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리자드맨과 싸우다 (3)
장현이 떠난 뒤 최형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스윽.
“자자……. 표정들 풀어. 자식들아. 그동안 겪은 일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이나연! 그런 표정 안 어울린다.”
“뭐라는 거야? 저 인간이.”
최형석의 말에 이나연은 발끈했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기에 진심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보다 부하들 챙겨야 하는 거 아니냐?”
“음…….”
이나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영지민들을 돌아봤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크게 다친 부상자들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때 김덕배가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신성력으로 부상당한 사람들 혹시 치료 안되려나?”
그 말에 이나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힐링 스킬이 있었지.’
[힐링. lv.1]
-여신 아테나의 사제 및 성기사들의 마법
-부상을 당한 자들을 치유할 수 있다.
-치유하고자 하는 부상의 정도에 따라 소요되는 신성력이 다르다.
-마나가 아닌 신성력이 요구되며 마나를 신성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신성력]
-여신 아테나의 사제나 성기사에게 주어지는 힘이다.
-여신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 마나포인트를 신성력으로 변환할 수 있다.
-마나 신성력 변환 비율 1:1
-현재 보유 신성력 : 100
이나연은 자신의 상태창에 떠 있는 알림을 다시금 확인했다.
성기사가 되면서 처음부터 주어지는 신성력이 100이다.
지금이 바로 써볼 차례다.
그녀는 자신에게 능력을 주는 분에게 기도했다.
‘여신 아테나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의 종이 치유의 힘을 원합니다.’
이나연은 눈을 감고 기도하며 자신이 가진 신성력에 집중했다.
화악.
그녀의 몸에서 빛이 환하게 나더니 따뜻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아…….”
이나연도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에 놀랐다.
기도의 힘.
비록 신계는 마왕에 의해 몰락했지만, 아직 세계에 잔존해 있는 신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아테나였다.
이나연은 곧 영지민들에 다가가 상처가 심한 자들부터 치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나연은 새로운 힘을 각성했다.
이나연이 신성력으로 부상자를 치유했지만 금방 신성력이 바닥났다.
가진 마나 조차도 신성력으로 변환해 치유했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정신이 어지러워 눈앞이 핑 돌았다.
“헉헉……. 고작 세 명한테만 썼는데 벌써.”
그 모습을 본 김덕배가 말렸다.
“누나 고작 세 명이 아니야. 죽어가는 사람 세 명이나 살린 거야. 그만해. 더는 위험해.”
“덕배야.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야. 안돼! 내가 포기하면 저 사람들이 죽어.”
“누나…….”
이나연과 김덕배의 모습을 본 이성훈이 나섰다.
“음…….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저요?”
김덕배가 영주라는 호칭에 익숙하지 않아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네. 영주님과 경비대장님 두 분 모두 아셔야 할 내용입니다.”
“저도요? 혹시 이들을 치료하는 것과 관련된 건가요?”
이나연은 지친 데다 스스로에 대한 가책이 큰 상태였다.
치료와 관련된 얘기가 아니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네. 지금 경비대장님은 신성력으로 치유하려고 하시는데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라고요?”
“아 정말인가요? 그게 뭐죠 이성훈 공무원님. 아니……. 주무관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김덕배가 익숙지 않은 호칭을 사용하며 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이성훈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상처 회복에는 마나가 도움 되죠. 최형석 씨와 김태석 씨도 크게 다치었을 때 장현씨가 마나를 전해줘 살아났었죠.”
“야야……. 그 얘긴 왜 해?”
최형석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자기 얘기가 나오자 눈을 부라리며 소리 질렀다.
김덕배가 장현과 최형석을 번갈아 봤다.
“그…… 렇겠죠.”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을까.
그 때문에 저 최형석이 장현을 형님으로 모신다고 쫓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성훈의 말에서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이나연이 물었다.
“혹시 그때 장현씨가 한 것처럼 우리가 마나를 부상자들에게 나눠주자는 말인가요?”
“아니요. 마나를 전해 주지 않아도 경비대원들이 마나를 얻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 혹시 감자 두더지?”
“정확히는 감자죠.”
김덕배가 반문했고, 이성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훈의 말을 듣고 있던 일행들은 그제야 감자에 생각이 미쳤다.
장현의 제안으로 감자 농사를 짓기로 했던 게 더 올랐다.
“감자. 맞아 감자를 챙겨야 해.”
“이미 전투가 끝나고 영지민을 시켜 가져오게 했습니다. 저기 오는군요.”
이성훈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다치지 않은 영지민들이 감자를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아…….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이성훈 씨……. 아니 이성훈 주무관님. 감사합니다.”
이나연은 제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래서 말인데 영주님께 건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 뭔가요?”
“이번 전투를 치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보급과 방어, 전투 후 뒤처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해야 할 거 같아요.”
“어떻게요?”
“일단은 먼저 여기 부상자 수습을 하고 나서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러잖아도 지금은 부상자들이 너무 많았다.
부상자들을 한 곳으로 모은 뒤 감자를 먹였다.
장현이 애초에 감자를 주목했을 때부터 이때를 대비했기에 감자는 충분했다.
다치지 않은 경비요원들은 영지로 돌려보냈다.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기에 경비와 보급은 필수였다.
뒷정리가 일단락되자 이성훈의 제안으로 장현을 비롯한 관리자들이 회의를 위해 모였다.
“지금 우리는 영지라고 하는 곳에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아니 저 헬릭스라고 했나. 그 마족 성주는 궁전도 있으면서, 왜 우리에겐 영지전을 벌이라고 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보냈냔 말이야.”
최형석이 이성훈의 말에 큰소리를 쳤다.
다들 공감하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이쯤에서 우린 지금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현은 이성훈이 하는 말에 눈빛을 빛냈다.
‘확실히 이 사람은 쓸만해.’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장현은 이성훈이 하는 말에 집중했다.
“그럼 한번 짚어보도록 하죠. 우린 튜토리얼에서부터 계속 쫓기면서 퀘스트를 해왔습니다. 주로 사냥과 이동이었습니다. 첫 튜토리얼 미션은 흑전갈이었고, 다음은 오크였죠.”
“다 아는 소리 말고 요지가 뭐야?”
최형석의 재촉에 이성훈은 잠시 당황했다.
“으음. 아……. 그러니까.”
“최형석, 조용히 하고 들어봐.”
장현은 최형석을 제지한 후 이성훈에게 계속하라는 눈짓을 했다.
“네, 죄송합니다. 형님.”
이성훈은 감사의 인사로 장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은 우리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계속해서 이동과 사냥이었어요. 그런데 여기 세이프존으로 오면서부터 변했습니다. 정착과 농사죠. 그리고 영지전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이상한가요?”
김덕배가 의문을 제기했다.
“묘하게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역사 교사 출신인 정하진씨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마계에서 우리의 행보가 마치 지구의 인류의 기원과 유사하다고.”
“인류의 기원이요?”
김덕배가 반문했다.
“네. 그의 말에 따르면 튜토리얼은 구석기 시대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생존수단을 사냥에 의존하며 계속 이동해야 하는 것이 구석기인들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세이프존의 영지는 신석기인들이 정착한 거랑 비슷하겠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적어도 그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성훈은 덕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저도 그 얘길 듣고 나서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었는데 문득 정말 비슷한 것 같다고 느껴지더군요. 신석기인들은 사냥과 이동을 그치고 정착과 농경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딱 그와 같다고 여겨집니다.”
김덕배는 자신의 의문점을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튜토리얼에서 흑전갈과 오크 사냥한 게 먹으려고 한 건 아니잖아요? 그럼 구석기인들과는 다른 거 같은데…….”
“저는 먹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수단으로서 사냥이 필요하다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 사냥하는 이유는 마나포인트를 얻기 위함이죠. 그게 핵심입니다. 구석기인들은 식량을 위해 사냥을 했고, 우리는 튜토리얼에서 마나포인트를 얻기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럼 신석기인들이 식량을 수월하게 얻기 위해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했고, 우리는 마나포인트를 얻기 위해 영지에서 감자 농사를 한다는 건데……. 말씀대로 지구의 인류의 발전과정과 우리의 행보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김덕배가 물었다.
“네.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앞으로 우리의 방향을 정하고 생존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걸요.”
김덕배가 흥미롭다는 듯 이성훈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 장현은 이성훈의 말을 들으며 그가 영리함을 알았다.
‘공무원이어서 그런가.’
자신은 대장장이로서 무기를 만드는 것에 특화되었기에 전체 대국적인 측면에서 흐름을 알고 행동 방향을 잡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가 믿는 건 이미 경험을 해봤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현은 미처 자신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짚는 이성훈의 말에서 흥미로웠다.
‘마치 테오같군.’
마법사이자 지략가이던 테오.
언제나 위기 상황에서 방향을 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던 그가 생각났다.
이성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동굴에서 동굴로 이동을 하던 구석기인들이 정착하고 농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뭘까요?”
“글쎄……. 농기구 만드는 거 아닌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요. 바로 거주할 움집을 지은 거예요. 그때부터 동굴에서 살던 모계 중심의 가족생활을 청산하고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했어요.”
“거주할 움집을 지었다라……. 그럼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게.”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더니 이성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알 거 같았다.
이성훈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우린 집을 지어야 해요. 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요. 농경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았으니 거주할 곳을 해결해야죠.”
“그…… 렇구나.”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성훈은 듣고 있던 일행들을 향해 물었다.
“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요…….”
“아저씨 공무원이라더니 똑똑하네.”
이나연과 최형석이 동의했다.
이제 장현의 대답만 남았다.
사실상 장현이 최종 결정자나 다름없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장현에게 향했다.
이성훈 역시 자신이 낸 의견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좋은 생각이야.”
장현은 짧게 답하며 동의했다.
이성훈은 안도한 듯 한숨을 휴 내쉬며 웃었다.
그가 제안한 움집을 만들자는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이성훈은 장현을 보며 말했다.
“땅을 파는 건 곡괭이로 되지만 흙을 퍼 옮기려면 삽이 필요합니다.”
장현에게 만들어달라는 말이다.
“삽은 내가 만들어주지.”
장현은 요구나 다름없는 그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중급대장장이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어차피 아이템을 제작해야 했다.
더군다나 영지는 임시로 지낼 곳이 아니다.
앞으로 그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할 곳이다.
물론 처음부터 거창하게 할 순 없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집을 짓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거주할 집을 짓고 감자 농사를 한다.
안정적으로 마나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굳이 목숨 걸고 사냥을 할 필요도 없다.
의식주가 해결된다면 그다음은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걸로 4번째 제작할 아이템은 대삽이군.’
삽을 만드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곡괭이를 연성술로 삽으로 바꾸면 된다.
감자 재배를 위한 땅은 충분히 파놓았기에 곡괭이 수는 이제 줄여도 된다.
그것으로 삽을 만들면 된다.
장현은 내친김에 곧장 대삽을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중급대장장이를 위한 퀘스트를 끝냈다.
그는 눈앞에 뜨는 알림에 만족했다.
[중급대장장이를 위한 직업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