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플레이어 독립전쟁 (15)
장현, 안젤라, 최형석은 캄온 연구소까지 빠르게 달려갔다.
이미 한번 왔던 길이기도 했지만, 마주칠 거라 생각했던 확진된 몬스터들과 마족들이 길에 없었다.
‘이상한데. 분명 얼마 전에 왔을 때만 해도 확진된 몬스터들이 바글거렸는데. 누군가 마치 쓸어버린 것처럼 없어졌어.’
의아한 생각을 속에 묻어두고 마침내 앞서 갔던 길을 되밟아 도착한 캄온 연구소에서, 장현은 생각지 못한 장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마족 군대가 캄온 연구소 입구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현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마왕군이 장악한 건가?”
“아니야. 저들은 대공의 군대야.”
안젤라가 고개를 젓더니 달려갔다.
연구소 입구에 그녀가 아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마족은 장현 또한 잘 아는 자였다.
“로메드,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안젤라 소성주님!”
로메드는 반가운 얼굴로 안젤라에게 향했다.
곧 이어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 것처럼.
그 표정을 본 안젤라가 의아해했다.
“표정이 왜 그래?”
“아가씨께서 플레이어팀으로 경기에 합류하신 뒤 킹덤까지 가시며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요.”
로메드의 말에 안젤라는 씨익 웃었다.
“난 괜찮아. 헬릭스 성에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니까. 로메드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아버지도 같이 오셨겠네.”
“네.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도 오셨습니다.”
“대공 전하가 여기에 오셨다고?”
안젤라는 깜짝 놀랐다.
뭔가 일이 매우 커진 듯했다.
반란군 수장 마초를 마르바스 성으로 보내 백신과 진단키트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한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현이 로메드를 향해 물었다.
“대공이 친히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지 압니까?”
로메드는 안젤라와 장현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에게 말을 놓기가 어려웠다.
묘한 표정으로 장현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장현 님께서 최근 마르바스 성 주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연설이랑 관련이 없지만은 않은 거 같습니다.”
“그럼 만나봐야 알겠군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요?”
“네. 그렇잖아도 성주님과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면,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보군.”
그의 말에 로메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연구소로 이끌 뿐이었다.
장현과 안젤라 그리고 최형석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젤라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로메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병사들은 다 뭐야?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러 온 거 같잖아.”
“맞습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안젤라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장현은 캄온 연구소로 오던 길에 만났던 마왕군 군단장 데이몬이 떠올랐다.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그는 눈을 반짝였다. 이미 1회차와는 달라졌다.
더 이상 인간 대 마족의 싸움으로 흐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공이 마왕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 여기까지 온건 아마, 마초한테 언질을 듣고서 간을 보려는 거겠지.’
대공으로서도 마왕과 내전을 벌이는 건 큰 부담일 터.
이길 가능성을 점쳐보려는 것이다.
그가 기대하는 건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일 게 분명했다.
곧 대공과 헬릭스가 있는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은 B동이었다.
로메드를 따라 장현과 안젤라가 함께 들어갔다.
이어 최형석이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로메드가 막았다.
“두 분만 들어가시고, 최형석 님은 여기서 대기해 주셔야 합니다.”
최형석이 대번에 반발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형님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
“안됩니다.”
최형석이 눈을 부릅뜨며 로메드에게 따졌다.
둘의 대치가 이어지자 장현이 최형석에게 조용히 말했다.
“최형석, 너는 나 대신 A동의 케미 팀장과 연구원들에게 별일이 없는지 살펴봐.”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최형석은 장현의 말에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그러는 한편 로메드를 노려봤다.
“그래. 너도 몸조심하고.”
장현은 최형석을 보낸 뒤, 안젤라와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B동은 사장실과 관리직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이 있는 건물이었다.
B동 꼭대기에 있는 사장실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동안, 바깥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숲과 연구실 건물 사이로 하천이 흘렀다.
‘이렇게 보면 꽤나 평화로운 곳인데 말이야.’
이내 사장실이 있는 꼭대기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로메드를 따라 내리자 곧 사장실 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무장한 마족들이 서 있었다.
모두 데이몬 군단장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대공 전하께 플레이어 장현과 안젤라 님이 도착했다고 말씀드려주십시오.”
로메드의 말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마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그가 다시 나오더니 말했다.
“플레이어 장현, 그리고 안젤라는 안으로 들어가도 좋소.”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강력한 마족들이 여러 명 보였다.
그중 익숙한 얼굴인 헬릭스가 보였고.
그 옆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한 마족이 있었다.
‘대공 루시퍼.’
1회차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박람회 때 이후로 다시 보는구나. 플레이어 장현. 그리고 안젤라.”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장현과 안젤라는 대공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공손하긴 했으나, 비굴하지는 않았다.
루시퍼는 눈을 빛냈다.
자신의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서서 인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현이 새롭게 보였다.
고위 마족들조차 자신을 처음 보면 벌벌 떨곤 했기에.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강한 플레이어인지 알 수 있었다.
대공이 입을 열었다.
“너의 경기 영상은 잘 보았다. 내가 개최했던 박람회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도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 정도까지 성장할지는 몰랐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장현은 간단히 인사하며 그를 바라봤다. 본론을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성격이 급하군. 좋아. 나도 질질 끄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바로 얘기하도록 하지. 너의 마르바스 연설을 보았다. 나와 마왕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함이더냐?”
대공은 매서운 눈빛으로 장현을 바라봤다.
사실 장현이 유일하게 백신을 제조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면, 대공은 말도 섞지 않고 장현을 찢어죽였을 것이다.
“저는 마왕을 규탄했을 뿐, 이간질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군중들이 대공 전하께 의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장현의 말에 대공은 피식 웃었다.
뒷말이 기분 좋게 들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꾸짖었다.
“감히 인간 플레이어 주제에 마왕을 규탄한다고? 죽고 싶은 것이냐? 너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은 모든 인간들을 죽일 것이야.”
“그러진 못할 겁니다. 제가 없다면 창조신의 패드를 완성하지 못할 테니까요.”
장현은 그 말을 하며 주위 마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공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다.
“눈치 볼 것 없다.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창조신의 패드는, 저만이 완성할 수 있습니다.”
“힌지 모듈과 섀도우 마스크 그리고 생체인식 센서를 복구했단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신하다니.”
대공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눈빛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드러나 있었다.
“최근에 힌지 모듈을 교체하면서,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복구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호오.”
장현의 대답에 대공은 흐릿한 미소를 보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나?”
“마왕과의 패권전쟁을 결심하신 것으로 예상합니다.”
“훗. 여기서 너를 잡아서 마왕에게 바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왕의 오해도 풀어질 거고, 반란군과의 관계에 대한 해명도 될 것이다.”
“대공께서는 마왕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장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공은 표정을 굳힌 채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마치 네가 나를 마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듯이 얘기하는구나.”
“원래라면 불가능했겠지요. 그러나 지금 시국에서는 가능하다고 자신합니다. 이미 마계 주민들도 태반이 마왕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제가 연설한 영상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반응이 뜨겁습니다. 이미 민심은 대공 전하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제가 대공 전하의 편에 서서 마계 주민들에게 백신을 공급한다면, 대공께서는 마계의 민심을 완전히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장현은 대공을 바라보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네가 백신으로 도움을 주더라도, 민심만으로는 마왕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힘이지.”
대공은 장현의 말에서 허점을 짚었지만, 이미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다는 점부터가 장현의 말에 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신은 대공 전하를 따르는 마족에게만 지급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겠습니까?”
장현의 말에 대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대공은 결코 장현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대공이 마왕이 되는 것은, 창조신의 패드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 또한 의미했기에.
“우리 인류를 원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마계에 남길 원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인간들만의 자치를 보장해주길 원합니다.”
장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인류의 독립과 고향으로의 귀환. 그것이야말로 장현과 동료들이 바라던 바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달란 말이지. 알겠다. 방법을 찾아보고 그렇게 해주도록 하지. 두 번째 조건 역시 마찬가지. 킹덤이든, 이전에 있었던 영지든. 너희 인간 플레이어들이 원하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마계 주민으로 인정해 주고, 인간을 마족의 한 종족으로 인정해 주겠다. 그러면 되겠나?”
루시퍼가 장현의 요구에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주범인 인간 종족을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 루시퍼의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양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게 이번에 증명되었다.
합의를 이룬 후 대공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너를 만나보기 위함도 있지만, 마왕측이 대군을 이끌고 마르바스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루시퍼의 말에 장현은 침음을 삼켰다.
마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줄이야.
“그렇잖아도 데이몬이라는 마왕군 군단장과 한차례 전투를 치렀습니다.”
“데이몬이라면 상당히 강한 장수인데, 그의 부대와 전투를 치르고도 무사했다니 예상보다 더 강하군.”
루시퍼는 살짝 놀란 듯이 말했다.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데이몬의 부대를 패퇴시켰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가급적 마왕과 대공의 내전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전력을 숨기는 게 좋았다.
“바이러스에 확진될까봐 두려워하는 거 같더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하긴, 고위 마족이라도 바이러스에 확진되면 마력을 모두 잃을 테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겠지.”
대공은 장현의 말을 믿었다.
그만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마족들의 공포심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이곳 캄온 연구소가 있어야, 마르바스 연구소와 연계해 마족을 위한 백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캄온 연구소를 저희가 차지하게 해주십시오.”
“음, 그렇다면 더욱 곤란한데.”
대공의 말에 장현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임상 및 비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캄온 연구소는 CRO 업체로서 백신 임상시험을 진행해야 할 필수 시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