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거인족과의 경기 (10)
마현이 김덕배의 앞으로 나서며 자세를 취했다.
그는 검을 들더니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은 삼라만상을 모두 포용한다. 그 포용력은 끝이 없다. 천지만물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혼돈이자 만물의 근원이 바로 무극이다. 이 검술은 그 무극을 표현하고자 한 데서 시작되었다.”
마현이 그리는 원의 움직임은 다시 그 안에서 작은 원을 그려냈고, 계속해서 원의 파동이 생기며 퍼져나가길 반복했다.
파동이 파동을 일으키고, 처음의 파동은 다음 파동에 의해 뻗어 나갔다.
그건 다함이 없는 무극, 그 자체였다.
마현은 이어 그 자세 그대로 거인족을 향해 검을 뻗었다.
검에서 퍼져 나온 파동의 기운이 거인족에게 뻗어 갔다.
그 원의 범위에 걸린 것은 무엇이든 파괴되었다.
거인족과, 나무와, 바위와, 숲이 모두 소멸되었다.
김덕배는 그 결과에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무극검법. 네가 원하던 것이며, 앞으로 평생을 두고 수련해야 할 무공이다.”
꿀꺽.
김덕배의 목울대가 출렁 움직였다.
자신이 저것을 해낸다면, 그 누구 못지않게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겠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사부님.”
“난 이미 보여줬다.”
“네? 그게 다입니까?”
“그럼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내공을 전수해주고 검술도 전수해주었다. 거기에 필요한 초식 역시 마찬가지. 부족한 건 스킬로 때우겠다고 했으니 그대로 한번 해보거라.”
마현의 말은 김덕배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김덕배는 마현의 말에 자신이 한 실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절대 못 따라한다.’
마현이 보여준 검술은 김덕배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거의 완벽한 원.
그 원 안에 들어있는 기운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김덕배는 그 원 안에 무언가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저런 원을 검으로 그릴 수 있을까.’
스스로 묻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간 모은 마나 포인트로 상점에서 검술 스킬을 살 수는 있다. 레벨을 올려 파괴력도 올릴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저와 같은 오묘한 무공은 흉내 낼 자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용서해주십시오.”
털썩.
김덕배가 무릎을 꿇고 조금 전 자신의 성급함을 사죄했다.
마현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처음 받아들인 제자가 빠른 길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며 염려가 되었다.
무공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조급한 마음을 가질수록 멀어지는 것이 무공이다.
스킬과 마나는 무척 빠르고 쉽다.
그것에 적응하면 느리고 어려운 길을 가기 무척이나 힘들어진다.
사공과 마공이 처음에는 정공보다 빠르게 강해진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은 한계에 봉착한다.
그때부터는 느리게 나아가던 정공이 나머지 둘을 추월한다. 이후로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시킨 것들을 수련하도록 하거라. 완벽한 직선을 구현할 수 있다면, 그때서야 곡선을 시도할 수 있느니라.”
“완벽한 직선을 이룬 후에 곡선을 시도할 수 있다니. 그게 무극검술의 원리인가요?”
“그렇다. 원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곡선. 나조차도 완벽한 원은 아직 구현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 무극검술을 대성한 것이겠지.”
마현은 씁쓸하면서도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반드시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디 내가 이루지 못한 걸 네가 이루어다오. 나를 넘어라.”
“네. 사부님. 알겠습니다.”
김덕배는 각오를 다졌다.
마왕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야 했다.
자신 역시 마왕 공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김덕배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한편, 장현은 발리스터의 화살로 만든 후 남은 재료들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가 만드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암기.
거인족의 창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얻은 이상,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거인족의 창]
-재료 레벨 5.
-거인들의 강력한 힘을 견뎌낼 수 있는 창으로, 1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추출되는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장현이 연성술을 사용해 그것을 새로운 금속으로 만든 이상, 더는 그것을 단순한 창으로 볼 수 없었다.
조금 전 거인족의 창을 발리스터의 화살로 변형한 것은 고급 대장장이 직업 퀘스트를 해결한 것으로 시스템은 인정하지 않았다.
고급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제 단 하나.
트레뷰셋 투척기, 안젤라의 팔찌, 만티코어 조형상까지. 총 세 가지의 아이템을 만들었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장현은 퀘스트를 위해 당문의 암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폭뢰시가 적당하겠군.’
폭뢰시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암기로, 모양은 화살과 유사했다.
활이나 다른 도구 없이 손으로 던질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차이점으로, 이것은 원래 강기를 쓰는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재질은 강기의 기운을 견뎌야 하기에 매우 단단해야만 한다.
‘5레벨에 달하는 거인족의 창을 재료로 하면 가능해.’
장현은 폭뢰시를 사용해 거인족을 잡을 생각이었다.
현재 퀘스트의 보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고급 대장장이가 되기 위한 직업 퀘스트까지 모두 한 번에 충족할 수 있었다.
이내 그는 대장장이 도구들을 꺼내들고 제작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거인들과 싸우고 있었기에 서둘러야했다.
‘금방 끝낼 테니 모두들 버텨만 다오.’
장현은 정성을 다해 폭뢰시를 만들었다.
힐끔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일행들은 거인족을 상대로 잘 견뎌내고 있었다.
‘마현 사부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김덕배는 자신의 동문사제나 마찬가지.
1회차 때 장현은 체질상 무극신공을 익히기가 불가능했기에, 염라문의 무극신공이 사장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했었다.
그 자신이 염라문의 33대 문주였기에, 마현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김덕배라면, 믿을 수 있는 동료니 좋았다.
고개를 돌려 마현의 일행들이 싸우는 모습을 살폈다.
언무룡과 친위대들이 처음과 달리 갈수록 거인족을 상대로 잘 싸워주고 있었다.
그들은 합격진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인원수가 많다 보니 장현 일행들이 썼던 4인 1조의 전술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차륜전의 형태로 한 명이 공격을 가하다가 후방으로 물러나면, 이후 다른 자가 거인족을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거인족은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하나씩 쓰러지고 있었다.
‘저게 무림인들의 강점이지.’
집단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들이다.
저런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도록 하는 게 장현의 역할.
바로 그들이 가진 무기들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이나연, 김덕배, 최형석, 김태석은 이미 장현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다.
헬릭스 성의 상점에서 구입한 아이템들을 비롯해 기존에 쓰던 무기들을 장현이 강화를 해준 것이다.
“여신의 칼날!”
이나연이 다시금 은빛의 검을 짓쳐들었다.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검은 여러 번 강한 신성력을 뿌리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심지어 거인족의 창이나 바위와 충돌하고도 금이 가지 않았다.
이게 장현이 해준 강화의 효과다.
반면 무림인들의 무구는 한눈에 봐도 평범했다.
저런 검으로 마왕군의 마족들을 상대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했다.
[재료 레벨 5의 금속으로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아이템 이름은 ‘폭뢰시’로 정하였습니다.]
[마계 상점 목록에 ‘폭뢰시’가 올라갔습니다.]
[고급 대장장이 직업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직업이 고급 대장장이로 변경되었습니다.]
장현은 알림을 확인하고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자신이 만든 폭뢰시 한 움큼을 쥐고 일어섰다.
‘이걸 보면 깜짝 놀라겠지.’
대략 100여개의 폭뢰시.
손에 쥐기 수월하게 10개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는 전장을 휙 둘러보았다.
지금 전장에서 가장 위태로운 건 이나연이었다.
그녀는 신성력 스킬을 과도하게 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검은 버티지만 검의 주인은 아무래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으아앗!”
기합을 내지르는 이나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전신에서는 뿜어져 나오던 신성력도 꽤나 희미해진 상태.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펴주시고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다시금 기도하는 이나연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떨리고 있었다.
눈이 파르르 떨리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도 점점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여신의 성기사인 그녀는 아무래도 여신의 권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신은 천계가 마왕에 의해 멸망한 탓에, 권능을 내려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은 시스템 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현이 이윽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섰다.
“수고했어. 이나연. 이제 쉬어도 돼. 내게 맡겨.”
“장현씨. 어쩌려고…….”
이나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장현을 쳐다봤지만, 그를 믿고 있기는 했다.
그는 언제나 위기의 순간을 잘 해결해줘 왔기에, 이번에도 무언가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든든해 보였다.
“후우, 일단 다섯 놈인가.”
장현의 앞에는 거인족 다섯 명이 있었다.
쓰러진 놈들은 무려 여덟 명.
이나연 혼자 여덟 명을 쓰러트린 것이다.
경기 초반엔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했었거늘.
전투를 거듭하며 그녀가 무섭게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거인 한 명을 죽였을 때 얻는 마나 포인트양이 이전의 다른 적들보다 훨씬 많은데다, 경험치 또한 크게 인정해줘서 레벨이 빠르게 올랐던 것이다.
“조심해라. 저 난쟁이는 강한 놈이다.”
“크르륵. 알겠다.”
장현이 나타나자 남은 거인족들이 긴장한 채 서로 에게 주의를 줬다. 그러고는 이내 한꺼번에 달려들어 왔다.
초반에 장현이 활약하는 걸 봤었기에, 놈들은 장현을 얕보지 않았다.
‘좋아.’
장현으로서는 그들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이 오히려 더 좋았다. 폭뢰시를 써볼 좋은 기회였다.
그는 오른손에 망치를 든 채 왼손에 들고 있던 폭뢰시 하나를 정면에 있는 거인을 향해 던졌다.
내공을 담은 폭뢰시가 정면 거인족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슈아아.
거인족은 폭뢰시가 날아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보다는 장현의 망치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거인족들을 학살해온 망치였기에.
거인족들로서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폭뢰시는 작은 화살과 같은 형태로, 무척이나 빨랐다.
거인족은 늦게나마 폭뢰시가 날아오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나, 그 크기가 작다는 것에 방심했다.
설마 저것이 자신의 몸을 꿰뚫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피하기보다는 손을 들어 막으려고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푸슉!
콰드득.
끄어어어!
거인족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뢰시는 거인족의 손을 뚫고 찢어버리더니 그대로 머리까지 박혔다.
드드드득!
콰쾅!
폭뢰시는 거인의 머리에 박히면서 곧바로 폭발하기까지 했다.
폭발의 충격에 거인족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그 여파는 근처에 있던 거인들에게도 미쳤다.
치이이익.
폭뢰시의 파편에 맞은 거인족들은 신체에 닿은 부위가 순식간에 녹아들어갔다.
폭뢰시에 담긴 독의 효과다.
당문의 암기이기에 단순히 폭발로 그치지 않았다. 파편 하나하나에 시전자의 독공이 스며들어 있었다.
현재 장현의 당문독공은 육성.
그 위력은 거인족의 피부를 녹이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