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드림히트 성 (12)
장현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그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인지 로슈 집사가 물었다.
[장현님, 혹시 찾으시는 게 이게 아닌가요?]
[아니요. 맞습니다.]
[네, 그 브랜드를 쓰시면 됩니다.]
[잠깐만요. 한 가지 더요.]
[무엇인가요?]
[제가 작업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블랙펑키 의상을 만들 전용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주셨으면 합니다. 필요한 재료는 작업실부터 확보하고 나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몽슈 백작님께서 옷을 만드실 때 쓰던 작업실인데, 장현님께서 요청하면 제공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해당 주소가 표시된 지도를 전송해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장현에게 지도가 전송되었다.
“이성훈 주무관. 장소를 옮겨야겠어. 지네차를 호출해.”
“네.”
이성훈은 장현의 말에 바로 지네차를 호출했다.
곧 그들은 로슈가 알려준 작업실 위치로 자율주행 지네차를 타고 이동했다.
얼마 후 지네차가 멈춘 곳은 원형 돔 형태의 건물 앞이었다.
“여기로군.”
“여기가 장현님이 새로운 옷을 만들 작업실인가요?”
“아마도. 일단 들어가 보자고.”
“네.”
작업실은 몽슈 백작의 취향이 담겨있는 건지 온갖 재질의 원단과 옷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원단들 앞에는 마네킹과 책상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어디서건 작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벽 한 쪽에는 대형 디스플레이 장치가 있었고, 그곳에는 패션쇼로 보이는 영상이 계속해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대형 디스플레이에서 몽슈 백작의 모습이 나오며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드림히트 성의 걸작 ‘몽슈와 마리’ 전시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은 이 몽슈가 젊은 시절 의상 디자인에 입문할 때부터 드림히트 성주가 되었을 때까지 다루었던 모든 옷감들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원단이 비치된 테이블에는 패드가 각각 설치되어 있으니 패드를 터치하시면 해당 옷감으로 제작했던 옷들의 디자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저의 작업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소리가 끝나면서 젊은 시절의 몽슈 백작으로 보이는 남자가 의상제작에 전념하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여기는 몽슈 백작의 의상 전시실인가 보군.”
장현은 작업실이었으면서 이제는 전시실의 역할을 하는 ‘몽슈와 마리’ 전시장 곳곳을 둘러보며, 옷감을 살피고 그 옷감이 들어간 옷들을 살폈다.
“여기의 디자인들을 보니 영감이 떠오르는군.”
장현은 가만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붙잡고 디자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곧 그는 상상한 디자인을 구체화했다.
그것은 삼두견의 꼬불꼬불한 털가죽을 원단으로 한 의상이었다.
이미지를 구체화한 장현은 그대로 실체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전시장에서 삼두견 털가죽으로 만든 원단을 찾았다.
“이거면 되겠군.”
회색빛, 흰색, 노란빛을 띤 세 가지 색의 원단을 집어 들었다.
이어 가위와 자를 꺼냈다.
한 때 대한민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꼬불이.
장현의 오랜 기억 속에서 꺼낸 의상 디자인이었다.
“이 주무관, 그만 일어나.”
“어라, 제가 잠시 잠이 들었었군요.”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민망할 정도였어. 그래도 이제 가야해서 어쩔 수 없이 깨웠어.”
“죄송합니다. 그럼 옷은 다 만드신 건가요?”
이성훈은 눈을 비비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장현이 옷을 만드는 걸 처음에는 지켜봤지만, 사실 그걸 보고 있는 건 그에게는 꽤 지루한 일이었다.
옷을 입거나 예쁜 옷을 보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종류였다.
장현의 작업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었다.
“그래, 이건 이 주무관 자네 것이야.”
장현이 이성훈에게 내민 외투는 그의 눈에도 상당히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등 뒤쪽에는 MPL이라는 로고가 큼직하게 붙어있었고, 앞쪽에는 왼쪽 가슴 부위에 MPL 로고가 작게 붙어있었다.
“어라, 이건 후리스 아닙니까?”
이성훈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후리스.
털이 꼬불꼬불하다고 해서 붙여진 꼬불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던 옷.
이건 대한민국에서도 꽤 잘나가던 옷이었다.
그렇기에 이성훈 역시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직장에서 직원들이 하나씩은 입고 다녔고, 학생이고 어른이고 가릴 것 없이 입을 정도로 유행했던 옷.
“맞아. 이거라면 마계에서 유행한 적이 없으니 잘 팔리지 않을까 생각했어. 군수용으로도 딱 어울리지 않나.”
“분명 그렇긴 하지만, 여기 마족들에게도 먹힐지는 의문인데요.”
“몽마족은 그나마 인간이랑 가장 체형이 유사하지.”
“그렇죠.”
“거기다 안젤라와 몽슈 백작, 마리 부인을 만나보니. 그들은 인간들의 문화를 좋아하더라고. 물론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 때 우리나라에서 대히트 친 상품이니 마계의 틈새시장도 충분히 노릴 만한 상품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남은 건 몽슈 백작의 마케팅에 달려있겠지.”
“장현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이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리스를 걸쳤다.
장현은 이성훈에게 준 후리스 말고도 몇 벌을 더 만들었다.
하나는 로시에게 만들어주기로 약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젤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후리스를 들고 먼저 안젤라를 찾아갔다.
이 옷으로 그녀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
장현이 안젤라의 거처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패드로 온라인 서핑을 하는 중이었다.
똑, 똑.
“안젤라님. 장현 플레이어가 왔습니다.”
백작성의 시녀가 장현의 방문을 알렸다.
“들어오라고 해.”
장현이 안젤라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가슴골이 보이는 시스루 파자마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홍차를 마시며 패드를 보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어 장현을 쳐다봤다.
안젤라의 모습은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럴 땐 정말 예쁘다니깐.’
장현도 건장한 남자인지라 그녀의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손에 든 건 뭐고?”
안젤라가 턱으로 장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리키며 물었다.
스윽.
“안젤라님께서 지시한대로 블랙펑키에게 만들어줄 아이템 중 먼저 로시에게 줄 옷을 만들어봤습니다. 안젤라님께서 한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장현의 말에 안젤라가 미묘한 어조로 말했다.
“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난 아무거나 안 입는데. 일단 줘봐.”
“네.”
안젤라는 장현에게서 회색 후리스를 건네받아 바로 걸쳐 입어봤다.
그녀는 후리스를 입은 후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이어 전신 거울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이거 독특한 디자인이네. 처음 보는 스타일이야. 나쁘진 않네. 어때,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녀는 감상을 털어놓더니 이윽고 장현에게 물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장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속에는 파자마를 입은 채 후리스를 걸친 안젤라는 모델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어울렸다.
장현은 가만히 그녀를 보며 고민하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이 맘에 안 들었을까.
안젤라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잘 어울린다면서 그 표정은 뭐야?”
“그냥 안젤라님을 모델로 해서 홍보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장현의 말에 안젤라는 얼굴이 붉어졌다.
“뭐라는 거야, 이 멍청아. 엉뚱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됐어.”
그녀는 장현을 질책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어 그녀는 지퍼를 올린 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나쁘지 않아. 흥행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 옷 만드는데도 소질이 있네. 다소 투박해 보이긴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이야 전문가들에게 맡겨서 손보면 더 나아질 거고.”
“감사합니다. 소성주님.”
“이제 드림 마케팅이랑 상의해볼게. 그 뒤에 얘기가 잘되면 생산은 우리 영지에서 하게 될 거야. 그럼 공장도 지을 거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드림 마케팅이라고 하셨는데, 그 곳은 어떤 곳인가요?”
“이름을 들어서 알겠지만 할아버지의 계열사 중 하나인 마케팅 회사야. 너의 그 후리스라는 특이한 의상을 잘 팔려면 그곳의 도움이 필요해. 마케팅에 있어서는 마계 최고 수준이거든.”
“그렇군요.”
안젤라는 장현의 의문에 답해준 후 곧장 시녀를 불러 옷을 준비하게 했다.
“오랜만에 기분 좀 내야겠어.”
이어 그녀는 장현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내가 옷을 하나씩 바꿔서 입고 나올 테니, 넌 그때마다 어떤 느낌인지 자세하게 얘기하도록 해. 너의 센스를 좀 테스트해야 겠어.”
“네 알겠습니다.”
눈요기를 하게 되었기에 좋다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젤라가 스무 번째 옷을 새로 입고 나와서 물었다.
“이건 어때 보여?”
이번에는 어깨 위를 드러내놓은 검은 원피스였다.
풍만한 가슴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게 입은 모습에 저절로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지쳐있던 장현의 눈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이 옷도 잘 어울립니다. 마치 검은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옷이군요.”
같은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안젤라의 명령에, 장현은 결국 동물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검은고양이라. 그거 너희 지구에만 있는 동물이잖아. 칭찬으로 한 말이야?”
“네, 물론이죠. 저흰 매력적인 여성을 칭찬할 때 고양이의 매력에 비유합니다.”
“어째서지?”
안젤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만약 변변치 않은 대답을 할 경우, 자신을 농락한 죄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만 보면 이 자식 은근히 날 놀리는 거 같단 말이야.’
안젤라는 장현의 말에서 뭔가 자신을 놀리는 기색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설레는 이 기분은 뭘까.’
그녀는 장현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할 때, 되레 설레어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화가 나면서도 좋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것은 장현이 어설프게나마 그녀를 유혹하려 한 게 조금씩 효과를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장현은 검은고양이와 매력적인 여성이란 단어를 사용해 그녀를 유혹하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장현은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눈을 보고 말했다.
“고양이는 일단 귀엽죠. 생김새만으로도 귀여운데 하는 행동을 한번 보면 더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다가와서 다리에 비비적거리다가도 막상 쓰다듬으려고 다가가면 도망가 버려요.”
“그게 다야? 칭찬이라고 생각하기 힘든데.”
장현의 대답에 실망한 안젤라.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아직 얘기가 끝난 게 아니랍니다. 고양이가 늘어져 자다가 몸을 일으킬 때는 얼마나 자태가 유려한데요. 오죽하면 그런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캣츠가 지구에서 가장 히트친 작품이겠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자태가 유려하다는 말에 내려갔던 입꼬리가 다시 슬며시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알겠어. 이제 그만 나가봐.”
“네.”
“후리스라는 옷은 잘 만들었어.”
장현이 돌아서 나가려고 할 때, 안젤라의 목소리가 등 뒤로 날아왔다.
그는 씨익 웃으며 방을 나갔다.
장현이 나간 뒤 안젤라는 패드에서 ‘고양이’를 검색했다.
다양한 고양이의 사진과 영상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게 고양이란 말이지. 확실히 귀엽긴 하네.’
동글동글한 얼굴에 처진 눈이 뭔가 나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안젤라는 문득 거울을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계란형의 얼굴은 고양이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었다.
‘그는 내 어떤 점을 보고 고양이를 떠올린 걸까.’
안젤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번에는 ‘캣츠’를 검색했다.
촤르륵.
떠오르는 영상 중 ‘캣츠 40주년 내한공연’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눈에 띄었다.
안젤라는 그 영상을 클릭하고 나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뮤지컬에 빠져들었다.
스토리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환생할 고양이를 고르기 위한 축제가 벌어지고, 고양이들은 자신의 매력을 뽐내기 위해 이야기를 노래 형식과 춤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고양이 의상을 입은 배우들의 몸짓에 집중했다.
그제야 장현이 말한 고양이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동물 고양이가 아닌 이 뮤지컬 속의 고양이를 말한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활짝 미소가 생겨났다.
그녀는 문득 장현이 조금 전 했던 말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내가 모델을 하면 잘 어울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