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대공의 박람회 (1)
김덕배의 말에 장현이 그를 돌아봤다.
“도망친 강신배 일행 말이야. 그들 중에서 이정환과 김혜정이 여기 왔어. 다른 성에서 온 마족이랑 같이 있던데 얼핏 들으니 그 마족이 이웃 성의 소성주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 중에 강신배는 안 보이는데 노랑머리의 백인이 같이 있더라고. 분위기가 아무래도 그 마족의 영지전에서 승리한 플레이어인 듯 했어.”
“노랑머리의 백인이라고? 혹시 어떻게 생겼어?”
장현은 강신배 일행들보다 노랑머리 백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음, 영화배우 같이 잘생겼던데. 마치 디카플리오 같았어.”
“그렇군.”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헨을 처음 본 사람은 대부분 영화배우 디키프리오를 떠올리곤 했다.
클라우스 제국의 공작가문 서자출신이라고 하더니, 과연 얼굴에서 귀공자 티가 났다.
1회차 대공의 박람회 이벤트의 우승자는 아르헨이었다.
1위 제넥스 성의 아르헨
2위 메지옥 성의 마현
장현의 사부이자,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동료 중 하나인 마현. 그가 속한 영지의 성주가 메지옥이었다.
메지옥 성의 영지전은 무림인들의 경기였기에 마튜브 실시간 조회수에서도 항상 상위권에 오르곤 했었다.
특히 마현의 무공은 마족들마저 감탄하게 했다고 들었다.
그를 아는 자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도공학 박람회에 메지옥은 마현을 대동한다.
‘그 둘은 마도공학 박람회 경기에서 신경전을 벌였었지. 각자가 이끄는 세력 또한 강자들이었기에 사실상 도박사의 승률도 5대5로 팽팽했어. 결국 아르헨의 우승으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장현이 아르헨을 이기려면 결국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해야만 한다.
아르헨과 마현, 모두를 이겨야 가능하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들과 직접 싸우는 게 아니라는 점.
승점을 최대한 확보하면 가능하다.
장현이 안젤라에게 승리를 자신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회차 때라면 불가능하지만 지금의 그로서는 충분히 할 만한 승부.
장현은 혹시 아르헨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하여 김덕배에게 얘기를 듣자마자 찾아 나섰다.
아쉽게도 이미 제시카와 아르헨 일행은 헬릭스 성주를 알현한 뒤 곧장 대공의 마도공학 박람회로 출발한 뒤였다.
장현은 할 수 없이 일행들과 영지로 돌아오며 안젤라에게 들은 얘기 중 마도공학 박람회에 대한 사항을 언급했다.
비록 창조신의 아이템에 대한 것은 아직 말하지 않았으나, 곧 마족들의 이벤트 경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긴장했다.
영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
보상을 받으러 왔다가 새로운 경기에 참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었으니 좋을 수가 없었다.
김덕배, 이나연, 이성훈, 최형석은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수련에 집중했다.
장현이 영지로 돌아가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헬릭스는 박람회로 떠날 준비를 했다.
자연히 김덕배 영지에도 소식이 전해졌다.
장현 등은 소식을 접하고 회의를 가졌다.
안젤라는 플레이어 중 다섯 명을 뽑으라고 했다.
장현은 본인을 포함해 김덕배, 최형석, 이나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태석을 선택했다.
관리자인 이성훈 대신 김태석을 뽑은 이유는 이성훈 외에는 영지 관리를 맡길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태석은 이제 강력한 전력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했다.
대신 성훈에게는 지로발이 보낼 섀도우 마스크 재료를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안젤라에게 비밀을 듣고 난 이후, 박람회의 중요성은 장현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창조신의 아이템인 패드에 대해 더 알아내야 해.’
당초에는 테세리움으로 무기 만드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었지만, 안젤라에게 비밀을 듣고 나니 목표를 하나 더 추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헬릭스 성주가 이끄는 장현 일행이 대공의 성에 도착했다.
거대한 산의 입구에 드래곤의 머리가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때 드래곤 로드였던 골드 드래곤이다.
대공이 직접 그를 죽인 기념으로 자신의 성 입구 통로에 장식해 놓았다.
김덕배가 입구를 바라보며 오싹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가 마계 대공의 성이구나. 과연 심상치 않아. 저 드래곤 머리 좀 봐. 살아있을 때 얼마나 크고 강대했을지 짐작도 안 가네.”
장현은 덕배의 말에 가만히 드래곤 로드의 머리를 바라봤다.
드래곤 로드는 지상계를 대표하는 강자였다.
마왕이 전쟁을 벌이기 전에는 신계, 지상계, 마계가 서로간의 영역을 분명히 한 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균형이 깨진 건 마왕 급 마족인 대공이 탄생하면서였다.
대공은 거의 탄생과 동시에 고위마족을 죽이고 그 힘을 빼앗아 성장했다.
마왕이 견제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선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마왕은 그를 죽이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오히려 손을 잡고 천계와 지상계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지상계의 수호자인 드래곤 로드마저 대공에게 죽음으로써 전 우주는 마계의 지배하가 된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1회차에서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지금은 마왕과 대공이 창조신 패드의 비밀을 풀고 그 권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군.’
만약 창조신의 패드가 복구되었다면 이미 마왕과 대공은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싸웠겠지만, 아직 복구를 못한 상태에서야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창 생각에 잠긴 장현의 곁에서 김덕배가 여전히 입을 놀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예전에 판타지 소설 보면 드래곤은 나이가 많을수록 더 크고 강해진다고 하던데 저 정도 크기면 얼마나 강한 놈일까.”
최형석이 그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냥 봐도 엄청나게 강한 놈일 거 같은데. 내가 그래도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으로서 말하는데, 허접한 놈을 잡은 걸 자랑하진 않을 거야. 마계 대공이 기념으로 자기 집 입구에 걸어뒀을 정도라면 드래곤 중에서 최고 고위급이겠지. 아쉽군, 저 놈을 내가 언데드 병사로 부린다면 좋을 텐데.”
“저 드래곤 로드를 언데드 병사로 부릴 수 있단 말이야?”
“물론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사령술 레벨이 오르고,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이 사령술사 지팡이도 있으니 마나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사령술 레벨이 조금 부족해도 가능할 거야.”
최형석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김덕배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김덕배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최형석 씨는 예전에 뭘 잡고 자랑했어요?”
“내가 말이야, 호랑이를……. 아니다, 아니야.”
최형석은 자랑하려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 앞에서 무슨 호랑이를 잡은 것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어.’
그때 앞쪽에서 소음이 일었다.
“어라, 무슨 일이지?”
김덕배가 마침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그는 전장의 맵을 활성화 시키며 말했다.
전장의 맵 스킬 역시 김덕배가 성장하며 함께 성장했다.
바뀐 점 중 하나가 맵 상의 특정 지점을 선택하면 마치 현장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는 듯 영상을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마계의 드론기술을 활용한 시스템 속 스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마나 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충분히 마나 포인트를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
“저 앞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긴 듯한데. 헬릭스 성주가 저기에 있어.”
헬릭스 성주가 있다는 말에 장현이 눈을 빛내며 김덕배에게 말했다.
“덕배야, 혹시 저기 화면 띄울 수 있어?”
“알겠어. 잠시만 기다려.”
곧 김덕배가 마나 포인트를 주입하자 그의 앞에 빛이 퍼지며 이윽고 화면으로 모양이 바뀌었다.
화면 안의 헬릭스는 다른 마족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 마족의 머리는 마치 소의 외양과 비슷했다.
체고가 3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황소가 이족보행으로 서 있었다.
“뭐야, 저 소대가리는.”
“성주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본데요.”
최형석과 이나연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에첼비.’
장현은 그 마족을 알아봤다.
헬릭스와 마찬가지인 고위 마족 중 하나로, 마왕을 따르는 자다.
헬릭스와는 사이가 썩 좋지 않다.
둘의 소란에 다른 마족들은 감히 끼어들 생각을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장현이 김덕배에게 물었다.
“덕배, 소리도 나오게 할 수 있어?”
“기능은 있는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나 포인트가 부족해.”
“내가 마나를 줄 테니 소리를 켜봐.”
장현의 손바닥이 김덕배의 등에 닿았다.
그러자 김덕배의 보유 마나 포인트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장현이 건넨 마나 덕에 한결 편해진 김덕배.
그가 이내 기능을 추가적으로 활성화시켰다.
동시에 화면에서 소리가 나왔다.
치지직.
“에첼비! 지금 감히 내게 덤비는 것이냐.”
“흐흐흐, 헬릭스. 이제 너와 나는 동급이다. 아직도 네가 내 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건방진 놈. 제넥스의 꾐에 빠져 대공 전하를 배신하더니 죽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냐.”
“흐흐, 배신은 무슨 배신을 했다는 거냐. 난 그저 마왕님께 대공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현황을 전달했을 뿐이다. 설마, 마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왕님께 보고하는 것이 잘못된 행위라는 말이냐?”
“네 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감히 패드의 신기술을 빼돌려 놓고 그따위 말을 뱉다니. 그 때문에 입은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헬릭스는 에첼비의 말에 분노를 토해냈다.
대공이 벌이는 주 사업인 패드는 계속해서 신기술이 나오고 있다.
모든 성주가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연구 개발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첼비는 그동안 대공을 따르는 척하다 대공 측에서 개발한 신기술에 접근해 빼돌렸다.
그것을 마왕에게 넘긴 것이다.
물론 마왕이 직접 그것을 다루진 않지만 마왕 측 휘하 성주에게 전달함으로써 기술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흥! 어차피 그 기술은 아직 수율도 안정적으로 잡히지 않은 샘플에 불과한데,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신기술을 운운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에첼비는 헬릭스에게 비아냥거리며 그의 화를 돋웠다.
신기술의 핵심은 수율이다.
달리 불량품이 적게 나올 확률이라고도 한다.
신기술 개발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수율이 안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공 측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서 샘플단계에서는 성공시켰고, 파일럿 라인을 가동하고 있었다.
에첼비는 이 기술을 빼돌린 것이기에 결코 샘플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었다.
마왕 측은 아직 샘플단계에서도 안정적인 수율이 나오지 않은 단계였다.
에첼비의 스파이짓으로 인해 대공 측의 폴더블 패드 신제품 생산라인은 한동안 마비되었다.
자연히 대공 휘하에서 신기술을 책임지고 있던 헬릭스 입장으로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에첼비였다.
에첼비는 살기어린 시선의 헬릭스에게서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딸이 커갈수록 어미를 닮아가는구나. 다행이군. 애비를 닮지 않아서.”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안젤라를 훑으며 언급하는 에첼비에, 헬릭스는 분노해 손을 뻗었다.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구나. 내가 오늘 네 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콰아아.
강력한 공격이 에첼비를 향해 뻗어나갔다.
에첼비 또한 헬릭스의 공격에 분노했다.
“미쳤구나, 헬릭스. 이곳이 박람회라는 것을 잊었느냐. 여기에서 정말 싸워보자는 말이지.”
전신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마나 공격에 에첼비는 발굽같이 생긴 양손으로 전신을 감싼 뒤 입을 크게 벌렸다.
휘오오오.
에첼비의 입에서 강력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소용돌이 기운은 헬릭스의 마나 폭풍을 꿰뚫으려했고, 헬릭스의 마나 폭풍은 반대로 에첼비의 소용돌이 기운을 밀어내려했다.
팽팽한 기의 대결이 이루어지면서 주위는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쿠르릉.
워낙 강한 마족들이었기에 둘의 대결로 인해 땅이 흔들리고 공기가 터져나갔다.
펑!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