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다시 헬릭스 성으로 (6)
안젤라의 물음에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퀄을 통과했으니 수주를 받을 수 있었지. 그동안 파인애플에서 극비사항으로 해달라고 요청해서 너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다. 이렇게 직접 보고 얘기하지 않으면 혹시 얘기가 새어나갈 수도 있어서 말이지. 너도 알다시피 파인애플 그룹은 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얘기가 새어나가면 즉시 엎어버리는 걸로 유명하잖느냐.”
“알죠. 그들이 얼마나 갑질을 하는지. 정말, 마왕을 배후에 끼고 있다고 온갖 갑질이란 갑질은 다 하잖아요. 그런데 제시카가 박람회 때 섀도우 마스크를 완성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제넥스 성 제품을 안 쓰고 우리 제품을 쓰는 거죠? 분명 제넥스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안젤라의 의문은 합당했다.
제넥스는 파인애플과 같은 마왕의 측근.
같은 편인 마왕 라인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주고 할 텐데.
대공 라인인 자신들 제품에 수주를 줬다는 게 의아했다.
“그게, 마왕의 허락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넥스의 섀도우 마스크는 기준에 못 미쳤던 모양인가 보더구나.”
“4K 화질을 구현할 수 있다고 자랑하더니, 결국 창조신의 패드에는 쓸 수 없는 제품이었군요.”
“그게 어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거겠니. 피엔디 조차도 못한 것인데.”
“그걸 우리가 해낸 거죠.”
안젤라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헬릭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가 해낸 거지. 창조신의 패드의 비밀이 밝혀질 날도 머지않았어.”
“대체 창조신의 패드의 정체가 뭘까요? 창조신의 권능이란 게 뭔지 궁금해요.”
“그것에는 함부로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단다. 마왕과 대공 전하가 아니면, 그 누구도 감당을 할 수 없는 물건이다. 자칫하다가는 목숨은 물론 일족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어.”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때, 장현이 헬릭스 성주를 찾아왔다.
로메드가 헬릭스에게 보고했다.
“성주님, 플레이어 장현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때마침 장현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차였기에 헬릭스는 승낙했다.
“들어오라고 해.”
장현은 헬릭스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성주님. 그리고 소성주님.”
장현은 안젤라와 눈이 마주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헬릭스에게 말했다.
“성주님. 영지로 돌아왔기에 인사드리러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안젤라를 보필하느라 수고했다. 듣자하니 드림히트 성에서 꽤나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고 하더군.”
그 말에 장현은 안젤라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음양합일신공을 익힌 얘기는 안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처럼 보필하느라 수고했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래도 자기 딸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수고했다고 할 수는 있겠지.’
장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헬릭스가 말한 놀라운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안젤라를 슬쩍 쳐다보기도 해봤으나 그녀는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결국, 장현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성주님께서 기회를 주셨기에 그저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도록. 날 찾아온 이유는 그저 인사만 하러 온 것이냐?”
헬릭스의 말에 장현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제가 드림히트성 에서 몽슈 백작님께 의뢰를 받은 게 있습니다. 의뢰의 내용은 보호막 형성 마스크를 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블랙펑키라는 아이돌의 아이템을 제작하는 일 역시 맡게 되었습니다.”
“안젤라에게 들었다. 그래서?”
“보호막 형성 마스크에 반도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전 마계에 반도체가 부족한 상황이라 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마스크 생산 자체도 진행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안젤라님께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지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헬릭스는 장현의 말을 듣고서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안젤라가 계속해서 칭찬했던 영지민이다.
더군다나 몽슈 백작에게 의뢰까지 받았다고 하니, 관심이 조금 더 갔다.
지금 장현이 한 말은 단순히 몽슈 백작이 요구한 마스크를 손수 제작해서 선물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대량 생산을 하겠다는 것이다.
마스크는 헬릭스가 관심을 둘 만한 중대 사항이 아니었다. 몽슈 백작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해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장현에게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재밌는 녀석이군.’
파운드리는 주문을 받아서 위탁생산하는 공장이다.
패드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반도체.
본래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건축한 이유 또한 창조신의 패드를 복구할 수 있는 반도체 기술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마왕은 통합 반도체 제조 회사인 IDM을 가지고 있다.
반도체 칩 설계부터 제조까지 일원화된 공장이다.
반면 대공은 반도체 제조 공정을 설계부분인 팹리스와 제조부분인 파운드리로 분리했다.
헬릭스가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은 설계를 제외한 제조만을 전문으로 하는 공장이다.
지금 장현이 한 말은 마스크용 반도체 설계도는 있으니, 제조 공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달라는 말이었다.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장현에게서 흥미를 느꼈다.
창조신의 패드에 필요한 반도체는 3나노미터 공정 반도체이다.
그게 최적사양이고, 최소사양으로해도 5나노미터 공정 반도체는 있어야 했다.
현재 마계의 반도체 기술은 6에서 7나노미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헬릭스 성에서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은 두 개다.
제1공장은 3나노미터, 제2공장은 5나노미터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고작 마스크를 생산하는데 이 최신 시설을 사용하게 해달라니.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요구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생각하면 그냥 거부하기도 좀 그렇군.’
헬릭스의 고심이 깊어졌다.
본래 예정은 폴더블 패드에 공급할 반도체를 가장 먼저 생산하려고 했었다.
폴더블 디스플레이에 필요한 힌지 모듈은 개발 완료했기에, 폴더블 패드를 제작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거기에 반도체까지 고성능으로 탑재한다면. 창조신의 패드에 가까운 제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창조신의 권능은 없지만 파손된 부품을 대체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다.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그렇기에 그가 회사채까지 대거 발행하면서 자금을 조달한 것이었다.
파운드리 설비는 반도체 라인 중 가장 투자비용이 많이 든다.
지금처럼 인간계에서 가져온 반도체 기반의 기계들이 주류가 되어가는 시대에 반도체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지구에서 가져온 기계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많은 마계의 귀족들이 반도체 설계도만 제작하는 팹리스에 주로 진출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터무니없이 비싼 설비 공장 구축비용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설비 공장을 갖춘 파운드리 업체가 자연스레 갑이 됐다.
파운드리 업체를 보유한 마족은 극소수.
헬릭스가 바로 그 극소수의 마족이었다.
헬릭스는 고심 끝에 장현을 보며 물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은 조만간 완공될 예정이다. 이미 공장에 들어갈 장비는 드워프들이 만들어놨기에 공장이 지어지는 대로 곧장 배치하도록 할 것이다. 부품 또한 주문해놨으니 길어도 두 달이면 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헬릭스의 대답에 장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혹시 몇 나노 공정을 지원하는지요?”
“제1공장은 3나노, 제2공장은 5나노다.”
“5나노공정을 지원하는 제2공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정도면 보호막 형성 마스크용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장현의 요구에 헬릭스는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2공장은 폴더블 패드인 플립에 납품할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다. 과연 마스크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게 플립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플립용 반도체는 단가도 비싸게 받을 수 있었다.
플립용 패드가 최소 800만대 팔릴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제2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도 800만개로 추정할 수 있었다.
장현은 헬릭스의 물음에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마스크용 반도체가 패드용 반도체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헬릭스는 장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봐라.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할 경우, 날 기만한 죄를 물을 것이다.”
장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설명했다.
“현재 보호막을 형성하는 마스크는 성능이 아주 조악합니다. 이유는 설계부터 7나노수준의 반도체를 상정하고 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계한 마스크는 최소 5나노 이상의 반도체를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완전 다릅니다.”
헬릭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장현이 잠시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쉽게 말해 7나노짜리 반도체로 만들어진 대다수의 마스크 보호막은 예방율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보호막 자체가 무척이나 얇기 때문입니다. 반면 5나노미터 반도체로 제작된 마스크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 한 바이러스를 완전하게 예방할 수 있습니다.”
장현은 설명 후 헬릭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알아들은 듯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계 전역은 제가 만든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거죠. 마스크를 쓸 인원을 생각해보세요.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마족뿐 아니라 플레이어들도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패드를 구매할 수 있는 시장과 마스크를 구매할 시장은 규모 자체가 비교가 안됩니다.”
헬릭스는 장현의 말을 다 듣더니 피식 웃으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네가 말한 경우는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마계에 퍼져서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하는 상황이 와야 한다는 거지.”
그것이 장현 주장의 약점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마계에 퍼질 것을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회귀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전에 없었던 대재난이 될 것입니다.”
“마계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전에 없었던 대재난을 운운하는지. 가소롭구나. 그러나 네 목을 걸겠다고 하니 좋다. 허락해주겠다. 사실 네 목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안젤라와 몽슈 백작이 네 가치를 인정했다고 하니. 한번쯤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헬릭스의 대답에 장현은 크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드워프 족장에게는 내가 말해두겠다. 준비한 설계도를 드워프 족장 포프에게 전해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장현은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헬릭스의 허락이 떨어진 후, 장현은 곧장 드워프 족장 포프에게로 향했다.
“포프님, 성주님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지금 짓고 있는 반도체 파운드리 2공장은 제가 준비한 이 설계도대로 생산하여 주십시오.”
포프는 장현이 건넨 설계도를 받아서 훑었다.
설계도 상단에는 마스크용 반도체 설계도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전 성주님께 연락은 받았소. 혹시 이 설계도는 장현 그대가 직접 만든 것이오?”
포프는 설계도를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계도는 매우 정밀했다.
최소 5나노미터에서 3나노미터 정도 되는 수준의, 미세공정이 요구되는 설계도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물론 백신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긴 할 겁니다.”
“거, 백신이 언제쯤 개발될 수 있겠소? 백신을 제작할 수 있는 연구소는 마르바스 연구소밖에 없는데, 거기부터 초토화되었다고 하니. 희망이 있을지 모르겠구려. 그래도 이 반도체가 들어가는 마스크라면 보호막 성능은 현재보다 훨씬 개선되겠군.”
“물론입니다.”
장현은 포프에게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백신도 내가 개발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