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거인족과의 경기 (12)
“이제 34마리째군.”
장현이 거인의 머리를 부순 망치를 내리며 숫자를 세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1위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는 거인족 사냥을 끝내고 전체적인 상황을 점검했다.
무림인들과 함께했지만 성적은 장현 일행이 가장 우수했다.
무림인들 중 최강자인 마현이 제대로 사냥에 집중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그는 새로 생긴 제자를 키우는데 집중했다.
언무룡을 비롯한 친위대들의 성적은 대략 10마리 내외.
대주인 언무룡이 10마리를 사냥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2, 3마리가 고작이었다.
반면 장현 일행의 성적은 확실히 돋보였다.
34마리를 사냥한 장현에 이어 최형석이 17마리.
이나연도 8마리를 쓰러트렸다.
놀라운 건 김덕배였다.
마현의 지도로 인해 생사의 전투를 강제로 경험한 결과, 무려 24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다.
‘다행히 덕배가 큰 성장을 했어.’
그동안 김덕배의 위치는 어정쩡했다.
전장의 맵이 있다지만 이나연이나 최형석에 비해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군대와 같은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게 아니었기에, 전장의 맵이 있다고 하더라도 뒤에서 전략만 짜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김덕배가 마현의 제자가 되며 대번 입지가 바뀌었다.
장현은 그의 얼굴에서 자신감을 읽었다.
‘좋군.’
동료의 성장은 기쁜 일이다.
김덕배가 더 이상 짐이 아닌, 최후의 전투 때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되기를 기원했다.
‘그럼, 이제 옛 친구들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한번 볼까.’
때마침 시스템창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박람회 이벤트 경기가 끝났습니다. 거인족이 전멸함으로써 경기는 종료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모든 플레이어들은 처음 집합한 경기장으로 모이세요. 경기 성적을 바탕으로 랭킹을 측정하겠습니다. ]
“아, 알림이다.”
“드디어 끝난 거야.”
거인족과의 전투가 끝나자 무림인들이 한숨을 돌리며 안도했다.
무림인들의 사망자는 모두 12명. 부상자는 7명이었다.
장현 일행과 마현의 활약으로 인해 이 정도 피해로 그쳤다.
‘예전보다 피해가 줄었어.’
장현은 1회차에 비해 훨씬 피해가 줄어든 것에 대해 만족했다.
허나, 마현의 모습을 보고는 만족이라는 감정이 떠오른 것에 대해 자책했다.
그는 진정으로 부하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언 대주, 시신을 수습하게.”
“네, 맹주님.”
마현의 지시를 받은 언무룡과 그의 수하들이 시신을 한데 모아 땅을 판 뒤 묻었다.
그 가운데 김덕배가 있었다.
언무룡과 친위대들은 김덕배가 마현의 제자임을 알기에.
이방인이었던 그가 동료의 장례에 함께하는 것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뿐, 불만을 갖거나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장현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끝에, 이윽고 마현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뭐가 말인가?”
장현의 물음에 마현이 반문했다.
“절 따라오다가 부하들이 죽었지 않습니까.”
“내가 자네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죽을 것이었네.”
마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장현은 그의 표정에서 씁쓸함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림맹주 마현.
과거 그는 자신의 곁에 있는 부하들이 죽어나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동료와 부하들의 죽음이 당연시 여겨지게 된 세상이다.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일행은 다시 돌아갔다.
예상대로 장현의 랭킹이 1위였다.
[인간 플레이어들이 거인족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렸습니다.]
[경기의 승리자는 인간 플레이어들입니다.]
[경기의 랭킹을 발표합니다.]
1위, 장현 34킬
2위, 아르헨 30킬
3위, 마현 28킬
4위, 김덕배 24킬
5위, 최형석 17킬
6위, 테오 16킬
7위, 제이미 14킬
8위, 언무룡 12킬
9위, ……
상위 랭커 5인 중 마현과, 아르헨이 1회차 최후의 동료이고, 나머지 2인이 새로운 동료였다.
‘예상대로야.’
장현이 예상한 대로였다.
아르헨이 30킬로 자신을 바짝 뒤쫓았다.
마현이 덕배를 가르치면서 거인족 사냥을 병행함에 따라, 이번 승부는 사실상 장현과 아르헨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28킬이나 했다는 점에서 마현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장현은 여전히 자신에게서 부족함을 느꼈다.
마현과 아르헨은 회귀하지 않았음에도 장현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
‘역시 내 주력은 전투가 아니야.’
장현은 다시 한번 느꼈다.
역시 전투는 자신의 분야가 아님을.
‘회귀자로 내가 선택된 건 전투 때문이 아니야. 나의 주력을 키우면 돼.’
테세리움을 무기로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신의 무기는 자신이 아닌 아르헨이나 마현이 쓰는 게 마왕과의 전투에 보다 더 유리할 것이다.
‘또 창조신의 패드라는 아이템이 있지. 난 그것을 얻는데 더 노력하면 돼.’
장현은 회귀한 목적을 잊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처음에 모인 장소에 다들 도착했을 때, 처음보다 인원이 30퍼센트 정도 줄어있었다.
“플레이어 장현, 총 34킬로 랭킹 1위에 올랐습니다. 미리 언급한대로 보상은 대공 전하의 상점이용권입니다.”
데니우스의 말에 전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장현에게 집중됐다.
그들의 뇌리 속에 장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띠링.
장현의 상태창에 알림이 떠오르며 상점이용권이 생성되었다.
이제 상점을 이용할 차례다.
거인족과의 전투를 끝내자 문이 하나 생성되었다. 살아남은 자들만 나갈 수 있는 출구다.
플레이어들은 출구를 이용해 각자 소속된 영지로 돌아갔다.
출구를 향해 나가던 플레이어들 중 아르헨이 장현을 향해 묘한 분위기의 눈빛을 보냈다.
그 시선을 알아챈 김덕배가 아르헨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장현, 저 자식 심상치 않은데. 그때 헬릭스 성에서 봤던 녀석 맞지?”
“맞아.”
“저 자식, 왠지 느낌이 안 좋아.”
“걱정할 정도는 아닐 거야.”
“흠. 그래?”
김덕배는 장현의 말에 미심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는 사부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쉽게 생각하면 안될 거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장현이 알아서 하겠지.’
김덕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그는 장현을 다시 쳐다보았다.
튜토리얼 때부터 알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준 장현.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단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다.
‘대체 장현의 놀라운 능력의 비결은 뭘까.’
김덕배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그 무렵 안젤라가 마중나와 있다가 장현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스윽 인원을 훑었다.
“역시 이 정도는 통과해야지. 죽은 사람은 없군. 그보다 1등한 것을 축하해.”
“약속대로 아르헨보다 높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대결은 끝난 겁니까.”
휙!
안젤라가 장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경기에서 1등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제시카의 플레이어에게 이긴 것을 넘어 전체 플레이어 중 1위를 한 것이다.
랭킹을 보아하니 어차피 1위를 하지 않았으면 제시카의 플레이어에게 이기지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장현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생각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신의 플레이어들에게 흥미가 커졌다.
물론, 이성적인 끌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약속한 대결이 하나 더 남았지. 신제품 시연회에 너와 내가 같이 나갈 거야.”
“지금은 곤란합니다. 바로 대공의 상점이용권 보상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흠. 대공 전하의 상점이용권이 있다면 빨리 쓰는 것도 좋겠지. 데니우스에게 말해놓을 테니 들렀다가 내게 오도록 해.”
“소성주의 거처가 어디인지 그가 알겠죠?”
“그래.”
“상점에서 볼일을 마치면 찾아가겠습니다.”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갔다.
장현은 일행들에게 잠시간 이별을 고했다.
“난 이대로 대공의 상점에 들렀다가, 소성주가 요구한 일을 해야 해. 그러니 당분간은 헤어져야 할 거 같다. 각자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덕배, 넌 사부가 생겼으니 익혀야 할 게 많아. 이나연과 최형석도 가진 스킬의 숙련도를 높이도록 해. 그전에 이번 경기를 치르면서 지쳤을 테니 당분간은 숙소에서 푹 쉬도록 하고.”
장현의 말을 들은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족 레이드에서 얻은 마나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상점을 이용할 때 그간 사지 못했던 아이템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장현이 마침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른 듯 김덕배를 보며 말했다.
“덕배야, 혹시 전장의 맵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지 알아봐.”
“마나 포인트로 말이야?”
“그래. 혹시 마나 포인트가 모자라면 얘기해. 영지에서 벌어들인 걸로 지원하면 되니까.”
“알겠어.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
김덕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배, 너에게 뒤를 부탁한다. 넌 영주라는 걸 기억해라. 내가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거들어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그러기 힘들 거야. 모든 걸 네가 해야 해.”
“그래. 열심히 할게.”
장현은 덕배에게서 눈을 떼고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눈을 마주쳤다.
모두들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장현을 바라보았다.
“장현 씨, 믿어요!”
“형님. 걱정 마십시오. 여기서 우리보다 강한 자는 몇 없습니다. 문제 생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나연과 최형석의 대답에, 장현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여기가 대공의 상점인가. 음?”
장현은 상점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상점 입구에 서있는 마현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마현이 장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네.”
“말씀하십시오.”
“자네, 회귀 전에 당문무공을 나한테서 받았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도 난 그것을 현학에게서 건네받은 것일 거야. 난 당문세가주에게 그것을 받은 적이 없거든.”
“아마도 그렇겠죠. 그런데 현학은 지금 그것을 모르는데, 마현 맹주께 전해줄 때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자네말대로 히든 퀘스트의 보상을 받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무공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지.”
“허, 그가 그 정도로 뛰어난가요?”
마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학은 당가식솔이었지만 당가를 떠나 무당파로 입문한 제자였다. 원래 당가 내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가진 기재이긴 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당운학.
그런 그가 본래 이름을 버리고 무당파로 가게된 것은 방계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가는 직계와 방계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더군다나 적장자인 소가주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탓에 항상 괴롭힘과 견제를 받았다.
할 수 없이 무당파에 지원했을 때.
가문에서는 불감청 고소원으로 반겼고, 무당파 역시도 뛰어난 인재의 합류에 기뻐했다.
그럼에도 그가 당문 출신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그가 배우고 익혔던 당문내공이 그의 단전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얻어서 마현에게 맡겼던 독존의 내공심법이 현재는 회귀한 장현에게 있다.
지금의 현학이 독존의 내공심법을 얻는다면, 날개를 얻은 듯 날아오를 것이다.
‘당문무공을 현학에게 돌려주라는 것이겠군.’
장현에게 당가의 무공은 섬세함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당가의 대장장이 기술은 그의 능력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주었다.
독과 약에 대한 지식까지 갖추게 된 것은 덤.
마현이 장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문독공을 다시 돌려줄 수 없겠나?”
예상대로군.
장현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날을 세워 시비를 걸던 당가의 인물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쉽게 내주고 싶지 않았다.
최소, 당사자가 직접 고개를 숙이고 부탁을 해야만 했다.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장현에게 마현이 이어서 설명했다.
“자네의 목적은 테세리움으로 무기를 제작하는 거라고 했네.”
“그렇습니다.”
“자네의 목표를 생각해보게. 자네는 회귀 전에 테세리움을 가공하는데 실패했다고 했네. 이번에는 혼자서가 아닌, 당가의 천재를 동료로 삼아서 시도해보는 거네. 그의 능력이라면 테세리움이라는 금속을 다루는데 큰 도움이 될 걸세.”
“으음.”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학의 천재성을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가 당가의 무공 중 대장장이 능력을 필요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