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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4화 (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화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2)

    생각해 봐야 될 문제가 많았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산더미였다.

    애초에 자기가 쓰던 소설 속으로 전이된다는 전개 자체부터가 말이 안 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전부 소설이라면 말이다.

    이딴 말도 안 되는 전개를 쓰는 놈은 살짝 맛이 간 3류 작가임에 틀림없다.

    왜 맛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냥 배고파서 개똥 같은 걸 주워 먹다가 뇌로 회충이 기어 올라간 거겠지. 알게 뭔가? ×발, 내가 곧 뒤지게 생겼는데.

    ‘생각하자, 생각 좀 해보자.’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곳에 전이된 지 며칠이 지났다. 시일이 지나며 점점 잠에 드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 번 자고 일어나면 10시간 정도는 멀쩡히 깨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몸이 움직이지도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다.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보자.

    ‘우선순위는?’

    가장 크고 굵직한 목표부터 우선순위를 정해보자.

    내가 가장 우선해야 되는 중대사는 무엇인가?

    ‘생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제1목표는 내가 쓴 소설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진흙탕을 뒹굴며 오물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어도 죽을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죽어줄 수는 없단 말이다.

    마지막으로 응급실에서 봤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나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 오열하는 두 분의 모습이 겹쳐졌다.

    슬픔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하게도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냉정이 돌아왔다.

    어째선지는 잘 모르겠다. 유물론적 사고의 맹신론자는 아니지만, 내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된 탓이 아닐까?

    ‘제2목표는…….’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생존과 귀환.

    간단명료한 목표가 정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 현실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내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내 능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그 물음이 이어졌고, 객관적인 결과가 도출되었다.

    ‘마왕도 아니고, 마왕군의 간부급도 아니다. 그저 이 바체트 열도에 흩뿌려진 수많은 하이브 마인드 중 하나.’

    잡몹 중의 잡몹.

    아니, 잡몹은 아니지만 그냥 잡몹 우두머리 정도일 뿐이다.

    뭐, 대단하다면 대단한 존재지만 내 소설의 주인공 놈들이 밥 먹듯이 처죽이고 다니는 잡몹이다.

    게다가 새롭게 부화한 하이브 마인드란 말이다. 둥지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방어 설비는 전혀 없다. 병력? 그딴 것도 있을 리가 없다.

    마을의 자경단이 아니라, 식칼 든 어린애 하나만 쳐들어와도 눈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주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지.’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도출해냈다.

    한없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이쪽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하이브 마인드이기 이전에 ‘한주호’라는 작가로서 지니고 있는 이점이다.

    ‘이 세상은 내가 쓴 소설.’

    상당 부분이 내가 만들어낸 설정이다.

    솔직히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이브 마인드라는 설정도 내가 만들기는 했지만, 일부 디테일한 설정까지는 만들어놓지 않았으니까.

    그런 자잘한 설정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내가 쥐고 있는 무기는 확실했다.

    ‘내가 이 세상의 구조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지령서에 적힌 내용으로 유추해낸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오늘이 네르시아력 403년 3월 18일이라는 점.’

    유일한 희망의 빛줄기다!

    솔직히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만세를 부르고 싶었을 정도다. 팔이 있었다면 말이다. 물론 소리칠 입도 없지만. 어쨌거나 그 만큼 감격했다는 의미니까 대충 알아들어 줬으면 좋겠다.

    ‘주인공 류시혁이 전이되는 건 6개월 뒤인 403년 9월 2일.’

    백주월은 404년 2월 말일쯤이다.

    현재 내가 전이된 날짜는 3월 18일.

    첫 번째 주인공인 류시혁은 9월 2일.

    두 번째 주인공 백주월의 경우 내년 2월 말이다.

    가장 위협적인 두 녀석이 이 세계에 오기까지 내게 여유가 있다는 의미다.

    녀석들이 오기 전까지 무사히 살아남아 힘을 비축할 수만 있다면?

    ‘이 세계에 전이되자마자 목을 쳐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주월의 경우 정확한 전이 위치는 알 수 없다.

    대략 어디쯤에서 여정을 시작하는지만 아는 정도다.

    하지만 류시혁은 처음 전이되어 온 마을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마을을 먼저 점령해서 전이되어 오자마자 처리할 수만 있다면, 그럼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덜고 가는 것이다.

    ‘그 두 녀석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6개월 뒤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다!

    이건 굉장한 이점이다.

    거의 회귀한 것만큼의 이점이란 말이다.

    그래, 거의 유사 회귀자 수준의 이점을 지니고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배치된 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지만 지령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시트란테 서도의 5군’이다. 시트란테 서도는 론트라 섬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들의 밀집 지역이다.

    제대로 된 인프라가 갖춰진 것도 아니고, 섬의 방위에 군단급의 상비군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위치한 섬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단 외딴 작은 섬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이러한 지리적 이점까지 알고 있으니 가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전망!

    밝고 희망찬 미래! 리스타트 마물 라이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한주호! 아자아자!

    좋다.

    행복회로 가동은 여기까지다. 충분히 행복했다.

    이제 다시 선명하게 끔찍한 현실을 직시할 때다.

    [765호 둥지의 관리 권한이 개방되었습니다.]

    [성체 부화까지 6일 23시간 58분 남았습니다.]

    [부화장의 격벽이 해제됩니다.]

    그런 메시지가 눈앞에 연달아 떠올랐다.

    ‘이런 부분은 마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게임 시스템창 같은 걸 내 소설에 죽어도 넣어야 된다고 열변을 토해준 박태준 팀장에게 살짝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직관적인 시스템 메시지창 덕분에 상황을 파악하기 한결 쉬웠다.

    내가 박태준 팀장에게 아주 약간의 감사 인사를 되뇌는 동안.

    파드득.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막이 부서져 내렸다.

    [765호 둥지의 관리자 업무를 개시합니다.]

    좋다.

    발버둥을 시작하자.

    * * *

    평감찰관 레오란드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의 주요 업무는 시트란테 서도. 그중에서도 ‘아리카 섬’에 배치된 둥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아리카 섬은 시트란테 서도에 속한 섬들 중에서도 꽤나 큰 편에 속하는 섬이었다.

    물론 큰 편이라고는 해도 서도에 속한 섬이다. 그 크기가 70제곱킬로미터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레오란드는 아리카 섬에 흩뿌려진 28여 개의 하이브 마인드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정식 배치를 받게 된 하이브 마인드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지.’

    레오란드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눈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늘 정식 지령서를 전달한 하이브 마인드에 관한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아가 막 생겨난 게 아니라, 마치 원래부터 자아를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레오란드는 아리카 섬에 배속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하이브 마인드를 만나 왔다. 적어도 최근 3년 동안 만나본 하이브 마인드만 수백 마리는 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게 만드는 하이브 마인드는 처음이었다.

    ‘헬베르카의 혈액을 사용한 특수종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분위기가 너무나 이질적이군. 자아 형성 시기도 상당히 빨랐고.’

    뭐가 다른지 딱 짚어 말할 수는 없다.

    레오란드도 그게 뭔지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근질근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그런 근거 없는 예감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똑똑.

    그때 짧고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레오란드의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인 자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서 우리 감찰관 나리께서 또 깊은 고뇌에 빠지셨나?”

    거대한 풍채를 지닌 중년의 남성이었다.

    자줏빛 피부와 호화로운 의복으로 몸을 감싼 것이 특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코쿠라.’ 바체트 열도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상대로 군수 물품을 유통시키고 있는 ‘에르바키나 연맹’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에르바키나 연맹은 상인들이 연합하여 만들어낸 거대한 상회. 마왕 아일라드 뿐만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8대 마왕들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지닌 집단이었다.

    대륙의 실질적 지배자는 인간들의 왕국도 아니며, 마왕들도 아니라 에르바키나 연맹이란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만큼 말이다.

    어쨌거나 코쿠라은 이곳 시트란테 서도에 배속된 에르바키나 연맹의 일원. 쉽게 말하자면 ‘시트란테 서도 지점장’ 같은 존재였다.

    “아, 코쿠라. 오늘은 대금 지급일도 아닐 텐데 무슨 일입니까?”

    레오란드가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외딴 곳으로 좌천된 동지끼리 차나 한 잔 하며 담화라도 나누면 안 된답니까?”

    코쿠라이 넉살 좋게 대꾸하며 집무실 한편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자, 봅시다. 시트란테 서도까지 밀려난 처지면 감찰관 나리나 본인이나 출세는 물 건너갔는데. 이렇게라도 농땡이 피우는 낙이라도 있어야지요?”

    “꽤나 심심했던 모양입니다. 출셋길 막힌 감찰관 녀석을 놀리러 여기까지 무거운 걸음도 하시고.”

    “피장파장인데 누가 누구를 놀린답니까?”

    레오란드도 피식 웃으며 코쿠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코쿠라는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을 꺼냈다.

    “담소라도 나누러 왔는데, 감찰관 나리 표정을 보니 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코쿠라의 눈이 가늘어졌고, 레오란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새롭게 지령서를 받은 하이브 마인드에 대해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코쿠라는 별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헬베르카의 피를 사용한 하이브 마인드라……. 확실히 흥미가 동하긴 합니다. 마왕 라바노스가 총애하는 마장군 바하무트 역시 헬베르카의 말예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바체트 열도에서 한참 떨어진 먼 서쪽 대륙.

    그 척박한 대지에 군림하고 있는 마왕 라바노스는 강력한 무력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 라바노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군단장 바하무트의 무용담은 이곳 바체트 열도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먼 옛날의 일이지만, 헬베르카 가문은 ‘반 르낙시아 동맹’을 이끌었던 수장.

    그 출중한 능력의 1할이라도 재현할 수 있다면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법했다.

    “따지자면 같은 혈육이군요.”

    “먼 친척 같은 것이겠죠.”

    물론 하이브 마인드는 작위적인 배양을 통해 생성되는 생명체다. 헬베르카의 말예라고 인정해 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코쿠라는 큭큭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도 정신 건강을 위해 큰 기대는 삼가합시다, 감찰관 나리. 하이브 마인드란 것은 본래 곧잘 죽는 놈들이고, 저렴한 맛으로 뿌려놓고 기다리다가 운이 좋으면 아주 드물게 잘 성장하는 것이니까요.”

    레오란드는 그 말에 동의하듯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 섬에 뿌려놓은 하이브 마인드만 수백여 마리가 넘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30마리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하이브 마인드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위태로운 존재들이고 말이다.

    코쿠라는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뿜어내며, 레오란드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는 넉살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누가 압니까? 그 녀석이 잘 커서 감찰관 나리를 벼락출세 시켜줄지.”

    “그런 일이 진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도의 은사자 같은 거물로 자라나길 기대해 봅시다.”

    레오란드도 코쿠라도 뒷맛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복권에 당첨되는 게 확률이 높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두 사람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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