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플레이어 독립전쟁 (6)
데랑스는 장현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분혼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끝낸 것이다.
동시에 데랑스가 만든 공간 또한 소멸되었다.
퉁!
장현은 공간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패드가 있던 장소였다.
자신이 가져온 패드를 살펴본다.
시간이 멈춰져있다.
‘데랑스의 선물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현은 창조신의 패드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과 창조신의 권능까지 새로운 패드에 옮겨졌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정상적으로 옮겨졌다. 이제 데랑스에게 전해 받은 권능으로 창조신의 패드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누구도 그가 창조신의 패드를 복사해갔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기존 패드는 손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손된 폴더블 패드의 힌지 모듈을 새로운 힌지 모듈로 교체하기만 했다.
장현은 데니우스에게 연락해 수리를 완료했음을 통보했다.
“이제 교체가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장현 님. 마왕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데니우스의 말에 장현은 내심 웃었다.
비록 가상의 시공간이긴 하지만 조금 전 마왕을 죽이고 나서 데니우스의 말을 들으니 실소가 나왔다.
이번 가상의 전투를 치르고 나서 느낀 것은 나초 같은 창조신의 금속으로 만든 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장현이 연금술사 조각의 권능을 모두 얻었기에, 테세리움을 추가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이정환이 무기로 만들어준다면 동료들 또한 각자 신의 무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장현은 돌아가는 대로 이것에 대해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현은 목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더 현재를 떠날 수 있었다.
데니우스가 성대한 인사를 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빠르게 벗어났다.
“안젤라, 돌아가자.”
“하려던 일은 잘 됐어?”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은 지네차를 타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현이 패드를 취하고 나왔을 때, 당초 예상과 달리 시간이 꽤나 흘러 있었다.
그것을 인식한 그는 곧장 마르바스에 대한 진행 상황부터 물었다.
“안젤라, 지금 마르바스에 진입한 쪽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는 거 있어?”
“다행히 마르바스 성으로는 성공적으로 진입했어. 비록 희생자가 상당히 나왔지만 연구 시설은 무사하다고 해.”
“그럼 일단 마해를 건너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겠지. 킹덤은 괜찮아?”
“킹덤은 필수 인력을 남겨서 생산 시설은 돌아가게 해뒀어.”
“그렇군.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서 다행이야.”
“다만, 마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안젤라의 말에 장현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새로 생겼어?”
“새로운 문제는 아닌데. 반란군이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커졌고, 정부군은 이를 제대로 제어를 못하고 있어. 더군다나 바이러스가 마족들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키고 있는 게 심각해.”
안젤라의 말에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의 정부군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심각한 문제다.
그 말은 반대로 플레이어들에게는 좋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마계가 혼란스러워질수록 플레이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는 마족들에게는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반란군이 강해지는 것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일이며, 바이러스의 변이는 생존에 위협이 된다.
마족의 마력을 빼앗아가고 이성을 상실케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반란군과의 전투보다 바이러스 확진에 더 큰 공포를 갖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타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장현은 헬릭스 성과 킹덤을 오가는 선박을 타고 마해를 건너 마르바스 성이 있는 대륙으로 향했다.
마르바스 성으로 향하는 도중 여러 차례 확진된 몬스터들과 마족의 습격을 받았지만, 이미 백신을 접종한 데다 창조신의 스킬까지 가지고 있기에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가급적 전투를 피했다.
동료들을 만날 때까지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는 게 좋았다.
마르바스 성으로 가는 동안 쓰러진 마족들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있는 걸 보았다.
“바이러스에 확진된 마족들의 사체가 이렇게 방치되다니. 이러면 질병이 더욱 퍼질 텐데.”
“정부에서는 사실상 손을 놓은 것 같아. 백신도 없는 데다 개별로 맞춤 제작해야 한다는 소식에 그냥 포기해버렸어.”
안젤라는 우려 가득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그녀는 고위 마족이자 헬릭스 성의 소성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헬릭스 성은 어때?”
“다행히 장현 네가 백신을 만들어 줘서 작업자들은 모두 백신을 맞을 수 있었어.”
“리자드맨과 크로커다일, 드워프족이 대부분인 데다 우리 사업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백신을 만들어 줘야지.”
“그들도 고마워하고 있어. 다만 다른 성에서 이주해온 재난민들 중 마족들은 아직 접종을 받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있어.”
“재난민들 중 인간 플레이어들은 같은 백신으로 접종할 수 있는데 마족은 새로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어.”
장현의 말에 안젤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난을 피해 이주해온 마족들이 계속해서 백신을 제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백신 제작이 가능한 사람은 장현이었기에, 안젤라가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슬쩍 운을 띄워봤지만 역시나 어려웠다.
‘그래도 대부분의 영지민들과 성내의 주민들이라도 접종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유독 헬릭스 성 인근에서만 반란군이 득세하지 않은 것도 주민들에게 백신을 접종해줬기 때문이리라.
그때 안젤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현, 혹시 아버지께 백신을 접종해 줄 수 있어?”
아버지 헬릭스는 대공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고위 마족. 장현의 말대로라면 개별적으로 백신을 제조해야 한다.
장현은 안젤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헬릭스 성의 소성주면서 자신을 따라 플레이어 팀으로 경기에 참가해 준 여인이다.
더불어 이제는 연인이 된 사이다.
장현은 가만히 안젤라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헬릭스 성으로 가는 대로 백신을 만들어줄게.”
“고마워. 장현.”
안젤라를 품에 안은 채 장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헬릭스에게 백신을 제공해 준다면 나름의 금제는 해야 할 것이다.
헬릭스는 대공 라인.
대공 측이 마왕에 맞서 내전을 벌인다면 장현은 기꺼이 대공 측에 백신을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던가. 아군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적은 아닐 수 있겠지.’
대공 역시 창조신의 패드를 두고 마왕과 겨루기 위해서는 여러 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장현의 예측으로는 반란군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1회차에서도 그런 정황이 보였다. 다만 승부의 추가 확연히 기울어지자 대공은 지원을 중단한 것으로 추측됐다.
‘무게추가 쉽게 쏠리지 않도록 반란군을 지원해야 해.’
마왕군과 반란군 연합 세력의 우위를 점쳐볼 때, 우선 강자들의 숫자는 마왕 측이 훨씬 많았다.
당장 마왕 본인만 해도 대공에 비해 무력면에 있어 강하다.
압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공을 홀로 묶어버린다면 나머지 장수들 간 대결에서 마왕이 우위에 서게 된다.
그럴 경우 반란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서더라도 승부의 추는 마왕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때 우리 플레이어가 대공과 반란군을 지원한다면, 승부의 방향은 또 바뀌겠지.’
이때 장현을 필두로 한 플레이어들이 마왕군을 공격한다면 전투가 팽팽해질 것이다.
‘마왕과 대공의 전투가 끝난 후 이긴 자를 상대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아무래도 마왕이 우세하다고 보지만, 설령 대공에게 특별한 한 수가 있어 그가 살아남더라도 상관없었다.
창조신의 무기를 지닌 아르헨과 장현, 마현 등이 지친 상태의 마왕 혹은 대공을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 지네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가 마르바스 성.’
장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흰색 건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바리게이트였다.
바리게이트 주위로 확진된 몬스터와 마족들이 몰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확진된 마족은 마기를 잃어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저 마족들, 원래 이곳의 연구원이었나?”
장현이 중얼거릴 때, 인기척을 느낀 확진된 마족들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장현은 가만히 그들을 보더니 이내 쑤엉을 소환했다.
“쑤엉, 저 마족들을 처리해야 해. 도와줘.”
“후우. 모두 태워야 해?”
가볍게 한숨을 쉰 쑤엉은 장현에게 물었다. 데랑스가 만든 공간에서 마족들을 모조리 태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많은 수의 마족을 보니 한숨이 나온 듯 했다.
그래도 쑤엉은 이제 예전처럼 투정부리거나 하지 않았다.
장현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정문까지 앞길만 열어줘.”
“알겠어. 그 정도야 이제 껌이지. 주인이 워낙 혹사시켜서 말이야.”
“미안하다.”
“뭐, 사과 받으려고 한건 아니야. 덕분에 나도 화염 정령으로서 정령왕에 준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군.”
장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곧 쑤엉이 길을 열었다.
화르르륵!
장현을 향해 덤벼들었던 확진된 마족과 몬스터 무리는 쑤엉의 화염에 그대로 타버렸다.
끄아아아악!
녹아내리는 마족의 얼굴은 차라리 편해 보였다.
이성을 잃고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몬스터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젤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녀 역시 마족의 한 종족인 서큐버스였으니, 마족들이 비참한 몰골로 죽어나가는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다.
장현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젤라. 나중에는 마족들도 모두 백신을 맞게 될 거야.”
“그럴 수 있을까?”
“물론.”
희미한 미소를 지은 안젤라는 장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해서였다.
인간 플레이어들의 독립을 위해 바이러스가 퍼진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마계의 혼란은 인류의 독립을 이뤄줄 기회나 마찬가지니까.
모든 마족이 백신을 맞게 된다면 인간 플레이어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백신을 맞게 될 거라는 그의 대답은 한 가지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인류의 독립.
그것을 위해 마왕을 쓰러트려야만 한다.
다행히 안젤라의 아버지 헬릭스는 대공의 측근.
안젤라는 장현을 도우면서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했다.
쑤엉이 화염으로 마족과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모습은 마르바스 성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저건 누구야? 저 엄청난 수의 확진자 마족 놈들을 그냥 태워버리네.”
“네오디움 왕국의 장현 님이야.”
“장현 님이라면, 백신을 만든 분 아니야?”
“맞아!”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곧 지도부 플레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장현이 왔음을 알고 나온 것이었다.
마침내 장현이 정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르헨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장현, 돌아왔군. 목적은 이루었나?”
“다행히 잘 해결됐다.”
“그렇다면 그 창조신의 패드를 얻었겠군.”
“그래. 이제 마왕과 일전을 벌여도 할만할 거 같다.”
장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아르헨을 비롯한 주위의 동료들 역시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독립전쟁을 시작하자!”
“우리는 준비되었다.”
장현의 말에 아르헨이 호응했다.
“그리고 이정환은 어디 있지?”
“이정환? 그는 성내 대장간에서 아이템을 개발한다고 정신이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초 같은 신의 무기를 더 만들어야 해. 최소한 마왕을 상대할 자들은 모두 신의 무기를 지닐 수 있도록 말이야.”
“그건 테세리움 금속이 있어야 하지 않아? 이미 나초를 만드느라 사용한 걸로 아는데.”
“이제 내가 테세리움 금속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어. 파라셀수스 조각의 권능을 얻어서 가능해.”
“그렇군.”
아르헨은 장현의 대답에 기뻐했다.
신의 무기를 더 많은 플레이어가 갖게 될수록 마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