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제시카와 아르헨 (1)
‘어쩔 수 없나.’
어쩌면 이정환이 대장장이 조각을 가진 게 아닐까 생각했기에 못내 아쉬웠다.
장현의 심정을 이해한 듯 김덕배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현아, 지금이라도 놈들을 쫓아 가볼까?”
“아니. 우린 지금 성주성으로 가야 돼.”
장현은 고개를 돌려 이나연과 이성훈에게 지시했다.
“이나연, 이성훈 두 사람은 지금 바로 경비대원과 궁수대원들을 차출해서 놈들을 잡아오게 해.”
“네!”
“알겠어요.”
사안이 급한지라 그들은 급히 뛰어갔다.
장현은 김덕배 등에게 말했다.
“그럼 그 일은 그렇게 하고. 이제 성주성으로 갈 준비를 하자. 이나연과 이성훈이 돌아오는 대로 바로 떠나야 해.”
“그런데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기에 최고 관리자가 아무도 없는 게 신경 쓰이는데.”
“태석이가 있으니 괜찮다.”
김덕배의 염려에 최형석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꾸우웅.
그 때 안젤라를 태우고 떠났던 지네차가 다시 돌아왔다.
“마침 우릴 데리러 왔나 보군. 가자.”
장현은 고개를 돌려 지네차를 보며 말했다.
이제 성주를 만날 차례다.
한편 강신배는 이정환, 김혜정과 함께 도망치다가 세이프존의 경계에 이르렀다.
“헉, 헉! 이 길로 가면 되려나.”
김민석과 이상영은 이미 영지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차피 튜토리얼에서 만난 사이라 특별히 정은 없었지만 막상 죽었다고 생각하니, 남일 같지 않았다.
“대장, 여기서부터는 세이프존 밖이야. 독안개가 있다고.”
김혜정은 불안한 목소리로 강신배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죽을 거야. 독안개가 어느 정도인지 겪어보진 않았잖아. 일단 나가보고 정 안되면 어디 숨어있든지 해야지. 세이프존이 그래도 넓으니 숨을 장소 정도는 있겠지.”
“대장, 차라리 장현에게 빌고 영지민으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설마 우릴 죽이기야 하겠어?”
“흥. 우리가 크로커다일 편에서 그들에게 발리스터를 날린 걸 생각해봐. 너라면 용서해주겠어?”
“쳇. 영지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건데 원망하려면 마족을 원망해야지.”
“그럼 넌 이대로 돌아가. 과연 널 죽일지 살려줄지 나도 궁금하니까. 하긴 넌 외모는 예쁘장하니 거기 남자들이 좋아라 하겠어.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게 낫겠지.”
강신배가 김혜정에게 비릿한 말투로 말했다.
“으으으. 싫어.”
김혜정은 강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입을 다물고 강신배를 따라 세이프존을 넘어갔다.
독 안개는 말 그대로 안개지대였기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에서 영지민으로 강등되는 바람에 마나가 줄어든 그녀는 갓 튜토리얼을 통과한 수준에 불과했다.
‘젠장,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김혜정은 독 안개를 헤치고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강신배의 지시였긴 하지만 그녀는 발리스터 화살을 직접 쏘았다.
영지민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금방 들통 날 것이다.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살아도 산 게 아닐 테니.’
김혜정은 옆에서 말없이 따라가는 이정환을 보며 물었다.
“이정환씨, 당신은 재주가 많잖아. 당신이라면 죽이지 않을 텐데 왜 따라왔어요?”
“재주가 많아 발리스터를 만들었지. 분노한 저들이 재주 하나 때문에 살려줄지를 기대하는 건 도박이다.”
“뭐…… 당신이나 나나 어쩔 수 없네.”
이정환의 말을 납득한 김혜정은 고개를 끄덕이다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어, 혜정 씨 입가에 피!”
“뭐?”
이정환의 말에 손등으로 입가를 훑은 김혜정은 피가 묻어 나오자 왈칵 두려움이 치밀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그러고 보니 머리도 어지러워.”
김혜정이 휘청거리자 이정환이 그녀를 안으며 부축했다.
“독 안개 때문일 거야.”
“그럼 어떡하죠. 나, 죽는 건가요. 이렇게 죽기 싫은데, 흑흑.”
김혜정은 죽음이 닥치자 두려움에 눈물을 줄줄 흘렀다.
이정환은 앞에 가던 강신배를 불렀다.
“대장, 혜정씨가 몸이 안 좋아. 돌아가든지 아니면 사냥하면서 마나 포인트라도 얻어야 할 거 같아. 안 그럼 죽어.”
강신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그는 힐끔 김혜정을 훑어보더니 이정환에게 말했다.
“이봐, 이정환씨. 돌아가긴 이미 글렀어. 살려면 빨리 여길 벗어나는 수밖에 없어. 일단 사냥감이 보이면 잡자고.”
“알겠어. 그런데 지금 당장 마나가 없으면 혜정 씨는 위험해. 혜정 씨는 당신 연인이잖아.”
“…….”
이정환의 말에 강신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당신, 혜정이 좋아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농담이라면 너무 질이 나쁜 농담인데.”
이정환이 싸늘한 말투로 강신배에게 말했다.
“흥분하니 더 수상해.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마나를 혜정이한테 주지 그래. 그럼 더 오래 버티겠지.”
“그, 그건.”
“왜 그건 못하겠나? 뭐 이해해. 누구나 자기 목숨이 아까운건 마찬가지니까. 그럼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이렇게 시간 허비할수록 혜정이가 더 위험해져.”
이정환은 강신배의 말에 결심한 듯 말했다.
“알겠어. 내 마나를 혜정 씨에게 주지.”
“뭐? 진심이야?”
끄덕.
이정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혜정의 손을 잡고 자신의 마나를 건넸다.
김혜정은 마나를 받자 점점 얼굴색이 돌아왔다.
반대로 이정환은 독안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얼굴색이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이정환 씨.”
김혜정은 감동 어린 표정으로 이정환을 바라봤다.
정작 강신배는 목숨의 위기가 닥치자 그녀를 외면했거늘 이정환이 자신에게 목숨이나 다름없는 마나를 주었다.
차마 말할 힘도 없었기에 그녀는 강신배를 힐끗하며 속으로 저주를 던졌다.
‘저런 개새끼를 좋다고 쫓아다녔다니 내가 눈이 삐었지.’
생각지도 못했던 이정환이 그녀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마나를 주자 김혜정은 그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고마워요. 오빠.”
김혜정은 처음으로 그에게 오빠라 불렀다.
“그래.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
이정환은 간단히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여기서 살아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웬 사람들이지? 이 독 안개를 뚫고 오다니.”
금발머리의 미남자가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흠칫.
강신배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독 안개가 가득한 곳에서 태연한 얼굴로 걸어오는 남자에게서 강자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넌 누구냐?”
“너희들이야말로 누구지?”
남자가 반문할 때 그의 뒤에서 여성형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헨, 무슨 일이냐?”
“별일 아닙니다. 제시카님. 여기에 인간들이 있어서 정체를 물어보던 중입니다.”
“인간이라고? 그렇다면 헬릭스 성주의 플레이어일 텐데. 분명 헬릭스성의 영지전은 끝난 걸로 아는데 왜 저들이 이곳을 떠돌고 있을까. 아르헨 넌 어떻게 생각해?”
“수상한 자들 같습니다.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렴.”
마족은 빨간색의 머리를 한 인간형 외모로 말을 할 때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녀는 헬릭스와 견원지간인 제넥스의 딸 제시카였다.
“헉!”
제시카의 등장에 강신배는 놀랐지만,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인간으로 보이는 자와 그 곁의 마족.
아마도 다른 성의 마족과 플레이어일 것이다.
눈앞의 인간도 강한 기운을 뿜어냈지만, 그 옆의 마족은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안젤라 같은 소성주 신분일까.’
강신배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았다.
“위대한 분을 뵙습니다.”
그는 제시카 앞에 넙죽 엎드리면서 다가오던 김혜정과 이정환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얼떨떨해하다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서둘러 강신배를 따라 땅에 엎드렸다.
금발의 남자 아르헨이 물었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나? 왜 여기에 있지?”
강신배가 서둘러 말했다. 그는 사실 속에 거짓을 섞었다.
“영지 전을 벌이던 중 마족화가 된 자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발리스터를 동원해서 어떻게든 놈과 싸워보려 했으나 도저히 역부족이었기에 놈을 피해 도주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발리스터를 동원했다고? 혹시 누가 그걸 만들었지?”
“저희 형제가 만들었습니다.”
강신배는 이정환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제라는 말에 이정환의 눈이 순간 끔벅거렸으나 가만히 있었다.
강신배의 언변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걸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정환은 강신배의 말에 호응해줘야겠다고 느껴 말을 보탰다.
“네, 저와 강신배 형님 그리고 여기 김혜정 이렇게 세 사람이서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정환은 굳이 김혜정을 끼웠다.
아르헨의 질문에서 살 수 있는 희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발리스터뿐 아니라 지금 갖춘 장비도 당신이 만들었나?”
“아.”
이정환은 대답하기에 앞서 강신배와 김혜정을 흘깃 살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은 것이다.
그 기색을 알아챈 아르헨은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걱정 마, 걱정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 난 의리 있는 사람을 좋아하니 염려 안 해도 돼.”
“감사합니다.”
자신의 질문에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그의 대답에 아르헨은 씨익 웃으며 제시카에게 말했다.
“제시카님, 이 자들 꽤 쓸모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조금 전엔 수상해 보인다더니. 영지전에서 도망쳐온 버러지들이잖아.”
“제시카님 뜻이 그러시다면 죽이겠습니다. 다만 이자들 중 꽤 능력 있는 자가 있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능력이지?”
“아이템을 만드는데 상당한 재주가 있는 거 같습니다. 발리스터와 지금 착용하는 장비들을 저 자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살려두면 제넥스 성주님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아이템을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고.”
제시카는 아르헨의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아이템을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면 사업에 도움이 될 인재일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시카는 아르헨에게 말했다.
“그럼 이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제시카님.”
아르헨은 제시카에게 인사하고는 이정환을 돌아봤다.
엎드린 채 고개만 살짝 들고 있는 그의 귀에 대고 살며시 물었다.
“너희 일중 중 누가 리더냐, 너냐?”
“아닙니다. 저기 강신배 형님이 영주셨습니다.”
이정환은 강신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강신배를 형님으로 소개했다.
“흐음 이제 사실대로 말해. 강신배 당신이랑 형제 아니지?”
“그, 그건.”
“날 속일 생각 마. 앞으로 네 목숨은 내게 달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지. 난 거짓을 알아채는 스킬이 있어.”
아르헨의 말에 이정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습니다.”
“좋아.”
원하는 답을 얻은 아르헨은 제시카에게 말했다.
“소성주님,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한 손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쥐는 아르헨을 보며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해. 어차피 네게 맡긴 거니까.”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제시카에서 인사하던 아르헨은 곧 몸을 돌리더니 엎드려있던 강신배의 목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쉬이익.
강신배는 아르헨이 이정환에게 다가가 속삭일 때부터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의 깊게 아르헨을 살피고 있었다.
아르헨이 검을 뽑자 그는 즉시 몸을 뒤로 뒹굴며 도망쳤다.
“흥! 내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르헨의 검에서 유형의 기운이 솟아 나왔다.
검의 형태를 띤 기운은 대략 60cm 정도의 길이였다.
아르헨은 검을 강신배의 등 뒤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뻗어나간 유형의 기운이 부메랑처럼 날아갔다.
서걱.
검의 기운은 아무런 저항 없이 강신배의 목을 잘랐다.
데구르르르.
1회차에서 활약했던 강신배는 이렇게 영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르헨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프스스스.
아르헨의 검에서 뻗어 나왔던 유형의 검이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는 듯 다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