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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3화 (3/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3화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1)

키이이잉.

고막이 찢어질 만큼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끔찍한 두통이 엄습해 왔고, 고맙게도 그 덕분에 흐릿했던 의식이 명확한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마치 전신이 마비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입을 움직이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의식이 점점 돌아오며 몸의 이상을 깨달았다.

일단 눈을 뜨자.

철근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열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이고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눈을 뜨자.

‘여기가 어디야?’

적어도 이곳이 내 방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니, 애초에 일반적인 건물의 천장이 아니다.

암반으로 된 천장에서 거꾸로 솟아난 종유석들이 보였고, 그 끝에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어지간한 악취미를 지닌 졸부가 아닌 이상 집의 인테리어를 이따위로 했을 리 없다.

‘동굴?’

결론이 나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곳은 동굴 속이었으니까!

동굴은 고요했고, 종유석의 끝에 맺힌 물방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하울링 되듯 귀를 간지럽혔다.

최대한 눈알을 굴려 사방을 살펴봤다.

‘3면이 가로막힌 벽. 한쪽만이 뚫려 있군.’

이로써 알 수 있는 건 내가 동굴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저 뚫린 곳만이 출구로 향하는 길이겠지.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서 쓰러져 있는지 알 길은 없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경위를 파악하려 했지만 몸이 녹을 듯한 피로감과 함께 수마가 몰려왔다.

스르륵.

나도 모르게 다시 눈꺼풀이 닫혔고, 다시 의식이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이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몇 번이고 잠시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잠에 빠지길 반복했다. 의식이 있는 잠시의 시간 동안 내가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진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 동굴에는 나밖에 없다는 것.’

다른 사람은커녕 쥐새끼나 박쥐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날벌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건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다.

마치 한없이 동굴에 가까운 형태지만, 실제로 동굴이 아닌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전화를 건 직후 의식을 잃고 이곳으로 끌려왔다는 것.’

마지막 기억이 드디어 돌아왔다.

응급실에 다녀온 후 나는 어찌됐든 꾸역꾸역 원고를 쓰려고 했고, 핸드폰을 확인하다 임수정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게 됐다.

그 직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이 동굴이었단 말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원리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일전에 출판사에 갔을 때 내 핸드폰에 수면 가스가 흘러나오게 개조를 했던 건가? 그게 아니면 오함마가 튀어나와서 뒤통수를 후리게 개조했던가.

……뭐 어쨌든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이곳에 끌려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래도 이건 통조림이 아니지 않나? 원고 작업을 하려면 컴퓨터가 있어야 되는데.’

컴퓨터가 없다면 최소한 책상에 필기구는 지급해줘야 된다. 하지만 이 동굴 내부에는 글을 쓰기 위한 도구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다!

필기구도, 출판사 직원들도 없고, 동물도 벌레도 없단 말이다. 이 동굴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어두컴컴한 풍경과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어쨌거나 이게 그 뭐냐…… 특별재활치료 프로그램인 건 알겠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몸도 움직여주지 않는다.

며칠이고 잠만 줄곧 잤는데 이상하게 배도 고프지 않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머리가 복잡했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미치겠네……. 차라리 몸이라도 좀 움직여주면 출구를 찾아볼 텐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으니 도움을 구할 수도 없다.

아니, 아니지. 애초에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소리쳐봤자 뭐하겠나?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다시 한 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 무료한 동굴 생활에 이변이 생긴 것은 내가 수십 번째 잠에서 깨어난 직후였다.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시커먼 워커화가 보였다.

잠기운을 황급히 떨쳐내며 시선을 위로 올리자,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80은 훌쩍 넘을 듯 훤칠한 녀석이다.

제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듯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고, 그리고…… 귀가 길었다.

엘프?

아니, 이런 동굴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헛된 망상이 많아진 모양이다. 엘프 같은 게 실존할 리 없지 않나?

게다가 엘프가 실존하더라도 눈앞의 청년은 엘프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귀가 긴 아인족이 또 뭐가 있을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청년은 나를 관찰하며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청년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낮췄다.

“설마 벌써 자아가 형성된 건가?”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의식이 있다면 눈을 세 번 깜빡여 보겠습니까?”

청년이 토해내는 언어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발성이나 구조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청년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둘러 눈을 세 번 깜빡였다.

청년은 사뭇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헬베르카의 피를 사용한 게 원인인가? 자아의 형성이 상당히 빠른데…….”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식 지령서를 받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년은 동굴을 유유히 떠났다.

아니, 아니아니. 잠깐. 무슨 말이야?

헬베르카? 정식 지령서? 뭔가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단어들이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은 간지러운 감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젠장, 왜 이렇게 계속 졸린 거야…….’

평소 같았으면 금방 떠올랐을 텐데.

계속해서 머릿속이 탁했다.

* * *

귀가 긴 청년이 다시 찾아온 건 그 뒤로 다섯 번 정도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후였다.

이번에는 두꺼운 책이 아니라, 두루마리를 하나 챙겨왔다. 눈을 뜬 채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청년은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두루마리를 무릎 아래쪽에서 펼쳤다.

“정식 지령서입니다.”

그렇군.

정식 지령서군.

참으로 이해하기 쉬운 설명 고맙다. 내가 주둥이가 벌어졌으면 최대한 성의를 담아 감사의 인사를 해줬을 텐데 말이다.

‘정식 지령서가 뭔데 ×덕 쉑기야…….’

라고 말이다.

뭐.

어쨌든.

어쨌거나, 펼쳐진 두루마리에 적힌 문자열을 쭉 훑어보았다. 역시나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혀 있었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당신은 바체트령 시트란테 서도 5군 765호 둥지(이하 765호 둥지라 칭함)의 관리자(하이브 마인드)로 임명되었습니다.]

[금일 부(네르시아력 301년 삭월 18일)로 765호 둥지의 모든 관리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마왕 총령 11조 3항에 의거하여 둥지의 관리자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가 부여됩니다.]

[765호 둥지는 마계의회의 공명정대한 심사에 따라 5종 임무(후방 교란)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765호 둥지는 감찰관 ‘레오란드’의 정기 감찰 대상입니다.]

[혼돈의 의지가 함께하길.]

지령서의 내용을 모두 읽은 직후.

눈앞이 아찔했다.

지령서에 적힌 내용은 너무나 현실성이 없어서 도저히 나 같은 일반인과 연이 없을 것 같지만.

‘설마 여기, 설마…….’

낯설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고유명사들이 몇 개나 적혀 있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수마가 확 달아날 만큼 충격적이었다.

‘×발…… ×됐네.’

일단 박태준 팀장 그 망할 새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만약 내 가정이 사실이라면…… 내가 ×되는 이유의 9할 이상은 박태준 팀장 때문일 테니까!

* * *

얘기를 시작해 보자.

그래,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되는대로 주절주절 떠들어 보자.

일단 가장 먼저 내가 작업 중이었던 소설인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

이 쌈마이한 타이틀의 소설은 ‘바체트 제도’라는 거대한 열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륙에서는 ‘바체트령’이라고 칭하는 이 열도는 거대한 세 개의 섬과 자잘한 군도로 구성된 지역이다.

‘본래 이 바체트 열도의 주인은 마왕 아일라드.’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에 인간들의 침략이 있었다. 침략이라기보다는 이권 다툼에서 밀려난 일부 왕족이 대륙에서 도망쳐 바체트 열도에 터를 잡은 것이다.

바체트 열도에서 가장 거대한 섬인 ‘론트라 섬’의 동북쪽에 인간들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같은 론트라 섬의 남서쪽에 살던 이웃사촌인 마왕 아일라드가 제대로 야마가 돌아버렸다는 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론트라 섬의 1/4을 뺏긴 것도 화가 날 일인데 인간 놈들은 계속해서 그 수가 늘어났다.

게다가 계속해서 더 많은 영토를 갈구하여 서쪽으로 영지를 확장하려고 했으니, 마왕 아일라드 입장에서도 대환장할 노릇이다.

어쨌든.

그래, 어쨌거나 마왕 아일라드도 눈 뜬 채로 얻어맞기만 하는 호구 놈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건너온 침략자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인간들의 군대가 더 우세하나 싶었지만, 전쟁이 본격화되자 마왕군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 이유는?

매우매우 간단하다.

마왕 아일라드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이브 마인드’라는 군체 의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인간 왕국의 군대는 병력 수급에 시간과 자원이 소요된다.

반면 마왕 아일라드는 바체트 열도에 서식하는 중립 몬스터들을 ‘하이브 마인드’라는 군체 의식을 이용해 통제할 수 있었다.

즉 산이나 들에 서식하는 야생 몬스터들을 모조리 병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각지에 흩뿌려진 하이브 마인드는 스스로 성장하며 둥지를 짓고, 둥지를 강화하고 확장하며 군세를 집결시킨다.

하이브 마인드를 방치한다면 마왕군의 군단장 뺨따구도 후려갈길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 같은 거지.’

그 때문이다.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는 인간들에게 ‘던전’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발견하는 즉시 둥지를 부수고 하이브 마인드를 찢어 죽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을 끝마친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만큼 견고한 성채가 된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둥지는 인간들의 군대조차 감히 공략할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그리고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는…….

이세계에서 넘어온 용사 류시혁과 백주월.

이 또라이 같은 사이코패스 먼치킨 두 놈이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를 쳐부수고 다니는 내용이었다.

왕국군도 혀를 내두를 만큼 성장한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를 죄다 쳐부수고! 불 지르고! 다 깨부수고! 심지어 죄 없고 가엾은 하이브 마인드까지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는 것이!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의 주된 내용이었단 말이다.

‘하…….’

눈물이 찔끔 난다.

나 스스로가 내가 쓰던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되다니. 그것도 주인공도 아니다. 아니, 주인공이 아니면 조연으로 해주던가. 조연도 안 되면 선량한 마을 주민 뭐 그딴 걸로 해주던가!

악역이면 최소한 마왕을 시켜주는 게 상도덕 아닌가?

‘하이브 마인드는 좀 심하잖아…….’

그것도 그냥 하이브 마인드도 아니고, 이제 막 눈을 뜬 신생아란 말이다.

내가 창조해낸 최악의 괴물 두 놈이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마을 자경단에 의해 토벌될 수준이었다.

‘집에 보내줘 미친놈들아.’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물이 난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손발도 없어서 딱히 떨리고 그러진 않는다. 그냥 그렇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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