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제시카와 아르헨 (3)
마계상점 이용권과 마나 포인트 1만이라면 지금껏 플레이어들이 얻은 마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본경기에 오면서 마나 포인트는 대부분 상점에서 아이템을 구매하는데 썼다.
영지에서 감자 두더지의 감자로 마나 포인트를 얻고 크로커다일족과의 전투에서 적들을 사냥함으로써 마나 포인트를 꽤 얻었지만, 그만큼 부상회복과 스킬 사용에 상당히 써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가진 마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장현은 안젤라의 팔찌를 제작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마나를 사용했다.
그만큼 헬릭스가 내놓은 보상은 그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1회차 보다 훨씬 좋은 내용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확실히 놀랄만한 보상이다.’
장현은 1회차와 달리 영지전 승리의 주역이 되면서 크게 얻게 된 포상에 만족했다.
한편, 갈수록 자신이 알던 과거와 달라지는 현실에 위기감 또한 들었다.
마계상점 이용권과 1만 포인트는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남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끝났다. 물러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김덕배가 대표로 인사를 하고 물러나면서 헬릭스 성주와의 알현은 끝났다.
일행은 바로 상점으로 향했다.
소성주를 다시 만나는 건 성주성에서의 볼일이 끝난 뒤에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로메드 역시 그런 결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상점으로 안내했다.
상점은 튜토리얼의 상점보다 훨씬 컸다.
튜토리얼의 상점이 편의점 수준이라면, 성주성의 상점은 대형마트 급이었다.
로메드가 상점 입구로 가자, 관리인이 다가왔다.
관리인 역시 로메드와 같은 크로커다일족이었다.
“여어, 로메드. 오랜만이네. 영지전 얘기는 들었어. 크레온이 이끄는 크로커다일족이 패했다면서.”
“그래. 이들이 영지전에서 승리한 자들이야. 성주님께서 상점 이용권을 보상으로 하사하셨네.”
그 말에 관리인은 눈을 빛내며 장현 일행을 훑었다.
그러다 로메드에게 나지막하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중에서 크레온을 이긴 자가 누군가?”
“저기, 저 인간이야.”
로메드는 장현을 가리켰다.
관리인은 장현을 자세히 보더니 다시 물었다.
“크레온이 마족화가 되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맞아.”
“그런데도 이겼다니. 대단하군.”
“그렇지. 대단하지. 자, 이건 성주님의 사인이 들어간 서류네. 확인해보게.”
로메드는 계속된 질문에 짜증이 솟았다.
그는 대화를 피하고자 관리인에게 서류를 빨리 건넸다.
서류는 영지전 승자들에게 상점을 이용하게 해주라는 내용이었다.
“이상 없군.”
관리인은 서류를 확인하고는 장현 일행을 안내했다.
“이리로 들어가면 된다네. 상점은 이용해봤을 테니 편하게 고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게.”
그렇게 장현들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
장현 일행이 상점으로 들어갔을 무렵, 제시카가 헬릭스 성에 도착했다.
그 소식을 들은 안젤라는 곧장 달려갔다.
물론 그전에 고르고 고른 옷과 구두로 한껏 멋을 냈다.
서큐버스가 좋아하는 중요 부위만 살짝 가린 드레스였다.
안젤라는 자신의 각선미를 뽐내는 듯 한껏 포즈를 취하며 인사했다.
“어서와, 제시카.”
“안젤라, 오랜만이야. 그 음탕한 옷차림은 여전하구나.”
제시카는 안젤라의 옷차림을 보고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드라큐라 백작의 피를 이어받았다.
외형은 인간과 다름없지만 자세히 보면 송곳니가 길게 솟아있다.
아버지 제넥스가 마왕의 최측근인 고위 귀족이라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드라큐라 백작 가문은 품행을 매우 중요시한다.
제시카는 발목까지 오는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에 둘의 옷차림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오호호,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렴, 제시카. 나라면 그런 촌스런 옷을 입느니 집 밖을 안 나서겠구나.”
“뭐야. 너야말로 벗었는지 입었는지도 모를 차림새로 돌아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니. 정말 싼 티 나구나. 고위 귀족의 체통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니?”
“뭐? 피나 빨아먹는 더러운 흡혈귀 주제에!”
“남자 정기나 빨아먹는 서큐버스가!”
안젤라와 제시카의 말싸움으로 헬릭스 성주성 입구가 시끌벅적했다.
그 순간 그들을 말리는 자가 있었다.
“그만!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마도공학 박람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그는 로메드였다.
장현 일행을 상점으로 안내한 후, 제시카가 성문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서둘러 그 곳으로 달려가다 이미 소란스럽다는 걸 알아챘다.
‘이 목소리는 혹시.’
친숙한 목소리에 서둘러 뛰어간 그는 두 소성주의 신경전이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을 보고서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두 마족은 분명 마력을 써가며 싸웠을 것이다.
그로 발생하는 문제는 온전히 경비대장인 로메드 책임이다.
헬릭스 성주는 안젤라와 제시카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로메드는 현장에 도착하자 즉시 소리쳐 그들을 말렸다.
“그만!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대공의 박람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대공의 박람회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안젤라와 제시카는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말싸움마저 끝난 건 아니다.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진 안젤라가 소리쳤다.
“로메드, 비켜! 저 피나 빨아먹는 흡혈귀년이 나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안젤라님! 제시카님은 제넥스님의 딸입니다. 만약 제시카님과 싸우게 된다면 성주님들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헬릭스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으아아아!”
안젤라는 분한 나머지 괴성을 질렀다.
로메드가 간신히 안젤라를 진정시켰으나 제시카는 그냥 있지 않았다.
“이 천박한 서큐버스년이 뭐라고 하는 거야. 감히 드라큐라 백작 가문의 소성주인 내게 흡혈귀라고!”
드라큘라가 귀족인 반면 흡혈귀는 천민이다.
고상한 백작가문의 소성주가 면전에서 흡혈귀라는 말을 들었으니.
제시카는 부들부들 떨었다.
“캬아아악!”
제시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길게 뽑았다.
그러자 로메드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번엔 제시카를 진정시켰다.
“제시카님. 진정하시지요. 여기는 헬릭스님의 성입니다. 두 분이 싸우신다면 문제가 커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 모두 마도공학 박람회 참석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 그걸 원하십니까?”
“음…….”
로메드의 마지막 말에 안젤라와 제시카는 결국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마도공학 박람회에 불참이라니.
마계 귀족가문의 성주와 후계자가 모두 모이는 자리다.
그동안 척박한 성에 갇혀있다시피 한 탓에 마도공학 박람회는 그들에게 파티나 다름없었다.
안젤라와 제시카 둘 다 박람회에서 자신들의 멋진 모습을 다른 귀족들에게 보여주는 단꿈을 꾸고 있었기에 로메드의 말이 먹힌 것이다.
‘휴…… 그나마 선을 넘지 않아 다행이다.’
로메드는 서둘러 둘의 화제를 돌릴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두 분 직접 싸우시면 문제가 커지니 차라리 대리인을 내세우시는 게 어떨까요?”
“대리인이라니?”
로메드가 던진 미끼를 안젤라가 먼저 물었다.
“마침 각 영지전에서 승자가 결정됐으니, 영지전 승자들끼리 대리전을 치르게 함이 어떨까 합니다.”
“난 좋아.”
안젤라가 흔쾌히 대답하자 로메드는 제시카를 돌아보았다.
“제시카님은 어떠신지요?”
“흥, 과연 승부에서 지고 나서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물론 좋아. 여기 아르헨이라면 어떤 상대라도 이길 테니까.”
제시카가 뒤에 서 있던 아르헨에게 팔짱끼며 말했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과연 실력도 좋을라나. 우리 장현을 보고도 그런 얘길 할 수 있을까.”
안젤라 역시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감 있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장현에 대한 분노로 휩싸였던 그녀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하하, 너야말로 아르헨의 실력을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르헨!”
제시카가 부르자 아르헨은 앞으로 나서 안젤라에게 인사했다.
“존귀하신 소성주님께 플레이어 아르헨이 인사드립니다.”
아르헨은 안젤라의 옷차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의 안젤라였으면 건방지다며 눈을 뽑아버렸을 테지만.
지금 이순간은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안젤라가 아르헨에게 싱긋 웃었다.
제시카를 도발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호호호, 네 녀석, 사내라고 눈을 함부로 굴리다간 뽑힐 수 있단 걸 생각해야지. 하긴 기껏 보는 여자라고는 제시카뿐이니 오늘 나로 인해 안구가 호강을 했나보구나.”
안젤라의 말에 대뜸 제시카가 눈을 치켜뜨며 아르헨을 노려보았다.
사실이면 용서치 않을 기세였다.
“뭐, 너 쟤를 훔쳐 본 거야?”
“아, 아닙니다.”
“호호, 제시카 왜 불쌍한 아르헨을 핍박하는 거니. 남자가 아름다운 여성에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흥! 아르헨 솔직하게 얘기해봐. 나랑 저년 중에 누가 더 아름다워?”
제시카가 아르헨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했다.
“제시카님이 물론 더 아름다우십니다.”
“이봐 안젤라. 잘 들었지?”
안젤라는 코웃음을 쳤다.
“흥. 잘들 노는구나. 유치해서 못 봐주겠어. 로메드, 어서 대결 얘기로 넘어가자꾸나.”
“대표를 내세워 대표간의 전투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팀전으로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전투는 박람회에서 경기를 할 테니 박람회에서 누가 더 높은 순위로 오르는가로 하자꾸나. 그렇게 아르헨을 칭찬하니 대표 한 명만 내세워도 되지 않겠어?”
안젤라가 제시카에게 말하자 그녀 또한 흔쾌히 응했다.
“후회하지나 말려무나.”
“두 분이 동의하셨으니 대공의 박람회에서 양쪽의 플레이어중 최고 순위를 기록한 쪽이 이긴 것으로 하겠습니다. 승리에 대한 보상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는 것으로 하시죠.”
로메드가 두 소성주를 바라보며 재차 확인을 했고, 둘은 이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왜 이리 귀가 가렵지? 누가 내 욕을 하나.”
장현은 일행들과 함께 상점에서 물건을 보다가 귀가 가려워 긁었다.
“소성주가 또 네 욕하는 거 아냐?”
김덕배가 웃으며 농담했다.
“내가 무슨 욕먹을 짓을 했다고 그래.”
“너 안젤라 소성주한테 아까 혼났잖아. 이따가 다시 오라고 하던데 걱정 안 돼?”
“별일은 없을 거야.”
장현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젤라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찜찜하긴 했다.
‘진짜 내 욕하고 있으려나. 뭐, 욕이야 하든 말든 상관없긴 한데.’
그는 찜찜함을 뒤로하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
상점은 대형마트처럼 크고 넓었다.
튜토리얼을 끝내고 이용했던 상점이랑은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같았다.
“오랜만이군.”
“당신은 지로발?”
장현은 튜토리얼에서 만난 상점 주인을 또 만나게 되자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네가 에레뜨의 원형을 되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종족의 숙원을 이루어준 자가 너라는 얘기를 듣고 여기 헬릭스 성주성의 상점으로 오기위해 힘 좀 썼지.”
“그랬군. 사실 나는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닌데.”
“아니다. 리자드맨 종족을 대신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나 혼자서 만든 게 아니야. 리자드맨들이 도왔다. 그리고 아모스는, 나를 돕다가 죽기까지 했다.”
장현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지로발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리자드맨 종족의 숙원인 에레뜨 팔찌가 마계 상점 아이템 목록에 올라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진심으로 너에게 감사하는 바다.”
지로발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낀 장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오히려 그에게 좋았다.
상점 주인인 지로발이 이렇게도 고마워하고 있으니, 앞으로 아이템 구입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고마우면 말로만 하지 말고 실질적인 도움을 줘.”
“걱정 마라. 나 지로발. 상점에 대해서는 전문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얘기해라.”
지로발의 뜨거운 눈빛은 부담스러웠지만 그의 태도는 장현에게 바라는 바였다.
마침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생긴 터라 장현은 지로발에게 물었다.
그는 안젤라에게 받았던 섀도우 마스크와 힌지 모듈을 꺼냈다.
“혹시 이 제품에 대해서 알고 있나?”
“이건 섀도우 마스크와 힌지 모듈인데. 이걸 어디서 구했어? 아직 양산되진 않고 샘플 정도만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네가 이걸 갖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