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장현의 선물 (4)
안젤라는 목욕가운차림으로 장현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목욕 중이었어. 이제 성에서의 일정은 마친 거야?”
“……네.”
장현은 안젤라의 가운차림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장현은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위기감을 느꼈다.
‘안 돼. 정신 차려야 돼. 소성주는 서큐버스. 남자를 유혹해 정기를 흡수하는 마족이야. 자칫하다간 사랑을 얻기는커녕 내가 유혹에 넘어가겠어.’
과연 서큐버스의 사랑을 얻는 게 왜 어려운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을 얻기 전에 먼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상대는 순수한 일반 여성이 아니다.
마족 서큐버스, 남성의 정기를 빼앗아 힘의 원천을 삼는 종족.
그동안 소성주라는 신분과 창조신의 아이템이라는 목적 때문에 잊고 있었다.
‘견뎌내야 해.’
이제부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서큐버스의 유혹을 버텨내는 지독한 자신과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인류를 구원해야 할 사람이 고작 서큐버스의 유혹도 버텨내지 못해선 안 돼.’
장현은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걸었다.
그것은 이성을 짓밟는 본능을 이겨야 하기 때문.
서큐버스의 외형은 인간과 큰 차이가 없었다.
판타지 세계의 엘프가 외모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듯, 마계에서의 서큐버스 역시 그렇다.
더구나 서큐버스는 남성의 원초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기운을 자연스럽게 뿜어낸다.
애초에 그런 스킬을 타고난 종족인 것이다.
지금 안젤라가 침실에 장현을 부르고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나타났다는 것은 그 의도가 뻔했다.
‘날 굴복시켜 노예로 삼겠다는 거겠지.’
그런 마족을 상대로 연애칼럼의 기사를 떠올리며 매력을 발산해보겠다고 설쳐댄 스스로가 우스웠다.
“장현, 뭐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안젤라의 우유빛 피부가 아슬아슬하게 걸친 목욕가운 밖으로 보였다.
‘안 돼! 장현 너의 미래를 보려거든 고개를 들어 안젤라의 머리를 보라.’
장현은 스스로에게 다시 주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안젤라의 정수리를 향했다.
‘꿀꺽.’
절로 침이 삼켜지며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긴장하는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건만, 정작 안젤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대했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 장현을 유혹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다.
유혹 스킬을 제대로 쓴다면 고작 플레이어 따위가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쓰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대상이 자신 영지의 플레이어 아닌가.
장현이 알았다면 억울해했을 것이다.
“그건 뭐지?”
안젤라가 양머리 형태로 감은 수건을 만지며 장현이 가져온 만티코어 조형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지독하게 뇌쇄적인 자세였다.
“상점 이용권을 사용하러 가보니 몇몇 인형들이 보이더군요. 그중 만티코어 인형이 마계 귀족 자제분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하기에 소성주님 생각이 나서 제가 만들어 보았습니다.”
“정말 네가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안젤라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조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머. 이 눈망울 좀 봐. 만티코어의 눈동자가 이렇게 순둥한 건 또 처음보네. 그런데 상점이용권을 기껏 얻어놓고 아이템은 안사고 거기서 이걸 만든 거야?”
“제가 살만한 게 보이지 않더군요. 아시다시피 저는 대장장이이자 연금술사. 재료만 있다면 직접 만들 수 있습니다. 상점 주인에게는 재료를 구해달라고 요청해두었습니다.”
“하긴, 스스로의 실력에 그렇게 자부심이 넘치는데 드워프제라고 해서 네 눈에 차겠어.”
안젤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를 인정하는 말인지 빈정대는 말인지 애매모호했기에, 장현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안젤라는 장현이 직접 제작했다는 만티코어 조형상을 자세히 살폈다.
‘얘가 정말 실력이 뛰어난 것 같기는 한데. 그저 허풍쟁이는 아니었단 말인가.’
팔찌를 만들 때부터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캐릭터 조형상 같은 예술품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않았었다.
‘분명 거친 면이 있지만, 이정도면 드워프제라고 해도 믿겠어. 더구나 이 눈동자는, 정말 살아있는 듯해. 저렇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이라니. 나도 모르게 간식을 던져주고 싶어지는걸.’
안젤라는 마계 귀족이었기에 아버지인 헬릭스를 따라 다양한 고위 마족들의 만찬에 다니면서 그들이 보유한 예술품을 보아왔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도공학 박람회에서는 마도공학기술 외에도, 주최 측이 가진 예술품 또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예술품에 대한 안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안젤라가 칭찬할 정도라면 사실 마계 어디에 내놔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이리라.
‘이거 미술품 옥션에 올려놔도 꽤 비싼 값을 받겠는걸.’
물론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팔 생각은 없었다.
선물로 받은 것을 내다팔 정도로 마나 포인트가 아쉽지 않았다.
그저 칭찬 표현에 불과했다.
그녀는 장현이 더욱 쓸 만하다고 느껴졌다.
선물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다.
“내가 다시 찾아오라고 한 건 제시카 그년과의 대결 때문이야.”
“대결이라니요.”
장현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의 자신은 제시카와의 내기에 엮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1회차 때 영지전의 리더는 김덕배가 아닌 강신배였고, 자신은 그저 그의 수하에 불과했다.
지금처럼 사실상 리더의 위치에 있지는 않았기에 안젤라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기도 했다.
장현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을 언급하자 긴장하며 안젤라의 말에 집중했다.
“너희들이 상점에 갔을 때, 제넥스 성의 소성주인 제시카가 여기에 왔었어. 마도공학 박람회 때문에 들른 모양인데 어쩌다보니 그년과 다투게 되고 말았거든. 자세한 이유는 묻지 마. 원래부터 걔와 난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어쨌든 마도공학 박람회를 앞두고 대판 싸울 순 없어서 짧게 그치긴 했는데, 이후에 대리전을 치르기로 했어. 대공의 박람회 이벤트 경기에서 각자 가진 플레이어 중 누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지로 말이야. 장현, 난 제시카에게 지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 더군다나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내기까지 걸었단 말이야. 이쯤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전한 거 같은데.”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 쪽의 플레이어들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하겠습니다.”
장현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안젤라는 흡족해했다.
“아참, 그년이 자기 플레이어 중에 아르헨이라는 애를 데려왔던데 꽤 쓸 만하더라. 어찌나 자랑을 해대는지 나도 네 자랑 좀 했어.”
역시 아르헨이 밑에 있으니 제시카가 그렇게 자신을 하며 자랑했겠지.
안젤라가 아르헨의 진면목을 알았다면 쉽게 경기를 수락했을까.
표정을 보아하니 물리진 못했을 것 같았다.
다행인 건 자신이 1회차 때와 다르다는 것.
문득 1회차의 강신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지 궁금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입이 무기인 녀석이니 어떻게든 빠져나갔겠지.’
그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은 필요 없어. 그냥 이기기만 하면 돼. 난 결과만이 중요해.”
“네.”
어차피 정해졌기에 장현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다.
장현의 대답에 만족한 안젤라는 힐끔 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은 제시카와 나의 비공식적인 대결이고. 대회가 하나 더 있어. 어찌 보면 이게 메인이라 할 수도 있다.”
“…….”
장현이 안젤라를 쳐다보았다.
“너와 내가 팀이 되어 마도 공학 박람회에서 우리 헬릭스 성의 신제품을 시연해야 한다.”
“신제품이라면?”
“그래, 앞전에 내가 네게 숙제를 내준 거지.”
장현의 눈빛에서 의문스러움을 읽어낸 안젤라는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 너에게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저 내 옆에서 날 보조하는 정도면 충분해. 원래라면 널 거기에 참여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너의 손재주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널 써먹으려면 그런 경험이 필요할 거 같아서 참가시키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마.”
“혹시 그 박람회의 목적이라든지 신제품 시연과 박람회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걸 안다면 제가 좀 더 준비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흠.”
안젤라는 잠시 고민했다.
장현의 말 또한 일리가 있었다.
그를 박람회 시연회 때 동행시키는 것은 앞으로의 사업에도 써먹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마도공학 박람회와 신제품에 대한 건 마계에서도 일급비밀에 들어가는 내용.
자신은 대공의 측근인 아버지 덕에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내용을 플레이어에게 얘기해도 될까.
딱히 장현이 안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될 거 같지는 않았지만, 자칫 이게 알려지는 일이 생겼다가는 아버지 헬릭스 성주까지도 크게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사고라는 건 원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안젤라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 녀석을 내 유혹의 스킬로 굴복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럼 결코 나를 거역할 수 없을 테니 문제가 생기지도 않겠지.’
안젤라는 장현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기술을 드디어 써보는구나.’
별로 써볼 일이 없었던 유혹 스킬을 오랜만에 사용하는 안젤라였다.
남성의 정기를 빼앗아 에너지원으로 삼기위한 종족 고유스킬.
그녀가 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높은 신분으로 인해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넘쳐나는 마나 포인트를 가진 고위 귀족이자 헬릭스 성의 사업부를 책임지는 소성주인 그녀가 고작 에너지원을 얻겠다고 남성들에게 유혹 스킬을 쓴다니.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현재차의 네시스, 그 자에게 한번 써봤다가 얼마나 곤혹을 겪었던지.’
예전에 한번 유혹 스킬을 장난삼아 써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진저리치듯 고개를 저은 그녀는 얼른 잡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안젤라는 서큐버스 종족 스킬을 발동하며 장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 녀석, 꽤나 단단한 체구군. 근육도 골고루 발달되어있고.’
대장장이라기에 팔 근육만 발달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장현의 신체는 전체적으로 잘 발달해있었다.
남성의 몸을 자세히 훑게 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때 장현의 귀에 무언가 알림이 울렸다.
[안젤라의 호감도가 1 증가하였습니다.]
장현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오히려 호감도가 증가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응? 뭐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찰나, 순간 장현의 눈과 안젤라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스킬이 발동했다.
장현의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안젤라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사이한 기운이 스물스물 뻗어 나와 장현의 전신을 덮어갔다.
흠칫.
장현은 가슴이 진탕되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솟았다.
‘이건 이성을 유혹하는 서큐버스의 고유 스킬.’
안젤라를 안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서서히 장현을 잠식해갔다.
이성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안 돼!’
입술을 깨물며 이겨내려 해도 온몸이 간질간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은 느낌과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쾌감이 엉덩이뼈부터 시작해 척추와 목 뒤끝을 따라 머리까지 한순간에 치달았다.
장현은 필사적으로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이건 분명 서큐버스의 유혹 스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