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다시 헬릭스 성으로 (11)
장현은 이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나연, 너도 여기에 대해 의견 좀 내봐.”
그의 요구에 이나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역할 분담을 하자면 린에이지 족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으니 리자드맨들에게는 네일 스티커 생산을 맡기면 될 거 같아. 더군다나 그들은 마스크에 주문진도 새기고 있잖아. 나머지 제품들에도 주문진 넣는 걸 시키면 좋을 것 같아. 드워프들에게는 침대 매트리스를 맡기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리고 기존의 우리 인간 영지민들에게는 후리스 생산을 맡기는 게 좋을 거 같아. 클럭 마사지기는 누가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
“좋아. 그럼 클럭 마사지기는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고. 이 일에 대한 총감독은 이나연이 맡아서 해. 김덕배와 이성훈은 이주해올 재난민들의 숙박시설 준비하는 것만 해도 정신없을 거야. 이나연 너밖에 없어.”
이나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차마 최형석에게 시키라고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크로커다일 족장인 크록하가 손을 들고 한마디 했다.
“지금 우리 크로커다일에게는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시오. 비록 우리가 크레온 지배하에 있을 때 좋지 못한 행동을 했더라도, 지금은 같은 영지민으로서 영지 개발에 기여하고 싶소이다.”
장현은 크록하를 쳐다보았다.
사실 크로커다일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드워프들과 리자드맨들에게는 일거리를 줬지만, 크로커다일족에게는 별다른 일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병사훈련을 받고 힘쓸 일이 있으면 불려가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최근 공장 짓는 일이 한창일 테니 아마도 그쪽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그들을 배척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크록하라고 했던가. 저 자의 말도 일리가 있어. 더군다나 이나연이 영지민의 화합이 필요하다고까지 했으니.’
이나연이 영지의 화합을 위해 행사가 필요하다고 할 때조차도 크로커다일족은 고려하지 않았었다.
지금 그들을 끌어안지 않으면 여기에서부터 내분의 씨앗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새삼 그 점을 인식한 장현이 물었다.
“지금 크로커다일족은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우리는 땅을 개간하고 건물을 짓는 일을 하고 있소. 나는 영지에서 건설부 총책임자를 맡고 있으며, 치안병을 제외한 대부분의 크로커다일은 내 밑에서 건설 일을 도맡아 하고 있소.”
크록하의 말에 장현이 김덕배를 쳐다보았다.
저 말이 사실이냐는 물음이었다.
장현의 시선을 받은 김덕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포장해서 건설부 총책임자지, 그냥 막일꾼이나 다름없는 포지션이었다.
‘건설 일이라, 그러고 보니 크로커다일들의 체력과 근력을 생각하면 딱이긴 하네.’
그러고 보니 아직 독 안개 지역 재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김덕배와 이성훈에겐 영지내의 주택공급을 맡겼으니. 영지 밖 재개발 지역에 대한 일은 크로커다일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독 안개 지역이었던 재개발 정비구역은 영지 플레이어 모두가 꺼리는 곳이었다.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크로커다일이 맡아준다면 좋았다.
“좋아. 재개발 정비구역에 대한 철거 및 주택 건설을 크록하 족장에게 맡기도록 하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가져와봐.”
“알겠소. 고맙소이다. 장현.”
“뭘, 그런 걸 가지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도 좋아.”
“건물을 대량으로 공급하려면 콘크리트 파일이 필요한데 매우 부족하오. 영지내의 영지민들을 위한 생활형 숙박시설이나 민간임대주택까지는 어떻게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지만, 영지 밖 재개발 정비구역에 주택을 지으려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겠소? 더군다나 지금 있는 콘크리트 파일은 강도가 약한 편이라 장현 그대가 연금술사 능력으로 고강도 콘크리트 파일로 강화해줬으면 좋겠소.”
“콘크리트 파일이 부족한데다가, 있는 것도 강도가 약하단 말이지. 알겠어. 고강도 콘크리트 파일로 강화하는 건 내가 하면 될 테고, 부족한 건 내가 소성주께 요청하거나 지로발에게 알아보도록 하지. 또 다른 필요한 건 없나?”
“시멘트도 필요하오. 콘크리트 파일 다음 단계에 필요한 만큼 지금 당장은 콘크리트 파일이 급하지만 그 다음으로는 시멘트가 필요하오. 그 다음은 페인트도 필요하고, 또 유리도 필요하지.”
“시멘트라. 우선은 콘크리트 파일이 해결되면 그것도 알아보도록 하지.”
장현은 크록하의 요구를 들어주고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는 안젤라에게 받은 인수할 업체 후보 목록을 시스템으로 모두에게 전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안건으로 넘어가지. 방금 파일을 하나 받았을 거야. 안젤라 소성주가 상속받은 회사가 있다고 하는데 드림히트 성의 계열사 중 마튜브 영상 콘텐츠에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회사라고 해. 그런데 이번에 그 회사를 키울 생각인가 봐. 여러 회사들을 인수해서 종합 영상 제작물 회사로 변신할거라고 내게 인수할 회사 후보 목록들을 주더군. 지금 보낸 파일이 그 회사들 목록이야. 이중에서 후보를 추려달라고 하던데 보다시피 양이 너무 많아. 다들 좀 도와줘야겠어.”
장현의 얘기를 듣고 이나연이 물었다.
“장현, 좀 자세하게 얘기해줘.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회사를 종합 영상 제작물 회사로 키울 거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겠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도록 하지. 드림히트 성의 몽슈 백작의 계열사 중에 워즈웍 스튜디오라는 회사가 있어. 현재 비쥬얼 이펙트라는 특수효과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해. 비쥬얼 이펙트라는 건 마튜브에 공급될 영상 콘텐츠에 들어가는 특수효과야. 블랙펑키나 배리어소년단 같은 아이돌들의 뮤직비디오나 여러 엔터 영상에 주로 쓰여. 이런 말을 내입으로 하기 그렇지만 현재 마계에서 가장 핫한 게 우리 플레이어들의 경기잖아. 우리가 참가한 경기 영상을 콘텐츠로 만들 때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회사야. 이 회사가 이제 직접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겠다고 하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회사들을 인수하겠다는 거야.”
“크크큭. 우리들이 목숨 걸고 뛴 경기로 포인트를 버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최형석이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분노에 찬 살기가 감돌았다.
그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장현은 그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소성주가 준 목록을 살펴봤더니 공연회사, 소형 드라마 제작사, 웹툰 제작사 등이 있더군. 이 회사들 중에서 선별해서 인수하려는 거야. 그 목적은 합병해서 거대 종합 엔터회사가 되는 거고.”
“알겠어. 이거 기한이 언제까지야?”
장현의 설명을 듣고 이나연이 물었다.
“일주일이야.”
“휴, 그럼 다른 일 다 젖혀두고 이거부터 매달려야겠다. 모두 분담해서 하면 일주일이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후우. 알겠어. 당분간 빡세게 작업하겠군.”
“저도 그럼 이것부터 하겠습니다.”
이나연, 김덕배, 이성훈이 차례로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제 전달할 얘기는 모두 끝났어. 이것으로 회의는 마치도록 하자.”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다들 일거리를 짊어지고 떠났다.
그때 최형석이 안 가고 남아서 물었다.
“형님, 저는 따로 뭐 안 해도 됩니까? 태석이 마저 일을 맡았는데 저만 일이 없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최형석이 뭔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맡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일단 인수회사 후보 선별이 끝내야 해. 너에게 따로 시킬 건 그 다음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최형석은 찝찝한 기분이 사라졌는지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회의가 끝났지만 장현은 할 게 많았다.
‘우선 급한 것부터 해야겠지.’
크로커다일 족장 크록하가 요청했던 콘크리트 파일 강화.
장현은 그것부터 하기 위해 자신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콘크리트 파일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사 스킬 외에도 대장장이 스킬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
그는 화로를 꺼내고 화염의 정령 쑤엉을 불렀다.
오랫동안 꺼내주지 않아 삐쳤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깜짝 놀라 정밀 탐색을 진행했고, 곧 쑤엉이 몸체만 남겨둔 채 정령계로 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쑤엉에게서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장현, 난 지금 상급정령으로 진화를 시작하려 해. 그걸 위해서는 정령체로서의 육신을 제련하는 것 외에도 정신력을 상급정령에 맞게 키워야 해. 그 때문에 지금 정령계로 의식은 떠나지만 몸체는 그대로 있을 거야. 내 몸체는 지금 의식이 없기에 예전처럼 일을 돕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간단히 불을 일으키는 능력이나 몸체에 각인된 스킬을 쓰는 정도는 가능할 거야. 그럼,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완전히 상급정령이 되면 그때 보자고. 이 무심한 삼배 삼배야. 내가 돌아오면 꼭 세 배로 갚으라고!]
‘이런, 이것을 이제야 봤다니…….’
장현은 자신을 자책했다.
거인족과의 전투가 끝난 후 쑤엉은 다시 몸속으로 돌아갔다.
당시 다른 일이 너무 많아 쑤엉에 대해 신경을 못 썼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자책이 되는 한편, 쑤엉이 상급정령으로 진화 중이라는 사실에 흥분이 되었다.
쑤엉이 상급정령이 된다면 신의 무기 제작에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은 콘크리트 파일을 강화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쑤엉의 몸체가 있으니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겠지.”
비유하자면 자동기계로 작업하던 것을 수동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1회차 때부터 수작업으로 아이템 제작을 해왔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대장장이 직업은 현재 고급에 이르렀고, 연성술은 아직 중급의 후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번 콘크리트 파일 작업으로 연성술을 고급 레벨로 올릴 생각이었다.
먼저,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사체를 꺼냈다.
마도공학 박람회에서 싸웠던 거인족의 사체들과 드림히트 성으로 갈 때 사막을 횡단하며 싸운 몬스터의 사체들.
그것들이 그의 앞에 놓였다.
‘이 정도 사체를 연성하면 어떤 금속이 나오려나.’
사체들을 연성해서 나올 결과물이 과연 몇 레벨의 금속일지 궁금했다.
‘대규모 건축공사를 해야 할 테니, 콘크리트 파일은 가능한 많이 필요하겠지.’
장현은 사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작해볼까.”
그가 연성술을 사용하자 양손에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하얀 빛은 사체들 사이로 퍼져나가더니 어느새 그 많은 사체들 모두를 덮었다.
이윽고, 사체들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사체는 모두 녹아 액체처럼 흘렀다.
다만 빛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장현은 손을 움직여 빛으로 금속의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금속은 기존의 콘크리트 파일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일 것이기에 덧댈 수 있도록 얇아야 했다.
장현이 생각한대로 하얀 빛은 틀의 형태로 변해갔고, 그 안에 있는 금속 또한 빛의 모양대로 변해갔다.
이제 금속의 특성을 부여할 차례.
연성술이 중급 후기 레벨에 오르면서 생긴 능력 중 하나가 원하는 특성을 금속에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존의 원재료인 사체의 성질과 유사한 특성만이 아닌, 전혀 다른 성질의 특성을 부여할 수도 있었다.
건축물의 기초에 쓰일 콘크리트 파일은 충격에 강하고 내구성이 좋아야 한다.
동시에 압축강도를 높여야 했다.
장현은 의식을 집중해 특성을 주입했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자 마지막 작업이었다.
특성주입이 끝난 후, 장현은 모든 기력이 소진되다시피 했다.
“어디, 이번에도 마계상점 목록에 등재될 수 있을 것인가?”
한동안 기다려봤지만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 대신 그가 생산한 콘크리트 파일의 명칭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재료 레벨 9의 금속을 연성하였습니다.]
[마계상점 리스트에 등재된 ‘PHC 파일’과 동일한 제품입니다.]
‘이런, 이미 존재하는 제품이었나.’
누군가가 이미 개발하여 마계 상점에 등재까지 마쳐놓은 것이다.
최초로 등재될 기회는 놓쳤지만, 재료 레벨 9의 금속을 연성해냈다.
[고급 연성술의 능력에 도달하였습니다.]
“됐다. 이제 연성술 마저 고급에 도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