 갈라우드와 대립할 수 있는 유일한 하이브 마인드는…….

    “카타쿨라와 갈라우드의 승부가 되겠군요.”

    “승산은 없다고 생각합니까?”

    “예.”

    코쿠라는 잔인할 만큼 바로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고려할 여지도 없다는 듯 말이다.

    “가장 큰 군세를 거느린 카타쿨라라 할지라도 고작해야 아리카 섬의 남동부 숲을 차지한 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영주인 갈라우드 역시 하이브 마인드 ‘카타쿨라’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장 토벌에 나서지 않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카타쿨라가 더 이상 성장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숲 밖으로 영역을 확장하려 하는 순간이 끝입니다. 갈라우드가 수성전 태세를 갖추고 원군을 불러온다면 승산 따윈 없습니다.”

    “역시 코쿠라 공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솔직히 좀 당혹스럽습니다.”

    레오란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양피지를 펼치며 업무를 시작하려던 찰나.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릿카사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사관생도 시절에 게르나 고어를 조금 배웠는데, 갑자기 떠올리려니 생각이 안 나는군요.”

    “아릿카사.”

    코쿠라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같은 장사치들도 흔히 쓰는 말이죠. 데이나? 아릿카사가 무슨 뜻인지 알겠나?”

    코쿠라가 뒤편의 여성에게 묻자, 여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대체재가 없는 상품을 뜻합니다.”

    “그래. 쉽게 말해서 에픽이지!”

    그제야 레오란드도 뒤늦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765호에게 딱 맞는 이름이군.’

    상품의 질은 어떨지 차차 확인해 봐야겠지만.

    현재까진 대체재가 없는 희귀종이란 사실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둥지 밑으로 갱도를 파고 또 파는 나날이 이어졌다. 거대한 하수 시설이 있으니 대충 파다보면 언젠가 하수도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 이번 달은 오크가 많이 싸네.”

    “키! 오크 산다! 오크 일한다! 많이 한다! 산다!”

    “오크가 싸면 뭘까요?”

    “키…… 오크가 싸면? 잔뜩 사야 한다!”

    “오답이다! 이런 종족차별주의자 새끼. 넌 오늘부터 코볼트가 아니라 코틀러다. 넌 또 뭘 봐, 코벨스 자식아. 곡괭이질이나 해.”

    “코틀러 궁금하다 정답…….”

    “정답은 ‘여기사가 하프 오크의 엄마가 된다’였습니다.”

    코볼트들의 작업 현장을 감시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어느덧 내가 펼치고 있는 책자는 마물 판매 카탈로그 정월호가 되어 있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게 일과가 되어 있었다.

    “슬기로운 오크를 세 글자로 하면?”

    “키……?”

    “정답은 옼슬이입니다!”

    “키…… 옼슬아 따랑해…….”

    “그럼 ‘네 여자친구 좀 쌔끈한데 나 하룻밤만 빌려줘라’를 오크어로 하면?”

    “카아 빈 모크 타자크 차!”

    “정답이다!”

    가끔 나는 이 세계가 사실 내가 쓴 소설 속이 아니라, 내 소설과 상당히 유사한 별개의 이세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말이다.

    어째선지 코볼트들이 부분적으로 내가 살던 세계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이로써 이 세계가 내가 쓴 소설 속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거지.’

    검증은 이쯤하면 됐다.

    현재의 상황을 다시 검토하자.

    일단은 내 스테이터스부터.

    [이름 : 누자베스]

    [레벨 : 1]

    [클래스 : 하이브 마인드]

    <스테이터스>

    [근력 : 2]

    [민첩 : 2]

    [체력 : 2]

    [마력 : 15]

    [지배력 : 20]

    <정보>

    [진화 진행도 : 0%(1회)]

    [경계도 : 10]

    [위장 친화도 : 30]

    <스킬>

    [전쟁 군주(패시브) -지배 중인 마물의 전투 경험치 20%를 회수합니다.]

    [하급 부화장 생성(액티브) -하급 부화장을 생성합니다.]

    이름이 정해졌고.

    한 번 진화를 거쳤고.

    진화한 덕분에 기본 스테이터스가 살짝 상향되었고.

    위장 친화도가 30포인트 정도 오른 것 외엔 변동 사항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둥지의 정보다.

    내 스테이터스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둥지의 정보도 간략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765호 둥지]

    <둥지 등급> -19급

    <관리자> -765호 둥지의 누자베스

    <챔피언> -없음

    <병력>

    -코볼트(10)

    <시설>

    -마나 정제소(lv.1)

    -코볼트 작업 움막(lv.1)

    <자원 생산>

    -철광(9/h)  -마나석(0.3/h)

    <자원 보유량>

    -철광(8.1k)  -정제된 마나(311)

    ‘하루 종일 땅굴만 파니까 자원이 꽤나 모이는구만.’

    입구를 틀어막은 덕분에 자경단이 들이닥치는 일도 없었고 말이다. 전투 병력을 고용할 돈을 아껴서 모조리 일꾼에 투자했고, 현재까진 상당히 순조로웠다.

    ‘일단은 들킬 일부터가 없으니까. 어지간한 깽판을 치지 않는 이상 갑자기 들이닥치진 않겠지.’

    저장된 자원은 여러모로 사용할 곳이 많다.

    예를 들어 정제된 마나는 둥지 내부의 시설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거나, 둥지 내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데 사용된다.

    철광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상인에게 매각해서 돈으로 바꾸거나, 제련해서 여러 무구나 시설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이제 하급 부화장을 설치할 만큼 마나가 모이긴 했는데…….’

    바로 부화장을 둥지 내부에 설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아껴두는 이유가 있었다.

    ‘재료 수급처와 생산처는 가까울수록 좋지.’

    현재 내 둥지는 재료로 쓸만한 것들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부화장을 만들어도 뭐 넣을 게 없단 말이다.

    ‘하수도를 발견하면 시궁쥐는 잔뜩 있을 테니까.’

    시궁쥐를 부화장에 처넣으면 뭐가 나올지는 나도 모른다. 혹시나 멜빵바지를 입은 쥐새끼가 튀어 나오면 아마도 내가 디즈니에게 저작권 침해로 고소당할 텐데…….

    어쨌거나 이곳 아리카 섬의 지하 수도에 시궁쥐가 잔뜩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손에 넣어야 하는 아티팩트 ‘세글리트의 미혹’을 얻을 수 있는 루트 역시 지하 수도였다.

    ‘지하 수도를 찾아내면 그 다음엔 세글리트가 봉인된 방도 찾아야 되는데…….’

    해야 할 일을 차례차례 정리하던 중.

    카앙!

    곡괭이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야? 어떤 자식이 또 곡괭이 부러뜨렸냐!!”

    “코벨스다…… 코벨스가 그랬다…….”

    “아, 안 부러졌다 곡괭이……!”

    코볼트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방금 전 곡괭이로 내려친 곳이 왠지 이질적이었다.

    “흙 치워봐.”

    그렇게 명령하자 코볼트들이 몰려들어 조심조심 흙과 돌더미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잔해가 치워지며 점점 그 실체가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반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벽돌의 매끈한 표면이 보였다.

    “지하 수도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땅굴 파기 생활에 작별을 고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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