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최종장 (4)
장현은 김민우의 말을 듣고 다시 치킨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걸로 해보도록 합시다. 모든 것은 김민우 님께 맡길 테니 지원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저한테 얘기하세요.”
“갑작스럽긴 하지만 보람이 있을 것 같군요. 열심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이 요리 이름을 따로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이름까지는 짓지 못했습니다. 치킨을 생각하고 만든 요리라 다른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럼 치킨이라고 합시다. 얼마나 정겹고 그리운 이름입니까. 이 맛에는 치킨이 아닌 다른 이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치킨이라……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그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재료가 닭이 아니었기에 차마 붙이지는 못했습니다.”
“요리 이름에 재료를 연상시키는 것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맛과 요리의 디자인은 치킨보다 더 어울리는 네이밍이 없을 거 같더군요. 재료가 아닌 추억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추억이라, 그렇군요. 고향을 잃은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한 부분 같습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현 님.”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럼,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김민우는 마치 미리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한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승낙했다.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지구의 인기 요리를 마계에 퍼트릴 수 있다는 보람이 그를 더욱 기쁘게 한 듯했다.
김민우의 눈빛은 열정으로 빛났다.
사업 얘기가 잘 마무리되고 나자 장현을 포함한 4인은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편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모처럼 지구 느낌의 식사를 한 덕에, 그들은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현은 김민우의 요리 연구소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그대로 자버렸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그는 헬릭스 성의 성주실로 향했다.
헬릭스 성주는 장현이 하루 전 축산 클러스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가 왔음을 알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인사하러 올 줄 알았건만.
축산 클러스터에 이어 요리 연구실로 가더니 술을 마시고 나오지 않는다는 부하의 보고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자식이, 내게 먼저 인사도 안 하고 다른 곳부터 들르다니. 괘씸한 놈.”
헬릭스는 그가 축산 클러스터를 먼저 들렀다고 했을 때도 언짢았다.
자신에게 먼저 인사하고 나서 다른 볼일을 봐도 될 텐데, 굳이 그곳부터 먼저 간 것에 화가 났었다.
그럼에도 참았다.
축산 클러스터는 성 밖에 있었으니 오는 길에 들를 수도 있다는걸 감안한 것이다.
그런데 성 안에 들어와서도 그는 바로 요리 연구실로 가서 김민우와 술을 마시고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다.
“이놈이 아주 기고만장해졌군. 이걸 가만히 놔두면 앞으로 나를 우습게 볼 게 아닌가. 초장에 버릇을 고쳐놔야겠어.”
헬릭스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사실 무력으로는 장현이 이미 그를 능가했다.
마왕도 해치웠던 장현인 만큼, 헬릭스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명확했다.
장현의 부하인 최형석은 수만에 달하는 언데드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강자다.
그 둘이서 아스멜 성주의 성을 초토화시켰다는 소식은 헬릭스도 들었다.
만약 안젤라가 장현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지금 먼저 달려가서 공손하게 장현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아스멜 성주처럼 목숨을 잃고 언데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안젤라가 헬릭스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장현은 안젤라를 차기 마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마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럼 헬릭스 자신은 마왕의 아버지가 되는 만큼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헬릭스는 장현을 따끔하게 혼내서 기선 제압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실수는 하나, 안젤라가 지금 장현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장현은 성주실로 들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헬릭스 성주님을 뵙습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지만, 헬릭스는 언짢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서 말했다.
“어제 이곳에 왔다면서, 이제야 네게 인사를 받는군.”
꿈틀.
그 말에 장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왕을 죽인 이후, 지금껏 그가 만난 성주들 중 이런 태도를 보이는 자는 헬릭스가 처음이었다.
그가 안젤라의 부친이긴 했지만, 앞으로 안젤라가 마왕이 되었을 때 헬릭스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미리 그에게 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성주님은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장현은 고개를 들어 싸늘하게 그를 바라봤다.
“뭐라?”
헬릭스는 장현의 말에 거만한 표정을 지우고 분노한 듯 그를 쏘아봤다.
“성주님이 앉아서 인사를 받을 위치라고 생각합니까?”
장현은 말과 함께 몸에서 위압감을 뿜었다.
강력한 기운이 퍼져나가 헬릭스를 압박했다.
“이익. 네놈이 감히!”
“네놈이라고.”
헬릭스는 진정 분노한 듯 몸을 떨었으나, 장현이 싸늘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는 아스멜 성주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 두려워서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
대공이 죽었을 때, 사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마왕이 살려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현은 헬릭스에게 있어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뿐인 딸을 그에게 뺏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현은 여전히 헬릭스를 향해 기운을 쏘아보내며 압박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고 안젤라를 조종하려 들 낌새가 보이면 미리 처단할 생각까지 있었다.
과거 지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었다. 왕가의 친인척들에 의해 혼란이 일어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마계에 인류를 위한 지구와 같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헬릭스를 죽이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장현의 압박에 결국 헬릭스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오.”
헬릭스의 사과에 장현도 기세를 풀었다.
“성주님. 제가 안젤라를 마왕의 자리에 앉힐 때, 헬릭스 성주님을 방해자로 생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장현은 나지막하게 말했으나, 헬릭스에게는 천둥처럼 들렸다.
“아, 알겠소.”
헬릭스는 마침내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장현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헬릭스 성의 사업 현황에 대해서 물었다.
헬릭스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한결 정중하게 그간의 사업과 투자 진행 상황을 보고하듯 말했다.
헬릭스 성주실을 나온 후, 최형석이 조심스럽게 장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형님, 헬릭스 성주는 나중에 장인이 될 분인데 괜찮을까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하긴……. 뭐, 별 수 없겠죠.”
최형석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형석아.”
“네. 형님.”
“난 안젤라와 헬릭스, 둘 다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다.”
최형석은 장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간 것이었다.
“안젤라가 마왕에 즉위한 후 헬릭스가 권력에 욕심을 가져 정치에 개입하려 하면, 난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 경고한 것이다. 사실 이번에 헬릭스 성을 들른 것도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렇군요. 형님의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최형석은 그제야 장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 장현은 권력의 중심에 설 것이다.
마왕은 안젤라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장현이 휘두르게 될 것이다.
그는 백신을 제작하고 안젤라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최형석과 함께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중립 성주들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반란군도 그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마왕군의 잔존 세력들만 처리하고 나면, 마계는 이제 사실상 장현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경쟁자를 원치 않았다.
인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마계에 남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이곳에 지구와 같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설령 그게 안젤라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 한 것이다.
장현은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후우. 이제 얼추 정리됐으니, 마왕군의 패잔병들만 정리하면 안젤라의 마왕 즉위식을 진행할 수 있다. 놈들이 제넥스 성에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형님.”
조금 전 헬릭스는 마왕군의 패잔병들이 제넥스 성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장현에게 전했다.
그들을 찾고 있던 중이었기에, 그 소식을 들은 장현은 곧장 제넥스 성으로 향하려 했다.
마왕의 잔존 세력을 안젤라의 즉위식 전까지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곧 장현과 최형석은 마중 나온 아슬란, 김민우와 이별 인사를 했다.
“장현 님, 벌써 떠나신다니 아쉽습니다. 조금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요.”
아슬란이 아쉽다는 듯 얘기하자, 장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중에 안젤라 소성주의 마왕 즉위식 때 오십시오. 그때 다시 봅시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납품 생산 라인들을 단단히 다지도록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장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장현은 아슬란에게 웃어주고는 김민우를 쳐다봤다.
“민우 님은 치킨 프랜차이즈를 준비해서 다되면 얘기해주세요. 아슬란 사장이 대규모 생산시설을 구축하면 마계 전역에 치킨이 공급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장현 님.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각한 상황에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려면, 배달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요?”
“배달이라, 그렇군요. 원래 치킨은 배달이죠. 아르헨 국왕이 물류와 배송사업을 맡고 있는데,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최형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형님, 혹시 제 언데드 군단에게 배달을 시키면 어떨까요? 아르헨 님은 지금 물류 배송만으로도 일이 넘쳐날 테니, 제가 언데드로 배달 사업을 해볼까 싶습니다.”
“배달하는 언데드들이라. 가능하겠어?”
“예. 방금 이름도 지었습니다. 배달의 마족이라고.”
“좋아. 한번 해봐. 그런데 사실 아르헨이 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거기는 지금 전투가 끝나서 놀고 있는 헌터들이 많은가 보더라고. 어쩌면 아르헨과 경쟁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잘해봐.”
“형님.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할 테니 아르헨 님께는 얘기하는 거라도 좀 미뤄주십시오. 나중에 아르헨 님이 끼어들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요.”
최형석의 말에 장현은 그 정도라면 상관없겠다 싶었다.
“좋아. 그러도록 하지. 아르헨이 스스로 치킨 배달에 끼어들겠다고 하면 몰라도, 내가 먼저 얘기하지는 않으마.”
“감사합니다. 형님.”
마지막으로 할 얘기도 끝났기에, 이번에는 진짜로 헤어졌다.
헬릭스 성을 벗어났을 무렵, 최형석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장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뭐 할 얘기라도 있는 거야?”
신경 쓰였던 장현이 물었다.
“아, 형님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쭤봐도 될까요?”
“안 그러면 계속 힐끔힐끔 쳐다볼 거잖아. 그냥 물어봐.”
“아. 죄송합니다. 안젤라 님을 마왕으로 추대하고 나면 우리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물론 남는 자들을 위해 지구와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사업을 벌이시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최형석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질문하자 장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궁금해 할 만도 했던 것이다.
“넌 지구에서 지낼 때가 좋았어,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좋아?”
장현이 물어보자 최형석은 순간적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구에서의 조폭 두목 시절을 떠올렸다.
서울 강남에 입성해야 진정한 전국구 조폭이라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큰 형님이 호출하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하는, 지방 조폭에 불과했다.
돌아가면 어떤 상황일까.
당시 같이 지내던 동생들 중 김태석 외에는 대부분 죽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자신의 세력 기반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처음부터 조폭 생활을 시작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이미 훨씬 더 큰 세상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언데드 부하들만 해도 수만이니, 굳이 다른 조폭 부하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생활하던 동생들 외에는 가족도 없었다.
마계에 온 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으니, 자신의 사업장은 이미 다른 놈들이 꿰찼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마왕을 쓰러트린 최강자 중 한 명이자, 마계의 실세인 장현을 모시는 최측근.
거기다 곧 자신의 언데드 군단을 활용해 배달 사업도 시작할 것이었다.
최형석의 선택은 당연히.
“저는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좋습니다.”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