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거인족과의 경기 (4)
“뭐, 뭐라?”
마현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장현은 말을 덧붙였다.
“염라문의 32대 문주 마현 사부에게 정식으로 문주의 직위를 받았습니다.”
“내가 장 대협에게 문주를 넘겼다니, 그보다 미래에서 회귀했다고? 나를 농락하는 게 아니길 바라네.”
순간적으로 강렬한 기파가 마현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거짓이라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지금부터 제 얘길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제게 문주직을 넘겨준 마현 사부는 32대 계승자로 문파의 유훈을 지키기 위해 무림에 출두하였습니다.”
“…….”
마현은 말없이 장현을 바라보았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것이다.
“염라문의 문주는 무림최강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유훈이고, 그 정도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무공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성취를 얻은 마현 사부는 천마신교 교주인 천마와 싸웠습니다. 천마를 상대로 삼일 밤낮을 싸운 끝에 승리하고 천마신교의 교주가 됩니다.”
“그만!”
마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장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의 자세한 사정을 알고 언급하고 있었다.
장현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었다.
“장 대협은 무림인이 아니라고 들었네. 대한민국이라는 곳의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 곳에서 나와 사승관계를 맺은 건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습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장 대협은 나의 제자가 결코 될 수 없네. 그것은 그대의 체질과 염라문의 무공이 맞지 않기 때문이네.”
마현은 한눈에 장현의 체질이 염라문과 맞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장현 역시 그 부분을 언급할 것이라 짐작했기에 동요치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부터 드릴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염라문 문주로서 사부의 행적을 언급한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전 염라문의 내공심법을 익히기에는 체질이 맞지 않습니다. 그건 심장이 좌측이 아닌 우측에 달린 사람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기 때문이지요.”
“으음. 정말 그것까지 알고 있구먼.”
“그래서 사부는 제게 당문독공을 익힐 것을 권했습니다. 염라문의 무공은 후에 적당한 자를 찾으면 전해주길 부탁하셨지요. 그게 제가 당문독공을 익히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사부는 당가의 가주에게 직접 무공을 전달받았습니다. 당가의 적절한 후계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받은 거지요. 그때는 마계에 오기 전 무림이 결사대를 조직해 마계 침입자들에 대항했을 때입니다.”
“맞네. 난 당가의 가주에게 직접 부탁받았네.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자네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것을 믿을 수는 없어. 나를 설득해보게나.”
장현은 과거부터 회귀 직전까지의 일을 줄줄이 얘기했다.
테오와 제이미에 의해 과거로 돌아왔으며, 그들의 지식을 전해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전 그들이 필수적으로 전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습니다. 당문의 무공은 사부께서 전한 것입니다.”
“으음. 이거 참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안 믿을 수도 없으니, 일단 알겠네. 그렇더라도 사부라는 호칭은 부담스럽군. 미래의 내가 자네를 제자로 들였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난 자네를 처음 본단 말일세. 자네는 이미 내 모든 것을 전해 받았을 테니 다시 제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거 같군.”
“…….”
“염라문의 1인 전승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마왕을 쓰러트리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자네가 아닌 다른 자를 제자로 삼는 게 도움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장현은 마현의 말이 납득되면서도 섭섭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생에서는 그는 자신의 사부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군. 마현 사부가 다른 사람을 제자로 들인다면 염라문의 계승자가 세 명이나 되는 셈이니. 더구나 나는 제대로 염라문의 무공을 익히지도 못했으니 할 말이 없지.’
“혹시 말일세, 자네 얘기를 들으니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 테오의 펜던트로 회귀 마법을 또 쓴다면 다시 회귀가 가능한 건가?”
장현은 테오의 말에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 회귀가 가능할 수도 있겠어.’
장현은 마현의 말이 그럴듯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제이미는 당시 회귀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했었다.
성공 확률도 확률이지만 인과율을 비트는 것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건 확신할 수 없군요. 제가 회귀에 성공하긴 했지만, 다시 시도했을 때 또 성공하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남은 세상은 어떻게 되는지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어요. 마왕을 쓰러트리는데 실패한다면 그때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것도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테오가 결정하겠지요. 제가 한번 회귀했는데 실패한다면 과연 저에게 다시 기회를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겠군. 자네가 회귀해서 역사를 바꾸면 미래는 따라 변하는가?”
“그게 정말 중요한데 테오도 확신을 못했습니다. 그 곳의 시간은 정지가 될 거라고 했는데 평행세계인지 연결된 세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 그들이 회귀자로 자네를 선택한 이유가 테세리움이라는 신의 금속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테세리움으로 만든 무기만이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테세리움을 가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요.”
장현은 그 말을 하면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창조신의 패드에 담긴 권능이라면 어쩌면 마왕에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고 정체조차 불분명하니, 아직은 얘기하기 조심스럽군.’
안젤라에게 들었던 창조신의 패드는 아직 확실한 정보가 아닌 만큼 얘기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이었다.
“그 테세리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는가?”
“회귀 전에는 최상급 대장장이의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얻었습니다. 다만, 테세리움을 완벽히 가공할 수는 없었기에 무기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그 히든 퀘스트를 다시 얻으면 되겠군. 그 방법은 알고 있겠지?”
“그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
“히든 퀘스트를 얻었을 때는 제가 대장장이 조각이라는 히든 피스를 얻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금술사 조각이라는 다른 히든 피스를 얻었습니다. 물론 대장장이 조각이 없다고 해서 최상급 대장장이가 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거와는 일단 그 부분이 달라져서 똑같은 히든 퀘스트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장현의 가장 큰 고민이 이것이었다.
회귀만 하면 테세리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테세리움을 무기 아이템으로 가공하는 게 문제일 뿐, 얻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연금술사 조각을 얻으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비록 대장장이 직업을 얻었지만, 대장장이 조각은 얻지 못했다.
1회차와는 경로가 달라졌기에 테세리움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
히든 퀘스트로 테세리움을 얻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했다.
‘드워프 족장이라면 알지도 몰라.’
드워프 족장을 만나 확인을 해봐야 한다.
드워프 족장은 1회차 때 장현과 함께 최고의 대장장이로 꼽혔었다.
물론 실력으로는 장현이 더 우위에 있었지만 유구한 드워프 족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라면 신의 금속을 얻을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문제는 드워프 족장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드워프 족장조차도 신의 금속을 구할 수 없다면, 그때는 창조신의 패드라는 아이템에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창조신의 패드에 얽힌 비밀은 풀어야 한다.
마왕과 대공이 눈에 불을 켜고 전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 분명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그것을 내가 얻는다면 마왕과 대공을 모두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장현은 고민하던 끝에 결국 모든 것을 마현에게 털어놓았다.
최후의 동료였던 마현이라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테세리움을 얻는데 문제가 생긴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의논할 사람은 결국 최후의 동료들뿐이다.
장현은 마현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젤라에게 들은 창조신의 패드에 얽힌 얘기와 그녀가 아르헨이 이끄는 제넥스 성의 플레이어들보다 우위의 성적을 얻을 것을 요구한 것까지 모두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장현의 이야기를 다 들은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일단 속는 셈치고 도와주도록 하지. 난 이번 경기에서 1등을 포기하겠네. 그러니 자네가 마음껏 활약해보게. 자네가 해준 얘기가 진실이라면 이곳에서 1등 정도는 해야 될 걸세. 그래야 다른 자들도 자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장현은 마현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다.
아르헨, 제이미, 테오에게 회귀한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지금 장현을 바로 도와주기란 쉽지 않다.
그들을 설득시켜야하고, 그러자면 최소한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1등을 한다면 장현이 하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최강자란 타이틀이 그 정도 값어치는 하기 때문.
‘반드시 1등을 차지하겠어.’
장현은 각오를 다졌다.
거인족과의 경기는 많은 플레이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무려 5분의 1에 해당하는 플레이어가 거인족과의 전투로 죽었다.
공통의 적이 존재함으로써 플레이어들간에 유대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한 차례의 공습이 끝나고 안심할 무렵.
광장을 둘러싼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지직. 콰직.
천장을 비롯한 던전을 구성하던 바위들이 떨어지며 본격적으로 던전이 무너지려했다.
“서둘러, 여기서 나가야 해!”
“뭐지. 또 거인족들 짓인가?”
“그렇겠지. 그보다 아무래도 경기의 난이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워. 이대로 죽을 생각 아니면 피해!”
플레이어들이 소리를 지르며 출구를 찾았다.
경기장의 출구는 거인족들이 난입하며 부쉈던 곳뿐이다.
“저, 저기다! 거인족들이 들어온 장소로 나가야해!”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경기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거인족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겠군.’
장현 역시 거인들의 난입으로 무너져있던 좌측 벽면으로 달려가며 일행들에게 외쳤다.
“저 무너진 벽면으로 나가자! 방패로 전신을 방어해. 혹시 거인족들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하면서 내 뒤를 따라와. 내가 전면을 뚫겠어.”
“네, 형님.”
“알겠어요, 장현씨.”
장현 일행이 출구로 향할 때, 마현과 무림인들 또한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언 대주!”
“네, 맹주님.”
마현의 부름에 언무룡은 가볍게 대답하며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경공을 발휘해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여타 무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광장을 벗어나자 곧장 플레이어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거인족들이 무리를 지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는 대략 백여 명.
처음에 좌측 입구로 난입한 수도 백여 명이었는데, 이번에도 백여 명이었다.
그들은 처음 광장에 난입한 자들과 달리 이번엔 창을 든 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리 중 가운데 있는 자가 손짓하며 무어라 외쳤다.
거리가 멀어서 분명하게 들을 수는 없었지만, 거인족들의 이어진 행동으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쿠우우우.
쿠워어어.
거인족들이 창을 뒤로 빼더니 이윽고 창을 힘차게 던졌다.
쉬쉬쉭.
백여 명의 거인들이 던진 창은 단순한 창이 아니었다.
창에는 마나 기운이 담겨있었다.
창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장현이 소리 높여 외쳤다.
“방패로 전신을 가리고 피해!”
일행들은 그의 말대로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창의 궤적을 바라보며 피했다.
“너무 빨라! 다들 조심해!”
이나연이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장현 외에는 제대로 피한 자가 없었다.
일행들이 치켜든 방패에 창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