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드림히트 성 (15)
이선전의 사료 공장에서 나온 장현은 이성훈에게 물었다.
“이성훈 주무관, 아까는 이선전 씨가 있어서 말을 못했는데, 혹시 대두박이라고 아나?”
“물론입니다. 대두에서 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 아닙니까?”
“역시! 그럼 우리 영지에서도 대두를 키우는 거지?”
“그렇습니다. 대두뿐 아니라 어지간한 곡물은 진작 다 갖춰놓고 농사짓고 있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우리 영지에 사료 공장을 만들어볼까 해서. 방금 받은 샘플을 보니 대충 원재료와 배합비율을 알 수 있겠더라고. 그 정도면 만들어볼 만하지.”
“정말 장현님은 사기캐가 따로 없군요. 이선전 씨가 알았다면 뒷목잡고 쓰러지겠는걸요. 사실 저희 영지에서도 사료는 외부 수입도 하지만 자체 제작도 어느 정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우리 영지에 사료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있었나?”
“아, 사람은 아니고 리자드맨 중에 있었습니다.”
“리자드맨?”
“네, 리자드맨 영지민 중에 크로커다일족 밑에서 사료 만드는 일을 하던 자가 있었더라고요.”
“오호, 그런 일이 있었군.”
“네. 크로커다일족은 아무래도 육식을 하다 보니 마계돼지나 감자두더지 같은 동물들을 계속해서 사육해왔더라고요. 그들은 사육하는데 나름 역사가 있었습니다. 지금 크로커다일족들은 대부분 죽고 없지만 그 놈들이 리자드맨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을 때 자신들의 사료 제작 레시피를 다 알려줬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그 사료 제작 방법이 우리 손에 들어온 거고요.”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럼 그 사료와 저 이선전 사료 공장의 배합사료를 비교해보고 더 좋은 사료를 만들어 보도록 하자고.”
“알겠습니다. 그것도 우리 영지의 사업거리가 되는 거지요?”
“그렇지.”
“네, 알겠습니다.”
이성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갈수록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영지에 가는대로 편히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배치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장현이 언급한 일들을 혼자서 하다가는 과로사로 죽을지도 몰랐다.
반면, 장현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감자두더지와 마계돼지의 사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가 안젤라에게 말했다.
“안젤라님. 혹시 성에 여유 땅과 자본금이 있으십니까?”
“장현,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러는 거야? 땅과 자본금이라니. 사료 공장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저는 이게 영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고 필수적인 사업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 문제는 꼭 챙겨야 하는 부분입니다.”
장현의 말에 안젤라는 머리를 짚었다.
또 난제를 들고 온 장현 때문이었다.
이렇게 영지의 발전에 힘쓰는 그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일만 생각하는 그가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모처럼 드림히트 성 외곽으로 드라이브 나온 길 아닌가.
구경할 곳도 얼마나 많은데 굳이 사료 공장을 들르자고 하더니.
이번엔 사료 공장을 지을 땅과 투자금을 내놓으라는 소리를 한다. 머리가 아팠다.
“너희 플레이어들이 있는 영지 말고 영지를 둘러싼 성벽 밖에 남는 땅이 있어.”
“거기는 독 안개가 있어서 못 들어가는 땅 아닌가요?”
“그건 영지전이 끝나는 대로 해결됐어. 지금쯤 안개는 사라졌을 거야.”
“영지전 때는 도망치는 자가 있을까봐 일부러 독 안개를 풀어놨던 거군요.”
“그런 것도 있지만 영지 바깥을 일괄적으로 재정비하기 위해서야. 영지 밖에는 헬릭스 성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어. 아마 너희 둘 다 존재조차 몰랐겠지만.”
“마을이 있다고요?”
안젤라의 말에 장현은 크게 놀랐다.
성주성과 영지, 이 두 곳 외에는 사실 가본적도 없었고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현의 반문에 안젤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마을이 있지. 아무도 없는 곳에 성이 생기고 성주가 부임했겠어?”
“하긴, 그렇긴 하군요.”
성주는 성내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같은 존재다.
그간 장현은 성주가 플레이어들을 관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목적은 원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했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다양한 마족들이 살고 있어. 로메드 경비대장 알지? 그도 그곳 출신이야. 크로커다일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도 있어. 물론 그들은 영지전에서 네가 상대한 크레온과 그 부하들과는 다른 부족이야. 그들 외에 또 다른 마족들도 꽤 있어.”
안젤라의 설명에 장현은 헬릭스 성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과 테세리움을 얻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주변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 그 마을을 재정비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래서 독 안개를 뿌려놓았던 것이고요?”
“그래. 영지에는 너희 플레이어들의 거주지역과 기타 필수적인 시설만 들어갈 거고, 나머지 공장 같은 생산시설들은 모두 영지 밖에다 지을 거야. 그래서 그동안 방치되어있던 땅들을 갈아엎기 위해 독 안개를 뿌려놓았던 거야.”
“그럼 거기 살던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지. 남은 정비예정구역 주민들도 곧 영지 내 남는 공간으로 이주하거나 다른 정비예정지역으로 이주하게 될 거야. 그러면 다시 그 지역은 독안개로 가득 차게 돼. 모든 게 부식되고 새로운 시설을 건설할 수 있도록 말이지.”
“아, 저희가 영지에 오기 전부터 계획이 되어있었던 거군요.”
“그래. 그렇잖아도 원주민들로부터 재개발을 허용해달라고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왔었거든. 그들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할 수도 없어서 보류만 하다가, 용도를 정할 수 있게 되서 하나씩 추진하고 있는 거야.”
“재개발이라니. 허 참.”
장현의 허탈한 웃음에 안젤라가 의아한 듯 쳐다봤다.
“왜 그래?”
“아니, 재개발 정비구역이 있다는 게 너무 예상외였습니다. 다행히 공장을 지을 땅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그냥 너무 의외였습니다.”
“그래? 그게 이상한 일인가. 노후한 주거지를 허물고 깨끗하고 정비된 주거지를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만 그 정도 사업을 진행하려면 자금을 투입할 건설사가 수익성이 있어야 했는데 그동안은 그 수익성이 없어서 못했던 거지.”
“그렇군요. 그럼 그곳에 사료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겁니까?”
“사료 공장뿐 아니라 마계돼지와 감자두더지를 사육하고 도축하는 시설까지 같이 만들 거야. 도축한 고기는 생고기와 가공육으로 만들 수도 있는 축산 클러스터라고 하면 되려나?”
“도축에다 가공육까지 되는 축산클러스터라. 제 생각보다 훨씬 큰 시설일 거 같군요.”
“물론이지. 그 뿐 아니라 그 옆에 섀도우 마스크 공장과 힌지 공장까지 함께 들어갈 거야. 또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도 새로 짓게 될 테고.”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이요?”
“그래. 보호막 형성 마스크를 생산하려면 반도체가 필요하다며. 지금 전 마계가 반도체 수급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어. 갈수록 더 부족해질 거야.”
“갑자기 그렇게 된 이유가 있나요?”
“너희 지구에서 가져온 문명 때문이지. 자율주행 지네차 뿐 아니라 드론, 패드 등 모든 것에 반도체가 들어가. 거기다 마스크 형성 보호막에도 반도체가 들어간다면, 아마도 무조건 반도체 쇼티지 현상에 직면하게 될 거야. 그 때를 대비해서 투자하는 거지.”
“자금이 엄청나게 투입되겠는걸요.”
“당연하지. 이거 때문에 우리 헬릭스 성에서 회사채를 얼마나 발행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걸? 물론 넌 아직 그 정도 개념은 없을 테니 말해줘도 모를 테지만.”
“회사채는 압니다. 그걸 발행해도 사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야 대공 전하와 우리같은 대공계 귀족들이 사줬지. 외할아버지와 지인 분들도 사주셨고. 뭐, 이 이야기는 됐어. 어쩌다가 나왔는지 모르겠네.”
안젤라는 거기서 대화를 종료했다.
장현은 조금 전 그녀와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헬릭스 성에서 그런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줄이야.
너무 영지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작 영지는 헬릭스 성의 관할 하에 있고, 헬릭스 성주가 총 지배자나 다름없는데.
사실, 한낱 영지민 플레이어에 불과한 장현 일행으로서는 알기가 불가능한 내용들이긴 했다.
안젤라가 우연찮게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다음 경기인 ‘플레이어 런 킹덤’이 시작될 때까지도 몰랐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이번에 얻은 정보 덕에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새로운 변수를 고려할 수 있게 됐다.
장현은 조금 전 안젤라에게 들은 얘기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함께 다시 지네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녔지만, 계속해서 딴생각에 빠져있는 장현의 모습에 안젤라는 화가 치밀었다.
“야, 너 대체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거야? 지금 놀러 나와서 이게 뭐야? 이럴 거면 그냥 숙소에 있던가.”
“헬릭스 성의 숙원 사업이자 미완성 제품인 섀도우 마스크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안젤라는 장현의 대답에 황당하기도 하고 짜증이 치밀었다.
드라이브 도중 갑작스레 사료 공장을 방문한 것도 못마땅한데.
다시 드라이브를 하나 했더니, 이번엔 또 섀도우 마스크에 대해 생각한다고 멍하게 있었다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 고함을 빽 질렀다.
“뭐, 섀도우 마스크? 갑자기 그건 또 왜? 그리고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는데?”
“……조금 전 퀘스트가 떴습니다. 안젤라님을 도와 섀도우 마스크를 완성시키라고요.”
물론 이건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다.
장현은 아직 헬릭스 성과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루빨리 안젤라의 사랑을 받아 창조신의 패드에 접근해야 하는데, 아직 그녀와의 관계가 아무런 진척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섀도우 마스크 공장을 지을 것이라는 말에 번뜩 떠오른 게 있었다.
대공의 박람회에서 안젤라의 힌지 모듈과 함께 공동 우승한 제품인 섀도우 마스크.
이 섀도우 마스크를 완성 시킨 건 제넥스 성이었다.
창조신의 패드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품들이라 할 수도 있는 이 두 가지.
헬릭스와 제넥스는 서로 모시는 주군이 다른 경쟁자 관계였다.
제넥스가 개발한 섀도우 마스크를 헬릭스에게 제공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들은 서로가 아직 개발하지 못한 패드 부품을 개발해내기 위해 사력을 다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섀도우 마스크를 자신이 완성시킨다면, 안젤라의 사랑도 얻고 창조신 패드의 비밀에 대해서도 파고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얘기를 들은 안젤라가 기뻐하기는커녕 인상만 잔뜩 찌푸렸다는 것이다.
“뭐, 섀도우 마스크의 완성시키라는 퀘스트? 그게 너한테 왜 떠?”
“시연회 때 안젤라님을 도와 힌지 모듈을 조립해서 그런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금 전 안젤라님께서 헬릭스 성에 섀도우 마스크 공장을 짓는다고 하실 때 퀘스트가 떴습니다. 나머지는 이미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상태인데 섀도우 마스크만 아직 완성이 안 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장현이 고민 끝에 명분으로 내세운 게 바로 이것이었다.
그 외에는 적당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겪어봤던 퀘스트 알림을 떠올려보면, 이런 순간에 갑작스런 퀘스트가 충분히 나올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다행히 안젤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에휴, 더 이상 드라이브는 안 되겠다. 그만 돌아가자.”
안젤라는 더 이상 경치를 구경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숙소로 돌아가서 그냥 일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때 장현은 다시 한번 안젤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안젤라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지금 긴급알림이 또 떴습니다.”
장현은 얼마 전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필수품들을 찾는 마계재난안전센터에서 긴급알림이 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안젤라는 의심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긴급알림? 무슨 내용이야?”
“플레이어는 즉시 자신의 영지로 복귀하라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