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영지전을 준비하다 (4)
“장현, 그게 뭐야?”
김덕배는 장현이 만든 화로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장현이 공들여서 만드는 것을 보면 뭔가 대단한 것이 틀림없을 텐데, 모양새를 보면 확신이 안 섰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화로와 달리 직육면체의 모양에 앞뒤로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화로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 잘 왔어. 그렇지 않아도 덕배 너의 힘이 필요하던 참이야.”
“내 힘? 화로 만드는 데 내 힘이 뭐가……. 아 혹시 화염의 펜던트?”
“그래. 이 살라맨더의 씨를 부화시켜야 하는데 보통의 화염으로는 안 돼. 화염의 펜던트 정도는 되어야 해.”
“그, 그렇군.”
김덕배의 표정이 난처해하면서 어두워졌다.
펜던트를 사용하기 위해선 마나포인트를 충전시켜야 했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아이템이기에 모든 마나를 다 퍼부어 충전시켜놨었다.
김덕배는 아끼던 걸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망설였다.
장현이 그런 덕배의 마음을 읽고 말했다.
“화로가 만들어지면 더 좋은 아이템을 만들 수 있어. 물론 너도 그 수혜를 볼 거야. 그 장검보다 더 강력한 걸 가질 수 있겠지.”
김덕배의 눈이 동그라졌다.
그의 검은 튜토리얼 보상으로 얻었던 용병의 장검에 이미 강화까지 시켰던 것이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아이템이라고.’
김덕배는 순식간에 그 가치를 알아차렸다.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아쉬운 감정이 사라졌다.
“아하하, 그거 아니라도 당연히 줘야지.”
그는 웃으며 화염의 펜던트를 내밀었다.
장현은 화염의 펜던트를 받자 곧장 떠오르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화염의 마법을 1서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위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나포인트가 더 필요합니다.]
그는 가진 모든 마나포인트를 쏟아부었다.
마나가 화염의 펜던트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현재 화염의 마법을 2서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위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나 포인트가 더 필요합니다.]
‘좀 더.’
장현은 계속해서 마나를 펜던트에 부어 넣었다.
[현재 화염의 마법을 3서클까지……….]
[현재 화염의 마법을 4서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블레이즈, 인페르노, 파이어 월, 룬프레이어, 플레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다리던 알림이 뜨자 장현은 즉시 외쳤다.
“플레임.”
장현이 마법 발동 시동어를 외치자 화염의 펜던트에서 순식간에 불길이 뻗어 나왔다.
화로 내부에 불길이 사방팔방 뻗어 나가더니 살라맨더의 씨를 감쌌다.
이번에는 달랐다.
화염의 마법 스크롤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던 살라맨더의 씨에서 금기 가기 시작했다.
쩍.쩌저저적.
콰지직.
이윽고 살라맨더의 씨가 완전히 부서지더니 그 안에서 화염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장현의 상태창에 알림이 떠올랐다.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아이템에 이름을 붙여주세요.]
‘또다시 이름을 붙여야 하는군.’
장현은 화로라고 이름을 붙이려다 망설였다.
그가 생각하는 ‘화로’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작명으로 고민하던 그는 마음을 정하고 이름을 지었다.
“미니 화로”
[새로운 아이템 ‘미니화로’가 마계 아이템 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중급대장장이가 되기 위해 제작해야 할 아이템은 앞으로 2개입니다. (2/4)]
장현은 미소를 지으며 알림창에서 눈을 떼고 화염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화염의 정령을 본 일행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저게!”
“불 속에 뭔가 있어!”
마치 도마뱀 같은 형상의 그림자가 불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현은 그 화염의 정령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 껍데기를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화염의 정령은 서서히 자신의 상황을 인식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장현을 발견했다.
장현의 뇌리에 음성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네가 날 깨운 존재니?]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를 통해 직접 전해왔다.
장현은 1회차에서 번개의 정령을 얻은 경험이 있기에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내가 널 깨웠어.’
[날 깨운 이유가 뭐지? 혹시 계약을 맺기 위해서니?]
‘맞아.’
화염의 정령의 물음에 장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기엔 보잘것없는데 날 깨운 걸 보면 마나가 꽤 강한 녀석이었겠지. 대화가 가능한 걸 보니 정령친화력도 있다는 걸 테고, 흐음……. 어쩔까…….]
정령은 고민된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장현은 이미 알고 있다.
정령들이 계약할 때 일부러 튕기곤 한다는 것을.
그들이 얼마나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지 또한 잘 알고 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좋아. 계약하자.]
장현은 정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정령은 이어 계약 내용을 설명했다.
[우리는 계약을 맺음으로써 서로에게 유일한 정령과 주인이 되기를 약속한다. 이것은 정령신이 정한 규정으로서 이를 어길 시 존재의 소멸을 대가로 치르게 된다. 동의하는가?]
‘동의한다.’
[그럼 언약의 증거로 서로의 피와 마나를 교환함으로써 계약을 마친다.]
장현은 창날의 끝으로 자신의 손가락 끝을 베었고, 흘러나온 피가 정령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화염의 정령이 장현에게로 다가오더니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읏!’
자신의 몸속에 무언가 들어온 듯한 느낌에 흠칫했지만, 곧 적응하려 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며 불편하던 이질감이 점점 사라졌다.
‘휴……. 계약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것이 화염의 정령 기운이군.’
기존에 쌓아온 마나 포인트나 독공과는 다르다.
생명을 갖고 있기에, 장현의 안에 있으면서도 독립된 개체나 다름없다.
[이제 나의 계약자가 되었구나. 내 이름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쑤엉’이야.]
‘쑤엉? 난 장현이다.’
마치 베트남 사람 이름 같기도 한 화염의 정령의 이름에 장현은 내심 실소했지만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1회차 때 번개의 정령 이름은 ‘규토’였으니.
[장현? 이상한 이름이구나. 그간 들어보지 못한 이름 형식인데. 가만 넌 마족이 아니구나. 그럼 뭐지, 신계는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너 어디에서 온 거야?]
화염의 정령 쑤엉은 신기하다는 듯 계속 말을 붙였다.
쑤엉은 정령계에서 처음 세상으로 나온 신입 정령이기에 궁금한 게 잔뜩 있었다.
더구나 처음으로 계약 맞은 주인이 말로만 듣던 마족이 아니라니 신기했다.
‘규토 녀석은 조용했는데. 뭔가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야.’
[뭐라고? 피곤하다니 실망이야! 이제 우리 처음 만났는데 당연히 서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 너와 난 이제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라구! 그리고 잠깐 너 규토는 어떻게 알어?]
쑤엉은 정령계에서 규토랑 친하지는 않아도 나름 아는 사이였다.
속성은 다르지만, 또래였기에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아차!’
장현은 정령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다.
기억을 읽을 순 없지만, 생각은 읽을 수 있다.
자신의 내부에 있으며 의사소통 수단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장현은 애같이 칭얼거리는 말투에 한숨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난 마왕에게 정복당한 지구인 장현. 이곳에서 플레이어라는 신분이다. 그 때문에 주입받은 지식이 있다. 앞으로 서서히 하나씩 알아가도록 하자. 설명하려니 한없이 길어질 거 같거든.’
[그래. 나도 그러려고 했어. 한 번에 나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지 않아.]
쑤엉은 뭔가 이해한 듯했으면서도 삐친 듯한 말투였다.
정말 종잡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생각하며 장현은 부탁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이제 내가 일 좀 해야 하니 화력 좀 일으켜줘.’
[뭐? 만나자마자 일 시키려는 거야? 천.천.히. 도와주도록 할게.]
장현은 쑤엉의 말을 듣자마자 깊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만 같았다.
버럭! 화를 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 화해하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미안. 지금 내 상황이 위기라서 그래. 조금 전에 적들과 전투를 치렀는데 지금 무구가 필요해서 만들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너의 도움이 필요해.’
[흐음. 그럼 그렇게 설명을 해야지. 뭐 계약자를 처음 만나서 반가워서 친해져 보려 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화가 나지 않겠어?]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장현은 속으로 천불이 날 거 같았지만 참았다.
자신이 화염의 정령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이고 인류의 운명이 달려있다.
남자 정령인 규토와 너무 다른 여성형 정령이었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장현은 지구에서도 그랬지만 1회차 통틀어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 남자다.
쑤엉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고 필요할 때 즉시 협조를 얻어야만 했다.
아쉬운 자가 ‘을’이 되는 법이다.
[좋아, 내가 처음이니만큼 한번은 봐줄게. 나처럼 마음씨 넓은 정령은 없으니 앞으로 잘하라구! 내 도움이 필요 없다면 맘대로 하든 상관 않겠어.]
‘그, 그래. 고마워.’
이 순간 장현과 쑤엉 사이에서 갑이 누구인지 정해졌다.
[내가 뭘 해주면 돼?]
‘내가 원할 때 불을 일으키고 불길의 강약을 조절해줘.’
[그러려면 마나가 필요한데, 너 마나가 얼마나 있어?]
장현은 조금 전 살라맨더의 씨를 발아시키는데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기에 바닥 상태나 다름없었다.
장현이 말이 없자, 쑤엉은 직접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더니 돌직구를 날렸다.
[뭐야,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어휴. 내가 계약한 자가 이렇다니, 박복하구나! 박복해.]
‘......’
후벼 파는 말에 장현은 침묵했다.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 세 번을 새길 때쯤, 쑤엉이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 아직 저 불길이 있으니, 내 힘.으.로 해볼게. 이거 참 힘도 없는데 힘을 써야 하다니.]
‘고, 고맙다.’
장현은 쑤엉의 팩트폭력에 먹은 것도 없이 체할 것만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감사 인사를 했다.
쑤엉이 도와준다고 할 때 서둘러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인벤토리”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삼두견 사체를 모두 꺼냈다.
용암 다리를 건널 때 부교를 만들고 부츠와 외투를 제작하느라 가죽은 대부분 썼기에 뼈들만 남아 있었다.
삼두견의 뼈들을 꺼내 보니 이걸 금속으로 연성하면 대략 방패 100개 분량은 나올 것 같았다.
‘중급 연성술.’
장현의 손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이내 빛이 꺼졌다.
“제, 젠장!”
마나 포인트가 떨어진 것이다.
장현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과 화염의 정령 쑤엉에게 짧게 외쳤다.
“밥부터 먹고 하자.”
***
장현은 관리자들을 불러 의논했다.
“마나 포인트가 계속 줄어들고 있어. 이제 마나를 얻는 방식을 보완해야 해.”
“혹시 아까 쳐들어온 그 크로커다일과 리자드맨들을 사냥하면 되지 않아? 지금까지 몬스터들을 사냥해온 것처럼 말이야.”
김덕배가 장현의 말에 의문을 나타냈다.
“아니. 일단 그들은 몬스터가 아니야. 이곳 세이프존에서 우리와 영지전을 벌일 상대들이야. 그들도 우리처럼 플레이어들이란 말이지. 퀘스트는 우리에게만 떨어진 게 아니고 그들에게도 떨어졌을 거야. 사냥이라고 생각할 만큼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란 거지.”
“섣불리 사냥하려다 우리가 당할 위험이 크겠구나.”
끄덕.
“맞아.”
장현과 김덕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나연이 물었다.
“장현 씨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어떻게 바꾸자는 거에요?”
“감자 농사를 지을 거야.”
“네?”
“뭐?”
“…….”
“…….”
장현의 말에 일행들은 잘못 들었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웬 감자 농사란 말인가.
일행들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장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감자 농사라니.”
“저도 덕배랑 같은 생각이에요. 갑자기 감자 농사라는 게 무슨 말인지.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우린 지금 영지전을 벌여야 해요. 심지어 크로커다일이나 리자드맨 종족도 있어요. 그런데 농사라니…….”
김덕배에 이어 이나연도 거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켜만 보고 있던 최형석과 이성훈 역시 한마디씩 거들었다.
“형님, 우린 싸워야 합니다. 지금처럼 해왔듯이 할 수 있습니다.”
“장현씨, 저는 다른 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구에서와 가장 달라진 생활패턴이 생리현상입니다.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그동안 지내왔기에 전투가 가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농사를 지으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이성훈의 말은 타당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장현은 일행들의 말을 다 듣고 있더니 인벤토리를 열어 감자 두더지를 꺼냈다.
“바로 이놈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