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1)
‘예? 미소녀 편집자요? 하핫, 작가님 저희 매니지먼트는 완전 남탕인데 미소녀 편집자가 어딨습니까? 개소리…… 아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다음 원고나 빨리 주세요.’
기억났다.
완전히 기억났다.
물방울이 천천히 맺혀 떨어지는 종유석을 몇 시간 동안이나 멍하니 올려다보던 찰나.
늪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가님, 본업이 작가이신 만큼 연재를 하시지 않으면 수입도 없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리스타트 플레이어 정산금이요? 저기요, 아저씨…… 아니 작가님. 솔직히 그거 완전 폭망에 적자입니다, 적자! 오히려 저희가 손해배상 청구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세요.’
‘일단 좀 아무거나 쓰면 안 됩니까? 저번 작품 완결내고 도대체 몇 달째인지는 아십니까?’
‘원고 더 가져와. 아니, 아니지…… 원고 다 가져와.’
‘똑바로 서라, 작가. 어째서 다음 원고를 보내지 않았지?’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늘부터 작가님하고 같이 일하게 된 기획자 임수정입니다! 예? 여자냐구요? 미소녀요? 작가님, 그런 것보다 저희가 이번에 슬럼프에 빠지신 작가님들을 대상으로…….’
기억이 나버렸다!
박태준 팀장, 그 빌어먹을 자식의 면상부터 목소리까지 모조리 말이다. 게다가 내게 걸려왔던 그 수상한 전화!
한 번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나머지 파편들도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고, 이윽고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까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거 엿됐네…….”
어쨌든 지금 내가…….
아차, 그 전에 말해둬야만 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만약 내 소설을 기대하고 들어온 독자가 있다면.
나는 정확한 사실을 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작가로서 써내려간 소설이 아니라, 아마도 선명한 지옥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을 기록한 수기가 될 터였으니까.
그런 논픽션의 수기라도 괜찮다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담담하게, 허심탄회하게, 일체의 미화나 필터링 없이.
나 한주호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 * *
타닥타닥. 탁.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에 흐리멍덩한 의식이 환기됐다. 시선을 돌려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저녁 7시였다.
오늘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더니 시간 감각까지 꽤 흐릿해졌다.
“끄으으으!! 도대체 이게 몇 시간째냐…….”
잔뜩 뭉친 어깨를 풀어주듯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이제 고작 한 편 썼는데.”
너무 오래돼서 색감이 누릿해진 모니터에는 어제부터 쭉 써온 신작 소설의 도입부가 떠올라 있었다.
스크롤을 쭉 올리자 문서의 최상단에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라는 제목이 보였다.
‘언제 봐도 이 쌈마이한 제목은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제부터 오늘까지 쓴 원고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설의 골조 자체는 간단한 편이었다.
평범한 현대인인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트럭에 치였나 싶더니 중세 판타지풍의 이세계에 떨어지게 되고, 전이될 때 얻은 사기 능력으로 이세계의 던전을 모조리 박멸한다는 플롯이다.
작년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무려 반년 동안이나 이 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아직도 80편밖에 원고가 나오지 않았다.
‘이 페이스대로 쓰면 진짜 올해도 신작 연재 못하는 거 아냐?’
내가 웹소설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4년이나 됐지만 이번 슬럼프는 꽤나 심각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 슬럼프의 원인이 뭔지 아주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웹소설 작가가 된 지 4년이 지나고, 다섯 질의 소설을 완결 냈지만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는 3류 작가. 그렇기에 이번 차기작은 CK북스의 팀장 박태준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여 트렌드에 맞춘 소설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사심은 일절 없이 오로지 돈을 쓸어 담겠다는 일념으로 시장이 원하는 니즈만 액기스로 담아 팔겠다!! 라고 호기롭게 시작한 건 좋았지만.
그게 지금 슬럼프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작가님. 주인공이 처음부터 던전 공략에 실패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여기선 좀 더 팍팍 주인공을 밀어줍시다!’
‘이세계 전이할 때 받은 능력이 너무 약한데요……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지만 어떤 적이든 일격에 죽일 수 있는 필살기 하나 넣죠!’
‘아, 새로운 무기를 얻는 에피소드 좋습니다. 좋은데, 무기 성능이 좀 애매하네요. 그냥 화끈하게 신이 쓰던 전설의 무구라고 해버립시다. 괜찮아요, 다들 이 정도는 밀어줍니다.’
‘전투에서 고전하다가 이기는 건 너무 낡았습니다. 그냥 화끈하게 쓸어버립시다! 아니면 사실은 그냥 다 쓸어버릴 수 있는데 간을 보기 위해 져주는 척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가던가요.’
도대체 박태준 팀장이 생각하는 ‘평범한 일반인’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내 소설의 주인공 류시혁은 운발 만땅, 그리고 무력의 정점을 찍은 먼치킨이 되어버렸고.
‘히로인이 너무 기가 센데요? 좀 더 순종적이고 귀여운 이미지로 가죠, 작가님! 안 그러면 호불호가 갈려서…….’
‘히로인은 다섯 명 정도로요! 주인공에겐 절대복종! 뭔가 숨기는 일이 있거나, 배신할 것 같은 느낌조차 들면 안 됩니다. 주인공보단 약하지만 그래도 세계관에선 강자에 속하는 편이라야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묘사하죠.’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매달리는 전개 안 됩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쿨하게!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일관하지만, 여자 쪽에서 안달 나서 매달리는 느낌으로 부탁드립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 소설 주인공인 류시혁은 진짜 평범한 놈이었단 말이다. 무슨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여자들이 꼬일 리가 없었지만.
‘예? 작가님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그냥 주인공을 절세의 꽃미남으로 만들어요. 아, 답답하네 진짜……. 아 작가님 저 미팅 나가야 돼서 있다가 다시 연락하죠.’
이게 내 신작의 주인공 류시혁이 절세의 꽃미남이 된 이유다.
게다가 도저히 현대의 일반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냉철한 판단력과 폰 노이만의 뺨따구를 후려갈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지능!
악당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수작을 부리든 이미 나흘 전부터 알아차리고 역습을 계획하는 말도 안 되는 사이다 머신이 되었다!
그래. 좋다.
좋다 이거다.
잘생기고 유능하고 싸움 잘하고, 머리도 좋고 운발도 쩔어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여자를 하나씩 허리에 끼고 다니면서도 도덕성에서 전혀 결함이 없는 주인공을 과연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좋다.
문제는 나한테 있었다.
이런 완전무결한 주인공으로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사건이 필요하고, 갈등이 일어나야 한다. 그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겹쳐져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 새낀 숨만 내쉬어도 갈등 구조가 태풍에 휩쓸린 개미처럼 날아가 버리니까.”
내가 쓴 원고를 다시 읽어보자 한숨이 토해졌다.
원고를 쓰다 너무 괴로워서 60편쯤부터 서브 주인공이 하나 더 등장하게 된다.
본래의 주인공 류시혁과는 다른 루트로 여행을 하는 캐릭터를 넣어서 어떻게든 원고 편수를 늘려보려고 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용사.
류시혁과 마찬가지로 현대에서 이세계로 전이된 녀석이다. 어찌 보면 주인공 류시혁의 라이벌 격인 캐릭터인데.
이 녀석, ‘백주월’ 역시 박태준 팀장의 칼질을 당해 본래 기획과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예? 당연히 잘생기면 안 되죠. 주인공은 엄연히 류시혁인데. 에이씨, 그럼 그냥 남자치고는 곱상하게 생겼다고 해요. 잘생긴 거 말고, 곱상한 걸로요.’
‘라이벌 같은 거 넣지 마세요. 주인공은 독보적이어야 되니까. 꼭 넣어야겠다면 그냥 나쁜 놈으로 만들죠. 같은 용사이긴 한데 아주 쓰레기 같은 놈으로 만드는 겁니다.’
‘대충 뭐 호색한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캐릭터? 성격파탄자! 인성질! 사이코패스로 만들어 버리세요.’
‘예? 작가님 뭐라구요? 예. 예, 아 몰라요. 대충 써요. 예, 예. 백주월요 예. 예 그냥 겁나게 센 예쁘게 생긴 미친 또라이 자식이라고 해버리죠.’
……내가 서브 주인공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최종 보스도 울고 갈 만큼 끝장난 악당을 만들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마침 오늘 쓴 원고도 백주월이 마족들의 머리와 몸통을 모조리 분리한 뒤에, 사례금을 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까지 모조리 마족들과 똑같은 모양새로 만들어 버리는 신(scene)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이런 정신병자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창작 캐릭터라는 것뿐이겠지…….’
어쨌거나 지금까지 나열된 이유만으로도 내 원고 작업의 속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다음 전개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나오는 건 끔찍한 수준의 내용들뿐이다.
이미 원고 마감 기한이 이틀이나 지났지만, 100편은커녕 80편밖에 나오지 않았단 말이다.
박태준 팀장도 이제는 거의 포기했는지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물론 내가 마감을 제대로 안 지키고 있는 것부터 문제니까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내가 진짜 이 소설을 완결까지 쓸 수나 있을까…….”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토해냈다.
슬슬 생활비도 빠듯해지기 시작했다.
박태준 팀장의 말대로 전업 작가인 만큼 소설을 쓰지 않으면 수입도 없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전개가 해묵은 변비처럼 꽉 막혀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다음 전개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휴. 밥이나 먹자. 밥부터 먹고 생각해 보자.”
라면이 남아 있을까, 하고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향하려 한 순간.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혹시나 슬슬 기다리다 못해 폭발한 박태준 팀장일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빠르게 계획을 세우며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잖아?’
의아해 하면서도 일단은 수신 버튼을 누르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CK북스의 기획자 임수정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CK북스라고? 그런데 왜 박태준 팀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연락해 오는 거지?’
그런 의문이 떠오른 것도 잠시.
-오늘부터 제가 작가님을 담당하게 돼서 인사라도 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저기,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원래 제 담당은 박태준 팀장이었는데.”
-아! 예, 그랬었는데 오늘부터 제가 맡게 됐습니다.
“왜요?”
내가 그렇게 묻자, 자신을 CK북스의 기획자라고 소개한 여성. 그러니까 임수정 씨가 잠시 어색한 침묵을 깨듯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게…… 작가님은 오늘부로 ‘특별관리대상’이 되셨거든요…….
“염병…….”
-아! 딱히 이상하거나 안 좋은 게 아니니까 너무 불쾌해하지 마세요! 한 작가님만 그런 게 아니라, 슬럼프로 작업에 지장이 생기신 작가님들이 꽤 많으니까요.
“그래서 그 특별관리대상이란 건 또 뭡니까?”
-특별관리대상이라고 해서 많이 당황하셨죠, 작가님?
“……아니, 꼭 여기서 그렇게 조선족 관련 드립으로 불안감을 조성해야겠습니까?”
CK북스의 기획자인 척하면서 작가들을 납치해 장기를 밀매하거나, 탕수육으로 만들 것 같지 않나?
무슨 샤×닝 로드도 아니고…….
‘어? 이 작가 새끼 웃고 있는데요?’
‘왜, 아까는 울고 있었다며?’
‘아까는 울고 있었는데 지금은 웃고 있습니다.’
‘냅둬. 코코아페이퍼 랭킹 1위하는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지.’
이런 전개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분명 베댓도 형님 이 작가 새끼…… 아니, 아니다.
아차! 이건 실언! 실언이다. 샤이× 로드 관련 얘기는 잊어주길 바란다.
-특별관리대상이라고 해도 사실 작가님께 불이익을 드리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슬럼프를 겪고 계신 작가님들의 재활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이건…….
그래, 이건 4년 간 축적된 작가로서의 경험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진한 냄새. 이 냄새는 바로…….
‘통조림방이다……!’
통조림의 냄새가 났다.
덤으로 군만두 냄새까지 말이다.
다이소에서 산 장도리를 어디에 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