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최종장 (7) [完]
장현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곧 마계에 새로운 마왕이 즉위할 것입니다. 그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지금부터 마계에 대한 일입니다. 방금 얘기한 새로운 마왕은 안젤라입니다. 제가 그녀를 지지하고, 아르헨과도 의견의 일치를 봤습니다. 우리 인류 플레이어들은 그녀를 지지하고자 합니다. 이의가 있는 분들은 말씀하세요. 지금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장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문이 날아왔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한 순간부터, 그들에게 있어 마계의 마왕이 누가될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마왕이 될 자는 정해져 있었고, 실세 또한 장현이다.
그러니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모두가 고향으로 간다니, 그럼 여기에서 일구었던 왕국과 사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우리가 마계로 오게 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가기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미 여기에서 다른 이와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습니다.”
탕! 탕! 탕!
그때 아르헨이 책상을 두들겼다.
“여러분! 이렇게 한꺼번에 물으면 장현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한 사람씩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질문할 사람을 한 명씩 선정할 테니 순서대로 물어보십시오. 같은 질문은 중복으로 받지 않을 테니, 앞선 질문으로 대답이 충족되면 이후 질문 예정자는 취소해 주세요.”
아르헨의 말은 위엄이 있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현은 아르헨이 나서서 정리를 해준 것이 고마웠다.
그에게 눈짓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거기 당신부터 질문하시죠.”
아르헨이 지명한 자는 처음에 질문을 한 사람이었다.
“저는 킹덤에서 전기지네차 배터리 사업을 하고 있던 이차전지 왕국의 이전지입니다. 저는 마계에서 이미 왕국도 일궜고, 사업도 정상 궤도에 올랐습니다. 현재차에 전기지네차 배터리를 납품하는 성과도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저에게는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희 이차전지 왕국에는 저와 같은 상황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경우 여기에 남을 수 있는지,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김전지의 말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나중에 돌아가서 자신의 세력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많은 이들의 질문에 부딪힐 것이다. 설령 본인은 돌아가고자 하더라도, 남을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업체나 왕국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로 대체해야겠죠. 이미 드워프나 리자드맨, 크로커다일 종족들은 우리들과 사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계에 남을 분들은 그들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을 각자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는 것입니다.”
장현이 이전지의 질문에 답했다. 그러자 이전지가 곧장 추가 질문을 이었다.
“안전은 보장해줄 수 있나요?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돌아가고 나면 남은 자들의 안전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기에 안젤라가 마왕이 되고 내가 그 곁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안전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장현의 말에 이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장현 님.”
그는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르헨은 곧 다음 사람을 지명했고, 그렇게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안젤라의 마왕 즉위식 일정까지 잡혔다.
“후우, 지치는군.”
장현은 회의실을 나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현, 수고 많았어.”
김덕배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장현의 말은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덕배야, 식당 가서 맥주나 한잔하자.”
“그래.”
장현은 밖에서 기다리던 최형석에게도 함께 맥주를 마시자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을 흔쾌히 반겼다.
“맥주 좋지요. 그렇잖아도 안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헬릭스 성에서 아슬란 사장이 챙겨주더라고요. 오늘 제대로 먹어보겠군요. 그런데 형님, 많이 피곤해보이십니다.”
“그래. 회의가 전투보다 더 피곤하네. 이나연과 이성훈, 김태석도 불러. 그들에게도 회의 내용을 전해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후 최형석의 연락을 받은 이나연, 이성훈, 김태석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식당에서 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있는 최형석을 보고는 놀랐다.
그의 곁에는 맥주가 담긴 오크통이 열 통이나 쌓여있었다.
“이게 다 뭐야. 오늘 파티하는 거야?”
이나연이 웃으며 물었다.
“파티라고 할 것까지야. 그냥 뒷풀이라고나 할까. 오늘 회의 결과도 알려줄 겸 한잔하자고 불렀어.”
장현의 말에 이나연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킹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모였던데, 무슨 일이야?”
장현은 일행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와 안젤라의 마왕 즉위식에 대해서 얘기했다.
안젤라의 마왕 즉위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던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는 다들 크게 흥분했다.
“정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것도 원하는 때를 선택해서?”
이나연이 감격에 차 물었다.
그녀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마계에 와서도 계속해서 한 일은 약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집단 전투 전술을 공부하고 훈련시킨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그동안 이나연은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를 탓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이 마계를 떠나 원래의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항상 꿈꾸고 있었다.
“그래.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장현.”
이나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이윽고 장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장현은 잠시 이나연의 돌발 행동에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그녀를 토닥였다.
잠시 후 이나연은 눈가에 눈물을 닦더니 멋쩍은 듯 웃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주책없었지.”
“아니야.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자, 즐거운 날인만큼 술이랑 음식 먹으면서 쉬자고.”
장현은 이내 눈을 돌리다 이성훈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성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성훈까지 울고 있잖아. 오늘 이거, 축하하려고 불렀는데 다들 울기만 하니 어쩌나.”
“죄송합니다, 장현 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그치질 않네요. 함께 왔던 직장 동료분들은 모두 죽고 혼자서만 살아서 돌아간다는 생각에 그만. 죄송합니다.”
이성훈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니야. 모두 같은 마음이야. 이성훈 씨, 그동안 수고 많았어.”
장현은 그를 토닥이며 잔에 맥주를 부어주었다.
김덕배는 기뻐하는 이나연과 이성훈을 보며 착잡해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나연과 이성훈은 정규직 공무원이다.
이나연은 경찰, 이성훈은 지방직.
반면 김덕배 자신은 임기제 공무원이었다.
기간제 또는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직종이다.
혹시 계약 연장이 안 되지는 않을지, 또는 언제 잘리지는 않을지 몰라서 불안한 신세였다.
그렇다고 가진 재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집 살 돈은커녕, 원룸에서 월세로 살고 있었다.
‘그런 생활로 돌아가라고? 절대, 네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현재 자신은 네오디움 왕국의 국왕이다.
비록 실세는 장현이고 자신은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차피 장현은 마계의 실세나 마찬가지.
마왕도 그의 연인인 안젤라가 될 예정이니, 네오디움 왕국쯤이야 사실 장현에게는 별로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진짜 국왕이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공무원과 마계 한 지역의 국왕.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고 했을 때,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고향에 부모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과연 돌아간다 하더라도 딱히 반길까 싶었다.
잠시는 반기겠지만 곧 먹고 사는 일에 부딪힐 것이다.
예전에 프로게이머를 지망한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부딪혔던가.
잔소리와 신경 긁어대는 남과의 비교질에, 집에서 나와서 하루 종일 PC방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 뒤에 포기하고 나름 공부해서 비정규직 공무원이 되었지만, 그 후에는 정규직이 되라고 잔소리를 이어갔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기란 쉽지가 않았다.
무기계약직을 노려볼 만도 했지만, 그 또한 구청장이나 국회의원 정도의 인맥은 있어야 부탁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김덕배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의 고향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무림으로 간다면 나을지도 모르겠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장현, 혹시 고향 말고 다른 세계로 갈 수도 있을까? 무림 같은 곳 말이야.”
“무림도 가능해. 구체적인 시기를 설정하는 게 문제겠지만 마현 사부가 있으니 마현 사부가 몇 살 때라든지, 염라문 몇 대 선조 시기 등으로 생각하면 될 거야.”
“그게 가능하단 말이지.”
김덕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무공은 무림으로 가면 인정받을 것이 분명했다.
지구에서는 쓸모없는 능력이지만, 무림에서는 아니었다.
마계에 남아 네오디움 왕국의 국왕 자리에 있는 것과 무림으로 가서 절대강자가 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그의 눈에 이나연이 들어왔다.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런 김덕배의 반응을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나연이었다.
김덕배가 자신을 보고서 안 좋은 표정을 하자 걱정이 된 것이었다.
“덕배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 있는 사람처럼 표정이 안 좋아. 고향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거야?”
이나연은 그간 김덕배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이 생각났던 것이다.
반면 김덕배는 그녀를 친한 누나 이상으로 생각했다.
항상 어려운 사람을 돌보던 그녀에게 진심으로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그동안은 표현할 여지도 없었지만. 스스로 강해지기도 했고, 함께 네오디움 왕국을 지금처럼 이끌어 가길 원했다.
“나연 누나와 이성훈 주무관이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하네.”
그 말에 이나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덕배 넌 여기 남으려고?”
“난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좋을 거 같지도 않아. 마땅히 할 일도 없을 텐데, 뭐. 나 계약직이잖아. 집도 없고 돈도 없어. 반면 여기서는 국왕이고, 무림으로 가면 마현 사부의 전승자이지.”
이나연은 김덕배의 말에서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의 동생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언니는 경찰 공무원 시험에 붙었으니까 내 마음 몰라. 나 같은 공시생은 학원비도 없어서 알바하는데, 이제 알바 자리도 구하기 힘들어. 집값은 계속해서 오르고 난 모아둔 돈도 없어. 누가 나랑 결혼을 하려 하겠어.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직장이나 집안 본단 말이야.’
이나연은 동생과 덕배의 모습이 엇갈려 보였다.
김덕배는 얼굴을 숙이고 있어 더 이상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이나연은 김덕배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말했다.
“어휴, 덕배야. 지금 네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인지 왜 너 자신은 모르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건 네오디움의 국왕이니 염라문의 전승자니 하는 게 아니야. 넌 이깟 국왕 자리가 없어도, 재산이나 직업이 없어도, 너 자신 자체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너 인자강이라고 들어봤어? 인간 자체가 강하다는 말이야. 바로 널 두고 하는 말이야. 처음 튜토리얼에 왔을 때와 비교해 지금의 네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는구나. 넌 이미 일국을 경영했고 많은 사업을 벌였어. 심지어 사람을 다루고 지휘하는 경험까지 했단 말이야. 개인의 능력은 또 어때. 지금 너의 무력을 버텨낼 사람이 지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KFC 종합격투기 헤비급 챔피언도 너한테는 한방에 쓰러질 거야.”
“…….”
“그깟 공무원 안 하면 어때. 넌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격투기 선수를 해도 되고, 축구 선수나 야구선수를 해도 되겠지. 지금 너의 육체적 능력으로 못할 게 뭐가 있겠어. 프로게이머로도 성공할 걸? 뭐 네가 여기에 남거나 무림으로 간다는 결정을 내려도, 난 그것도 존중해줄 수 있지만 말이야.”
이나연이 헤드락을 풀고서 위로하듯 해준 얘기에 그는 감동받았다.
김덕배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누나. 나, 누나 좋아해. 아니 사랑해.”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김덕배의 뜬금없는 고백에 주위 동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나연도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덕배야. 뭐라는 거야. 이 자식아. 누나가 아무거나 할 수 있다고 해줬더니, 지금 누날 가지고 장난치는 거지?”
“아니야, 누나. 난 그동안 정말 찐따 같이 살았어. 그런 내가 변하게 된 건 누나를 만나게 되면서야. 겁이 많던 내게, 최형석 같은 무서운 남자한테 덤비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던 누나의 모습은 영웅이나 다름없었어. 누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동안 나도 이런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이제야 내 마음을 제대로 알게 됐어. 그래서 이렇게 고백이란 걸 하게 된 거야.”
“아, 이런. 맙소사.”
이나연은 그저 ‘아, 이런, 맙소사.’ 소리만 반복했다.
그때 최형석이 소리쳤다.
“야! 내가 뭘 어쨌다고 무서운 사람이래. 나같이 마음씨 따뜻한 사람이 어딨다고. 이 자식이 그동안 좋게 봐줬더니.”
“야. 최형석. 눈치 좀 살펴라. 지금 그런 얘길 할 때냐.”
장현이 최형석의 옆구리를 치면서 눈총을 줬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밖으로 조용히 나가자는 뜻이었다.
장현의 손짓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나도 마침 화장실이 가고 싶었어.”
“난 졸린다. 자러 갈래.”
다들 한마디씩을 남기고 떠났다.
장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나연의 반응을 슬쩍 보고서 밖으로 나갔다.
‘과연 저 둘은 어찌 될까.’
사실 지금의 김덕배는 어디에 내세워도 부족하지 않은 남자였다.
다만 이나연은 외적인 것에 그리 연연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옆에서 잘 챙겨주고 다정한 사람을 더 좋아할 거 같은데.
덕배가 그런 성격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다른 동료들이 나가고 난 뒤, 한참을 망설이던 이나연의 입이 열렸다.
“덕배야. 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리고 남자로서도 멋지다고 생각해. 누구나 다 그렇게 용기를 내고 다짐하면서 변하지는 않거든.”
이나연의 말에 덕배는 기뻤다가 조금 가라앉았다. 말이 길어지는 것이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사실 날 좋아한다니까 고맙고 좋기는 한데…….”
뜸을 들이는 말에, 김덕배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건 거절할 때 나오는 멘트였다.
‘역시 거절이구나.’
고개를 떨구며 체념하는 김덕배의 귀에 이나연의 말이 들려왔다.
“그, 지금은 좀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운 마음뿐이거든. 내게 생각할 시간을 좀 줄래?”
번쩍.
김덕배는 고개를 쳐들고 이나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 물론이지, 누나. 천천히 생각해.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얘기했잖아.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지.”
“응, 그래. 나 먼저 일어나볼게.”
이나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떠났다.
밖으로 나갔던 일행들은 이나연이 나오자 딴청을 부리듯 어물쩍 거리더니, 곧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김덕배를 향해 달려갔다.
“언제부터였어, 자식아. 이나연을 좋아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장현이 김덕배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근데 뭐래? 차인 거야?”
“아직 차인 건 아냐. 나연 누나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장현의 놀리듯이 하는 말에 김덕배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때 최형석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인마, 좋으면 바로 승낙했지. 뭘 생각해본다고 하겠어. 그냥 돌려서 거절한 거야.”
“윽.”
김덕배는 최형석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겨우 마음을 털어놨는데, 역시 실수한 건가.’
상심한 김덕배에게 장현이 말을 건넸다.
“조금씩 썸 타는 상황이 있었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긴 했어. 이나연은 그동안 널 그냥 친한 동생으로만 대했을 거 아니야.”
“그렇긴 해. 그런데 누나가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조급해졌어.”
김덕배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야야, 술이나 한잔 마셔. 뭐 여자가 이나연밖에 없냐? 넌 여기 남거나 무림으로 갈 거라며? 그럼 어차피 이나연이랑은 잘될 수가 없잖아.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던데.”
“하긴. 나연 누나랑 잘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지.”
장현은 김덕배의 말에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나연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넌 어쩔 거야?”
“글쎄. 모르겠어.”
“이나연 입장에서 생각해봐. 넌 여기 남으려고 하는데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 설령 너한테 마음이 있더라도 고민될 거 아니야. 갑자기 너 때문에 여기 남을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싫다는 너한테 한국으로 가자고 할 수도 없을 테고.”
“아, 그렇구나.”
김덕배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생각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장현이 그에게 말했다.
“뭐, 잘 생각해봐. 아니, 그전에 이나연이 뭐라고 대답할지가 우선인가. 여튼 난 너희 두 사람이 잘되길 빈다.”
장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의 찌질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어느새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
그 이후 시간이 꽤 흘렀고, 마침내 안젤라의 마왕 즉위식이 열렸다.
마계 전역의 성주들과 사업가들이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마르바스 성으로 몰려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 심각했기에 즉위식에 참석할 자들은 사전에 신청을 하고 백신을 접종 받아야 했다.
그동안 장현은 마족을 위한 백신 제작에 집중했다.
마르바스와 캄온 연구소를 오가며 노력한 끝에, 약속했던 성주들에게 줄 백신 물량을 모두 맞출 수 있었다.
더불어 전 마계에 안젤라 마왕의 이름으로 백신과 마스크를 대대적으로 뿌렸다.
그 결과, 마계에는 안젤라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마족들이 점점 늘어갔다.
마왕 즉위식이 거행되고, 안젤라는 공식적으로 마계의 마왕이 되었다.
***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장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안젤라, 이제 드디어 우리도 여행을 갈 때가 되었어.”
“여행? 어디로?”
“얼마 전에 대규모로 플레이어들을 고향으로 보낸 뒤 한동안 패드를 충전했잖아. 이제 다시 패드가 충전 완료되었어. 이제 마계 전역을 돌아다닐 수도 있고, 다른 세계로 가볼 수도 있어.”
“그런데 시공간 이동은 한 번밖에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시공간은 한 번이지만, 공간만 이동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해. 그러니 지구든 무림이든 마법 세계든 헌터 세계든 다 갈 수 있어.”
“정말? 그럼 순서대로 다 가자.”
“그럼 지구부터 가볼까?”
“좋아! 그럼 당장 마왕 자리부터 위임하러 가자.”
안젤라가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그 뒤를 장현이 미소 지으며 따랐다.
(끝.)
작가의 말.
그동안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차기작은 더욱 재밌는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어쩌다 이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