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다시 헬릭스 성으로 (3)
이 사태는 분명 눈앞에 있는 장현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에게 직접 해명을 듣고자 포개어진 손부터 떼어내려 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도리어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그러자 안젤라는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장현이 자신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장현은 안젤라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말도 할 수 없고 시스템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음양합일신공의 오묘한 효능 중 하나인 표지였다.
음양합일신공을 함께 수련한 자는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기에, 서로 간에 표지를 내공으로 심어두어 아무리 멀어도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장현은 운기행공을 하며 심어둔 표지로 그녀에게 말했다.
‘안젤라님, 지금은 중요한 순간이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안젤라는 아직 그에게 표지를 심지 않았기에 장현의 말을 들을 수는 있으나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의 말에서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말투였기에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그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젤라가 가만히 있자 그녀의 몸속으로 마나 기운이 다시 도도하게 흘러들어왔다.
‘무척 편안하고 상쾌해.’
장현의 손을 통해 들어온 기운은 그녀의 몸속 혈도를 돌아다니며 전신을 풀어주었다.
조금 전의 쾌감과는 또 달랐다.
정신이 들기 전 무의식 속에서 느꼈던 어머니.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있을 때와 같이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감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찌릿찌릿한 요상한 자극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그 자극은 몸속을 움직이는 기운에서 느껴졌다.
‘이 기운은 대체 뭐지? 장현은 원래 이런 기운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기운이 마족인 내 몸속에 이렇게 부작용 없이 들어올 수가 있는 거지?’
그녀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당장에라도 붙잡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답답했다.
자극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고, 어느 순간 그녀의 단전에 내공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장현은 음양합일신공의 내공이 안젤라의 단전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기운을 회수해야한다.
다만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슬쩍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을 살며시 떴다가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을 보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안젤라도 그 기분을 느꼈구나.’
기분이 묘했다.
그녀가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계속 함께 운기행공을 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생겨났다.
‘일단은 끝내야 되겠지.’
어느덧 내공운기가 완전히 끝나고 그녀의 몸속에 있던 기운을 자신의 단전으로 갈무리했다.
안젤라 역시도 그것을 느낀 듯했다.
슬며시 포개어진 손을 떼자 그녀 역시 손을 뗐다.
그때 로슈 집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젤라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로슈?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지켜본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일단 자율주행 모드로 바꿔주십시오.”
“알겠다.”
그녀는 주행 모드 버튼을 눌러 자율주행 모드로 전환했다.
안젤라는 운전대에서 나와 장현을 쳐다보았다.
“장현, 소상히 내게 말해야 할 것이야. 너의 얘기를 들은 후 로슈에게 사실인지 확인토록 하겠다.”
로슈는 겉으로 일어난 일만 알 수 있을 뿐.
몸속에서 일어난 일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현에게 먼저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속에 더 이상 마나가 없다. 심지어 마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기조차도 없다.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마나와 마기를 대신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아랫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해답을 아는 자는 장현 뿐이다.
“안젤라님, 조금 전 안젤라님은 지네차를 수동으로 조종하다 마나 포인트를 모두 소진하고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심지어 코피마저 흘리고 계셨죠. 저는 안젤라님께서 코피를 흘리는 증상을 체내의 마나 포인트가 고갈되어, 원기가 훼손된 걸로 판단했습니다. 로슈 집사님과도 해결 방법을 찾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안젤라님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젤라님께서 깨어날 수 있도록 저의 마나 포인트를 안젤라님의 손에 포개어 주입기에 투입했습니다. 안젤라님의 손을 강제로 떼어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저의 마나 포인트마저 모두 고갈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때까지도 안젤라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자칫하다 저와 안젤라님 둘 다 마나 포인트가 고갈되어 목숨이 위험해질 것만 같았습니다.”
“…….”
“그때, 제가 알고 있던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음양합일신공이라는 무림인들의 내공 스킬이었습니다. 그 신공은 남녀 둘이서 동시에 익히는 것만 가능한 대신, 상대방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둘의 기운 모두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음양합일신공만이 안젤라님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벌어진 상황입니다. 허락 없이 안젤라님에게 스킬을 사용한 저를 죽여주십시오.”
장현은 말을 마치며 무릎을 꿇었다.
물론 그는 죽여 달라는 말이 진심도 아닐뿐더러. 이미 내공 운기를 함께 경험했던 그녀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란 계산 하에 최선의 판단을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음양합일신공의 단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면 안젤라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안젤라는 심란한 표정으로 장현을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로슈 집사에게 물었다.
“로슈, 조금 전 장현이 한 얘기가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안젤라님. 죄송하지만 그때는 저도 다른 방법이 없었고 실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안젤라님을 다시 뵐 수 있게 되어 천만 다행입니다.”
로슈는 안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젤라는 로슈에게서 장현의 말이 진실하다는 걸 확인하자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있지 말고 일어서. 이제 음양합일신공이라는 것과 내 몸에 생긴 변화에 대해 설명해. 내가 알기로 너의 원래 기운도 이것과는 달랐던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다. 원래 제가 익힌 내공은 독공계열의 내공운용법이었으나, 그것으로는 안젤라님을 도울 수가 없기에 스킬로 내공을 바꿨습니다. 저와 안젤라님의 기운을 동시에 같은 계열로 바꾼 스킬, 그게 바로 음양합일신공입니다.”
“그런 게 스킬로 가능하다니.”
안젤라는 장현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내공이란 건 자연 속에 있는 마나를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 몸 안에 쌓는, 무림세계 인간들의 기술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내공이라는 것이 고위 마족인 자신의 신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혹시 이것을 이전으로 돌이킬 수는 없는 거냐?”
“제가 아는 한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압니다. 이미 체질 자체가 음양합일신공에 적합한 상태로 바뀌었기에, 내공을 흐트러트린다고 하여도 다시 이전 체질로 바꿀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장현의 말을 듣고 나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도는 거 같았다.
자율주행으로 맡겨놓았으면 되었을 것을.
괜한 오기를 부리다가 가진 마기를 다 잃고 말았다.
그저 단순히 즐길 거리라고 생각해 한 행동이 엄청난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장현으로 인해 얻게 된 음양합일신공뿐이었다.
“그럼 이 음양합일신공이라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냐?”
“지금부터 제가 운기할 수 있는 구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혼자서도 수련할 수 있지만 혼자하면 효과가 반의반밖에 안됩니다. 제대로 된 효과를 보려면 같은 기공을 수련한 이성과 함께 수련을 해야 합니다.”
“윽!”
장현의 말에 안젤라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정신이 깨었을 때 느낀 자극과 쾌감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련을 해보자꾸나. 나도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으니.”
“알겠습니다.”
안젤라가 더 추궁하지 않자 다행이었다. 장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젤라는 장현과 운기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이성훈을 운전석으로 보냈다.
“너는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며 무슨 일이 생기거든 로슈 집사와 상의하도록 하여라. 지금부터 나와 장현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결코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운전은 로슈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저 대기하기만 하면 되느니라.”
“알겠습니다. 소성주님.”
이성훈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았기에 눈치껏 행동했다.
장현과 안젤라가 운기행공을 할 때 보인 표정과 반응. 이 모든 걸 봐온 그였다.
눈치껏 행동하지 않다간 큰 변을 입을 수도 있었다.
안젤라가 자신의 치욕거리를 아는 이성훈을 죽여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성훈은 안젤라에게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성훈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흠, 흠.”
이성훈 마저 사라지자 그녀는 장현을 데리고 객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 정도면 이성훈도 로슈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문득 안젤라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 또한 그리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조금 전 느낀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안젤라가 말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냐?”
“예, 바닥에 편하게 앉아 양손바닥을 앞으로 내미십시오.”
장현은 그녀에게 말하며 자신 역시 바닥에 앉아 양반다리를 한 채 양손바닥을 내밀었다.
안젤라는 그의 앞에 앉아 같은 자세를 취했다.
이내 장현의 손바닥이 안젤라의 손바닥에 맞닿았다.
안젤라는 잠시 흠칫했지만 아까의 운기행공 역시 손을 접촉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만히 있었다.
곧 장현의 양손과 맞닿은 두 손에서 내공이 전해져왔다.
내공은 천천히 안젤라의 팔에서 시작되어 다리를 지나 발끝으로, 또 등허리를 지나 머리를 돌아 양팔을 통해 다시 장현에게로 전달됐다.
그 과정에서 안젤라는 전과 같은 강한 쾌감을 느꼈고,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소리를 애써 억지로 삼켰다.
자신이 낸 소리를 장현이 듣는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웠던 것이었다.
내공이 장현에게 넘어간 순간부터는 쾌감보다는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자리했다.
그녀는 다시 운기행공을 익히는데 집중했다.
‘안젤라님, 지금 기운이 지나가는 경로를 기억하십시오. 앞으로 혼자서 운기행공을 하실 때도 그 경로 그대로 기운을 돌려야 합니다.’
장현이 다시 표지를 통해 말을 건네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러는 한편, 다시금 운기행공을 통해 생겨난 기묘한 감정이 두 남녀의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상대방의 모든 걸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자신 역시 상대방에게 모든 걸 이해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만이 이해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소득인데.’
장현은 안젤라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자신 또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호감이라는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모태솔로였지만 그 차이를 알 수가 있었다.
애틋하면서 안쓰러우며 보살펴주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안젤라를 유혹하라는 퀘스트는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계속해서 운기행공을 하며 마나를 쌓고 서로에 대한 감정도 키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