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거인족과의 경기 (11)
장현은 최형석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최형석, 독에 맞아 전투력이 약해진 놈들은 네가 처리를 해줘.”
“알겠습니다. 형님. 그쯤이야 문제없습니다.”
최형석은 장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부리는 언데드 거인족은 고작 한 마리였다.
언데드 거인족으로 거인족을 상대하는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거인족들도 처음엔 죽은 동족들을 상대하는 걸 꺼려했었다. 하지만 결국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되자 죽은 동족을 향해서도 거리낌 없이 공격을 가하게 됐다.
최형석은 이미 언데드 크레온과 언데드 거인을 부리면서 마나 포인트를 대부분 소모했다.
다시 강력한 언데드 병사들을 불러내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더라도 쓰러진 놈들을 뒤처리하는 정도라면 가능했다.
‘스켈레톤 정도라면 아직 가능해.’
소환할 대상이 현재 본인의 레벨보다 낮은 언데드라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이나연과 집단전투를 한 효과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마나 포인트가 고갈될 때까지 지독스레 훈련했었다.
“움바리 사바라 움메오. 일어나라 나의 스켈레톤 병사들이여.”
최형석은 사령술사 지팡이에 남은 마나를 긁어 쏟아 넣었다.
그의 외침과 함께 스켈레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
하나, 둘, 셋, ……열하나, 열둘, 열셋…… 스물.
척. 척. 척.
폭뢰시 파편에 팔과 다리가 녹아내린 거인들. 그놈들을 향해 칼을 찬 스무 명의 스켈레톤들이 약진했다.
크으으오.
거인들은 괴성을 지르며 멀쩡한 신체 일부를 휘둘러 다가오는 스켈레톤을 후려쳤다.
엎어진 채 다리를 휘두르는 거인도 있었고, 팔을 허우적대듯 막 휘두르는 거인도 있었다.
퍼퍼퍽!
촤르르르.
거인의 허우적거림에 얻어맞은 몇몇 스켈레톤이 그대로 부러져 박살이 났다.
그 순간, 남은 스켈레톤들이 한꺼번에 그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쉬쉭!
퍼퍼퍽!
투툭.
원래라면 마나도 실리지 않은 스켈레톤의 칼로는 거인족의 육체를 자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독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육체였기에, 몇 번의 칼질만으로도 거인족은 죽었다.
스스스.
촤르륵.
“움바리 사바라 움메오 다시금 일어나라!”
거인족이 휘두른 주먹에 맞아 박살이 났던 스켈레톤이 다시금 일어났다.
동시에, 스켈레톤에 의해 죽은 거인족들을 언데드로 만들었다.
당장 소환해서 전투에 투입할 정도는 안됐지만, 언데드 병사로 만드는 정도는 가능했다.
최형석의 그런 모습은 남은 거인족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크아아아!
퍼퍽! 퍼퍽!
곳곳에서 스켈레톤들의 활약에 따라 거인족이 쓰러져갔다.
장현은 그 모습을 보며 안심하고 폭뢰시를 날려댔다.
쉬쉭!
쐐애애애액!
폭뢰시는 요란한 소음을 울리며 날아들었고, 한 번의 소리에 최소 한 명의 거인족이 반드시 쓰러졌다.
그 파편에 부상을 입은 거인족이 있으면 최형석의 스켈레톤들이 칼을 들고 뛰어갔다.
퍽! 퍼퍽!
어느새 이나연과 최형석 주위의 거인족은 모두 쓰러진 상태였다.
장현은 이어 무림인들에게로 향했다.
언무룡을 비롯한 친위대와 달리, 나머지 무림인들은 쉽사리 거인족을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려 수많은 무림인들이 거인족에게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장현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거인에게서 피해! 폭발하는 파편에 맞지 않도록 조심하고!”
“뭐라? 파편이라니!”
폭뢰시에 대해 잘 모르는 한 무림인이 떨떠름한 듯 외쳤다.
“설명할 시간 없어. 파편에 독이 있으니까 일단 피해.”
경고를 했음에도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자들까지 장현이 책임질 수는 없다.
우선은 거인족들을 쓰러트리는 게 우선.
그는 남은 폭뢰시를 차례차례 뿌렸다.
쐐애애애애.
폭뢰시가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고, 위기에 처한 무림인들을 노리던 거인족들은 여지없이 머리가 터져나갔다.
퍽! 퍼퍼펑!
쿠쿵.
“으아아악!”
장현의 경고에도 미처 피하지 않았던 무림인 중 한 명이 거인의 머리가 터지며 튀어나온 폭뢰시의 파편에 맞았다.
치이익.
부글부글.
파편에 맞은 무림인의 팔이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으아아악! 내 팔이, 팔이!”
“치이잇. 그러게 피하라고 할 때 피했어야지.”
장현이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팔에 튄 독기를 흡수했다.
그제야 남자의 팔에서 중독이 멈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진 않았다.
남자는 분노어린 눈길로 장현을 쏘아보았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너 때문에 팔을 잃었잖느냐.”
“죽을 뻔한 녀석을 살려줬더니 은혜도 모르는군.”
“흥. 네가 나서지 않았어도 난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었다. 괜히 네 녀석이 나서는 바람에 내 팔을 잃었어. 어떻게 책임질 거냐!”
남자는 원독어린 말투로 쏘아댔다.
장현은 그런 그의 반응에 분노가 치밀었다.
거인족에게서 목숨을 구해줬더니, 도리어 원망을 사게 생겼다.
비록 독액이 튀어 팔을 다쳤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장현의 말투 역시 자연히 거칠어졌다.
“내가 네 팔에 묻은 독 기운을 빼지 않았다면 넌 이미 중독되어 죽었을 것이다.”
“네 놈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장현과 남자의 말싸움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인상은 자연히 찌푸려졌다.
“위지천,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다쳤으면 물러나고 싸울 수 있으면 어서 합류해.”
“난 아직 싸울 수 있어!”
위지천은 거칠게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다친 팔을 감싸며 장현을 지나쳐갔다.
장현은 그의 언행에 매우 불쾌했지만 뭐라 말하진 않았다. 부상을 당한 심정은 그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림인을 돕고 싶은 마음은 싹 사라졌다.
감정을 떨치고 몸을 돌리려던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오.”
“당신은 언 대주. 거인족들은 어찌되었습니까.”
장현에게 말을 건 사람은 언무룡, 마현의 친위대 대주였다.
“우리가 상대하던 놈들은 이미 다 처리했소. 그렇기에 다른 이들을 도와주러 온 거요.”
“저자는 너무하군요. 파편에 부상을 입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장현은 위지천으로 인해 화난 감정을 토로했다.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경기의 보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 위지천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일 것이오.”
“욕망?”
“그렇소. 위지천의 위지세가는 나와 같은 오대세가 중 하나였소. 그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위지세가가 멸문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와중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오. 남에게 도움 받거나 빚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오.”
장현은 무림의 오대세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언무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1회차에서는 위지천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딱히 이름을 떨친 유명한 자도 아니었다.
그때 언무룡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어떻게 당가의 폭뢰시를 알고 있는 거요?”
언무룡의 말에 장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언무룡의 뒤에는 당사옥과 현학이 다가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현이 사용한 폭뢰시는 당가의 독문무기로, 가주 외에는 암기제작을 담당하는 장로 당영신만 제작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사실은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당가일족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쉽게 넘어가긴 힘들겠군.’
장현은 폭뢰시를 꺼낸 순간부터 지금 순간을 준비해왔다. 마현에게 미리 사실을 털어놓은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다.
90프로의 진실에 10프로의 거짓을 숨겨놓으면 대부분은 진실이라 믿는다.
“당문가주께 직접 전해 받았습니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당문 가주는 마계에 오신 적도 없소이다. 그럼 장현 그대가 무림에 오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장현의 대답에 언무룡이 표정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무룡의 뒤에서 당사옥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당신이 어디에서 그 분을 만났단 말인지 사실대로 얘기해야 될 거예요.”
“튜토리얼 히든 퀘스트에서 만났소.”
“뭐라고요?”
당사옥뿐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장현의 말에 놀랐다.
소란에 이끌려 다가왔던 마현 조차도 그 말을 듣고서 기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장현이 어떤 식으로 둘러댈지 궁금했었는데.
설마, 히든 퀘스트에서 얻었다고 할지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현 그대는 당문독공도 튜토리얼 히든 퀘스트로 얻었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소?”
언무룡은 얼마 전 장현이 당문독공을 얻은 경위에 대해 거짓말한 것을 지적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현 맹주님께 얘기했습니다. 정 궁금하면 마현 맹주님께 물어보세요. 전 이미 다 얘기했으니까요.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히든 퀘스트를 얻어 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텐데요. 혹시 히든 퀘스트를 받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가요?”
“크윽!”
장현의 물음에 언무룡과 당사옥은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언무룡은 히든 퀘스트를 얻지 못했고, 당사옥은 히든 퀘스트의 존재 자체도 방금 알았다.
장현은 그녀의 반응에서 이미 대답을 들은 듯 고개를 돌려 다른 무림인들을 둘러봤다.
“이 중에서 튜토리얼에서 히든 퀘스트를 얻은 사람 혹시 있습니까?”
무림인들의 시선이 마현에게로 향했다.
무림인 중 유일하게 히든 퀘스트를 얻은 마현.
그라면 장현의 말을 확인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난 보상을 거절했다. 그리고 장 대협과는 얘기해서 오해를 풀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아.”
마현의 대답에 주위의 무림인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사옥은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차마 마현의 말에 항의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한동안 장현을 노려보았다.
마현이 장현의 말이 진실이라고 선언함에 따라 이제 장현의 말에 대한 진위를 추궁하는 것은 마현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었다.
당사옥은 한참을 노려보다 장현에게 물었다.
“히든 퀘스트에서 당가의 비전을 얻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난 히든 퀘스트에서 거대흑전갈이라는 몬스터를 쓰러트렸어요. 그때 보상으로 상점이용권을 얻었지요. 거기서 내게 주어진 선택권은 무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스킬이었어요.”
“그 중에 왜 하필 당문독공을 고른 거죠?”
“그 무공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난 대장장이면서 연금술사에요. 그보다 내게 적합한 무공이 뭐가 있을까요. 이래도 안 믿겠다면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굳이 그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니면 무림인도 아닌 내가 어디서 얻었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을지, 그대가 내게 말을 해주세요.”
장현의 말에 당사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추궁한 게 아닌가.
장현은 무림인이 아닌 지구의 한국인이었다. 그가 당문독공과 암기술을 얻은 경위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정말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걸까.’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한차례 본 후, 장현은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마현이 나서서 보증했으니 더는 대답을 독촉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이 일로 무림인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마현만 아니었다면 굳이 무림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휴, 참자. 아직 거인족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어.’
당장은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장현은 남은 거인족의 수를 세었다.
그동안 자신이 처리한 거인족의 수는 29명.
투석기로 쓰러트린 거인족도 장현이 쓰러트린 것으로 계산되었다.
‘예전엔 아르헨과 마현 사부가 1, 2위를 차지했었지.’
1회차 때 우승자가 죽인 거인족의 수는 30명이었다.
앞으로 2명의 거인족만 더 잡는다면 안심할 수 있다.
장현은 다음 목표물을 향해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