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최종장 (5)
장현은 최형석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바로 그래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냥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길 원하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지. 무엇보다 나 또한 여기서 안젤라와 함께 남을 생각이다. 그래서 사업을 벌이고 지구의 문명을 이식하려는 거야. 특히 대한민국을 그대로 옮겨오고 싶은 게 내 바람이야.”
“형님이 안 돌아가고 남으신다고요?”
최형석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물었다.
“뭘 놀라고 그래, 나도 너와 마찬가지다.”
“네?”
“고향으로 돌아가도 내가 과연 예전과 같은 직장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엔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 과연,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최형석은 장현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조폭 두목이었지만 장현은 대기업의 직원이었다.
분명 자신과는 다른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적응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때 장현이 말을 이었다.
“난 자신이 없다, 형석아. 여기서 마족과 싸우고 플레이어 생활을 하며 각종 스킬과 권능을 휘두르다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능력을 펼치면 바로 국가와 싸우게 되거나, 영화 속 히어로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게 될 텐데, 그 또한 평범한 삶은 아니잖아. 그게 싫어서 힘을 숨기고 산다면 그 또한 갑갑하겠지.”
“형님은 지구를, 대한민국을 그리워하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워했지. 지금도 그립고. 돌아가면 분명 무언가 안도감도 느껴지고 즐거울 것 같아. 그런데 계속해서 그럴까? 이미 난 다니던 직장에서는 무단결근으로 해고당한 지 오래됐을 거야. 이직?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과연 쉬울까? 또 내가 그 생활을 원할지도 모르겠어. 난 여기서 몽슈 백작에게 사업가의 길을 배우며 따라가고 있어. 그런데 다시 돌아가 월급쟁이의 삶을 살라고? 그럴 자신이 없다.”
장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속마음을 들은 최형석은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하긴, 형님은 마계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위치지. 더군다나 형수님은 마왕이 되실 분이고.’
그런 장현의 입장에서 옛 시절이 그립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장현이 이곳에서 앞으로 계속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최형석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저 역시 형님 곁에 남겠습니다.”
장현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굳이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형석아, 그냥 곰곰이 생각해보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시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은 다시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잠긴 채 제넥스 성으로 이동했다.
제넥스 성은 장현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헬릭스 성과 마찬가지로 디스플레이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었으나 차이점이 있었다.
헬릭스 성은 섀도우 마스크와 힌지 모듈을 주력으로 하는 한편, 최근에는 장현의 영향으로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과 축산 클러스터를 지으며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
그에 반해 제넥스 성은 디스플레이 밸류체인을 성 안에 다 갖추고 있었다.
장현은 공장 건물들을 바라보며 제넥스 성으로 진입했다.
물론 그의 뒤로 최형석이 소환한 언데드 병사들이 따라 들어왔다.
제넥스 성의 병사들은 장현과 최형석의 언데드 병사들을 보고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중 한 병사가 신호를 넣었는지, 성 전체에 걸쳐 요란한 사이렌과도 같은 소리가 울렸다.
왜애애애앵.
장현과 최형석은 제넥스 성의 마왕군 잔존 세력들이 모두 모이길 기다렸다.
어차피 들어오기 전부터 성 주변을 모두 언데드 병사 군단으로 포위해뒀기에, 놈들이 도망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쯤 기다리자 곧 제넥스 성주가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딸 제시카와 제오 장로가 함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제넥스 성주, 제시카 소성주. 그리고 전투에서 도망친 쥐새끼도 여기에 있었군요. 참으로 좋은 날이야.”
장현은 제넥스를 비롯해 제시카와 제오 장로를 둘러보면서 히죽 웃었다.
그 눈빛은 싸늘하고도 시려, 곧 그들을 죽이거나 언데드 병사로 만들 거란 걸 누구든 짐작할 수 있었다.
“뭐라고, 이놈. 감히 날 쥐새끼라고!”
제오 장로가 언제 이런 모욕을 받아봤겠는가.
그는 마왕의 최측근으로서 언제나 존중을 받아왔었다.
제넥스 성주가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쏟아내는 제오 장로의 팔을 잡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중하시오, 제오 장로.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오.”
“으음.”
제오 장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제넥스의 말대로 지금은 분노를 쏟아낼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애써 참으며 장현을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장현은 그런 제오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 언데드로 만들 생각이었다.
곧 그의 입에서 전투 개시 명령이 떨어지려 할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장현 공.”
제넥스 성주가 다급히 말했다.
“뭐, 남길 유언이라도 있나?”
장현이 그에게 묻자 제넥스 성주는 옆에 있는 딸 제시카에게 손짓을 했다.
“제시카, 얼른 패드를 열어 아르헨 공을 장현 공에게 연결시켜줘라.”
제넥스의 말에 장현은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곧바로 손을 쓰려 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장현이 시간 스킬을 발동하며 묠니르를 꺼내든 채 달려들었다.
묠니르가 안젤라의 패드를 향해 날아들 때였다. 패드에서 음성이 울려나왔다.
“장현, 나 아르헨이다.”
“아르헨?”
장현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직감적으로 일이 틀어진 것을 느꼈다.
이 순간 아르헨이 그를 부른 이유가 뭐 때문이겠는가.
분명 제넥스와 제시카가 그에게 연락해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었다.
아르헨이 거절했다면, 지금처럼 화상 통화를 연결하진 않았겠지.
그가 연락했다는 것은 제시카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헨, 난 지금 마왕군의 잔당을 처리하고 있어.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연락하도록 할게.”
장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아르헨은 입을 열었다.
“장현, 제넥스 성주와 제시카 소성주는 살려줘.”
“아르헨, 저들이 마왕 바알의 최측근이었다는 걸 알잖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부탁하는 거야. 제시카 소성주는 내게 잘해줬어. 그녀가 살려달라고 부탁하는데, 거절하기가 어렵더군.”
아르헨의 말에 장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들어줘야 했다.
“알겠어. 제넥스 성주 부녀의 목숨은 살려줄게.”
“고맙다. 장현.”
“그래. 나중에 보자.”
장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묠니르를 휘둘러 패드를 박살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괜히 제넥스 성주의 말을 기다려 줬다가, 아르헨이 개입해 제넥스 부녀를 살려줘야 할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아르헨이 직접 부탁했기에 제넥스 부녀의 목숨은 살려줘야 했지만, 그들의 사업체까지 지켜줄 필요는 없었다.
“최형석. 모두 쓸어버려라. 저 부녀만 남겨두고 모두 말이다. 특히 저 제오 장로는 반드시 언데드로 만들도록 해.”
“알겠습니다. 형님.”
장현의 말에 최형석은 언데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투로봇과 마르바스 활강시, 마록 군단장 그리고 아스멜 성주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한꺼번에 제오 장로에게 덤벼들었다.
“아, 안 돼!”
제오 장로는 자신을 둘러싼 자들의 강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겁에 질렸다.
쉬익!
퍽. 퍽.
전투로봇과 활강시를 비롯해 언데드 고위 마족들이 덤벼들자, 제오 장로는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었다.
잠시 후 제오 장로 역시 최형석의 사령술에 의해 언데드 병사가 되었다.
이어 언데드 병사들은 제넥스 성에 모인 마왕군의 패잔병들을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넥스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방금 아르헨 공이 우리를 살려주라 했잖소.”
“제넥스 성주, 제시카 소성주. 아르헨은 나더러 당신 부녀를 살려달라고 했지, 다른 자들까지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소. 한 번 더 재미없는 장난을 쳤다가는 그땐 당신들을 언데드로 만들어줄 거라고 약속하지. 그땐 아르헨이 말려도 소용없소. 결코 당신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말이오.”
장현이 두 부녀에게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이들이 아르헨에게 다가가 이간질 따위를 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원래는 죽여서 화근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로 경고를 했으니 더 이상 함부로 딴 짓거리를 하지는 못하리라.
“알겠소이다. 장현 공.”
제넥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장현이 염려한 대로 그는 원래 아르헨을 부추겨 플레이어들 간에 내분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제넥스 본인이 아르헨의 지지자가 되어 장현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또 안젤라가 장현과 맺어졌듯이, 제시카 또한 아르헨과 맺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제 그 생각은 희망으로만 그치고 말게 되었다.
아무 세력도 없는 제넥스, 제시카 부녀를 아르헨이 더 이상 챙길 리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인연에 대한 보답은 여기까지다.
아르헨 역시 이런 일로 장현과 대립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넥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부하 병사들과 제오 장로가 데려온 마왕군의 패잔병들은 이미 언데드들에게 학살당해 죽었다.
‘이제 끝이야. 손발이 다 잘리고 말았어. 모든 게 끝났어.’
제넥스는 그저 눈을 감고 한탄했다.
장현이 두 부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르헨과 한 약속은 이걸로 지켰다.”
***
장현은 제넥스 성의 일을 끝낸 다음 이성훈을 호출했다.
“이성훈, 나 장현이야. 여기 제넥스 성도 아스멜 성처럼 마무리를 지었으니, 사업체 정리를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장현 님. 그런데 혹시 제넥스 성주 부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내가 데려갈 거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둘의 사이가 멀어지는 일이 발생할까 봐 걱정했었다.
지금 마계에서 장현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거의 아르헨뿐이라 할 수 있었다.
이성훈은 아르헨이 제넥스 부녀를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혹시 아르헨이 마왕의 자리를 노리고 제시카를 구하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이성훈.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장현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아르헨을 조심하십시오. 그가 제시카 소성주를 확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흠, 혹시 아르헨이 마왕의 자리를 노릴 것이라 생각해?”
“그렇습니다.”
“…알겠다.”
장현은 그렇게 이성훈과의 통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최형석은 통화 내용을 다 들었기에 조심스레 장현의 눈치를 살폈다.
“형님, 제넥스와 제시카를 마르바스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차라리 헬릭스 성주에게 맡겨두는 게 어떨까요.”
“너도 아르헨이 마왕의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하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견물생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눈앞에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가지려고 하겠죠. 저는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유혹에 빠질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형석의 말에 장현은 깜짝 놀랐다.
그가 인간에 대해 이렇게 깊은 고찰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음.’
가만 생각해 보니, 그는 조폭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배신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제넥스 부녀를 마르바스로 데려가느니.
그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처음부터 유혹에 빠질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는 게 친구이자 동료로서 배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장현은 그들을 헬릭스 성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좋아. 이들은 헬릭스 성주에게 맡기는 게 낫겠어.”
“알겠습니다. 형님.”
최형석은 안도했다. 그 역시 이성훈의 말을 듣고 걱정했던 것이다.
‘제시카만 죽였으면 후환거리를 남기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는 제시카를 흘끔 쳐다보았다. 드라큐라인 그녀는 인간형으로, 창백한 피부와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남자라면 충분히 흔들릴 수 있을 외모였다.
‘제시카를 아르헨의 손에 넘겨주면 안 돼.’
최형석은 다시 한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