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영지전을 준비하다 (2)
장현은 정하진의 인사에서 의문 없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흠…….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네. 퀘스트에 떠 있었습니다.”
“그렇군.”
장현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일행들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하진과 대화를 좀 더 이끌었다.
관리자는 영지민을 이끌고 영지전에서 승리하는 퀘스트를 받았다.
반면 영지민들은 관리자를 따라 영지전에서 승리하라는 퀘스트를 받은 것이다.
장현은 정하진을 보며 영지민들의 정체를 떠올렸다.
‘이들은 튜토리얼에서 죽은 자 중 패자부활전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
장현에게 먼저 다가간 영지민 플레이어 정하진 역시 패자부활전을 치르고 살아났다.
그의 상태창 퀘스트에는 장현의 예상대로 관리자를 도와 영지전에서 승리하라고 떠 있었다.
‘이들에게 내 목숨이 달려있어. 이들이 진다면 난 이번엔 정말로 죽게 돼.’
정하진은 패자부활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튜토리얼에서 흑전갈과 오크들에게 죽고 나서 그들은 다시 살아났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가 주어졌다.
때마침 떠오른 퀘스트.
퀘스트에 따르면 패자부활전으로 부활한 인간들끼리 생사투를 벌여야 했다.
다른 사람과 목숨을 걸고 싸워 살아남은 자만이 본경기로 갈 수 있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좀비가 되어 기차에서 통과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직 다른 사람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만이 본경기로 진출할 수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한번 죽어봤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곧 눈치 빠른 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곁에 있는 약한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미 한번 죽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더이상 죽고 싶지 않다는 공포는 살인함에 주저하지 않게 했다.
살인해야 한다는 것보다, 좀비로 변한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정하진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 인간들. 부디 이들이 정상적인 인간이길!’
정하진은 장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바랐다.
패자부활전으로 다시 살아난 자는 능력치가 처음으로 초기화된다.
영지민 신분이라 하면 갓 튜토리얼에 들어온 사람들과 같은 스탯 상태라 봐도 된다.
반면 관리자들은 수많은 사냥을 통해 마나스톤을 얻고 강해진 자들.
영지민이 관리자와 싸운다면 그야말로 학살이나 다름없다.
성인과 유치원생의 싸움보다도 더한 신체적 능력의 격차가 있다.
영지민들이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들의 운명은 관리자가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행히 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 같군.’
정하진은 장현과 그 일행들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내심 안도했다.
치안이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무력이 곧 법이다.
더군다나 마족이 친히 임명해준 관리자직책은 영지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이나 다름없다.
멀쩡한 인간도 권력을 가지게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
호색해지고 난폭해지기 쉽다.
이들이라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정하진은 눈치껏 관리자에게 먼저 다가감으로써 호의를 사려고 했다.
한편, 장현은 그런 영지민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말을 잘 듣는다면 적대시할 필요는 없겠지. 적당히 눈치도 있는 자인 거 같으니.’
1회차와 달리 지금 이 무리를 이끄는 자는 최형석이 아닌 장현.
영지민들에 대한 처우도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관리자님들 오셨어. 다들 모여!”
정하진이 영지민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영지민들은 주섬주섬 모였지만, 장현 일행을 보는 눈빛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모인 영지민들은 대략 500여 명 정도 되었다.
“어, 김 씨 아저씨?”
장현 곁에서 모여드는 영지민들을 보고 있던 김덕배가 그중 아는 얼굴을 보고 반갑게 외쳤다.
“아, 덕배?”
“네, 저에요 아저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덕배는 오크 던전에서 4인 1조로 자신과 팀을 이뤘던 김 씨 아저씨가 분명 오크에게 죽은 걸 봤었는데, 이렇게 살아있자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반가웠다.
“넌 용케 살았구나. 난…….”
김 씨 아저씨는 덕배를 마주 보고는 반가움보다 놀라워하더니 이내 말끝을 흐리며 복잡한 감정을 띠고 있었다.
반가움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김덕배는 궁금한 걸 물었다.
“어 그런데 혹시 그때 우리랑 같은 조 했던 다른 분들은 같이 안 계세요?”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나만 살았어…….”
“아…….”
김덕배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김 씨 아저씨라 불린 김인환은 패자부활전에서 오크 때 팀을 이룬 동료들을 직접 죽였다.
함께 오크와 싸우던, 등을 맡기고 의지하던 동료들을 자신이 살기 위해 돌을 내려치고, 창을 찌르고, 목을 졸랐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돌연 눈에서 살기가 치밀어오르고 그 감정은 김덕배에게 향했다.
“네가 날 그때 도왔다면……. 그럼 난 그들을 죽이지 않아도 됐었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김덕배는 김 씨 아저씨의 반응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김인환 씨! 관리자님들께 무슨 짓입니까! 죽고 싶은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정하진 씨.”
장현 근처에 있던 정하진은 관리자 중 한 명인 김덕배와 영지민 김인환이 아는 사이로 보이자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끼어들었다.
“당신 심정은 나도 알겠는데, 조심해요! 우리 목숨은 저분들에게 달렸다는 걸 잊지 마세요. 호칭도 꼭 관리자님이라고 붙이도록 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정하진 씨.”
김인환은 정하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덕배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김덕배 관리자님, 조금 전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아, 아니. 무례랄 거까지는 없는데…….”
김덕배는 당황한 듯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일은 그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나연, 최형석, 이성훈까지. 장현을 제외한 관리자 일행들은 모두 덕배와 유사한 일을 겪었다.
최형석 역시 죽은 줄 알았던 김태석과 재회했다.
“태, 태석아! 네가 살아있었더냐.”
“혀, 형님! 크윽! 죄송합니다.”
튜토리얼도 아닌 본경기 삼두견에서 죽었던 김태석이 있었고.
“지, 지혜 씨.”
기차에서 죽은 김지혜.
이나연이 각성해 마족의 인장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던 그녀도 살아있었다.
“저, 정희 씨!”
이성훈의 직장 동료이자 후임이었던 안정희 주무관. 그녀는 튜토리얼에서 흑전갈 사냥에 통과하지 못하고 펑! 하고 터져 죽었었다.
이성훈은 튜토리얼에 건너왔던 직장 동료 중에서 직속 후임이었던 그녀를 가장 챙겼기에,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성훈 주사님…….”
이성훈과 안정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를 바라봤지만, 그들 역시 눈물의 의미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미 관리자들과 영지민들의 서열이 성립된 이상 이전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은 서로 간에 공유하지 못한 경험으로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장현은 일행들이 지인들과 해후하는 장면을 잠시 지켜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들과 우린 계급이 달라졌다. 지금 억지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적응될 테니.’
오히려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생존.
장현은 방향을 제시하고 이들은 그 길을 따라오면서 생존하게 되면 자연스레 끈끈해질 것이다.
‘어차피 사회도 보이지 않는 계급 사회이니.’
사장, 임원, 직원, 계약직 사원 등.
사실 대한민국에서 살던 대부분의 사람은 사회적 계급에 익숙해져 있다.
시간이 필요할 뿐 이곳에서의 계급에도 적응할 것이다.
적응하지 못해 따라오지 않는 자는 포기한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
좋아하지 않는 문구이지만 막상 리더가 되니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장현은 이곳을 통과해 생존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자다.
‘모든 건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군. 인류의 운명이 내게 달렸다. 자잘한 것에 신경 쓸 수 없어.’
장현은 정하진을 불렀다.
“당신, 정하진이라고 했나?”
“네, 관리자님.”
“난 장현이라고 한다. 첫 번째 지시를 내리겠다. 영지의 경계를 세워야 하니 전투에 쓸만한 사람을 오십 명 모아와라. 영지민들 중 대표는 너로 정하지.”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자님”
정하진은 장현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관리자보다는 아래지만 500여 명에 달하는 영지민 중 가장 높은 지위다.
물론 제대로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면 즉시 다른 자로 교체될 테지만.
그는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즉시 영지민들 쪽으로 몸을 돌려 사람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됐고.’
정하진의 뒷모습을 잠시 살펴본 뒤 장현은 관리자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퀘스트를 모두 봤겠지만, 이제 우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해. 그동안은 전투에 연속이었다면 이번에는 영지를 가꾸고 강화해야 해.”
“장현씨! 혹시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
이나연이 기대감을 안고 장현에게 물었다.
끄덕.
“계획은 있어. 그러기 위해선 이제부터 역할을 분담해야 해.”
“역할분담이라면 어떤 식으로 말이야?”
김덕배가 물었다.
“헬릭스 성주는 영지전을 얘기했다. 영지를 가꾸는 것과 동시에 영지 방어에 힘써야 해.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람들과 영지를 관리할 영주와 실무를 담당할 행정 요원들을 선출해야 해. 다음으로는 침입자들로부터 영지를 방비할 경비대를 구성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영지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할 생산자들이 필요해. 우리 관리자들이 각각 그 일들을 맡아야 해.”
“장현씨. 혹시 생각해둔 인선이 있나요?”
이나연이 장현의 말에 질문했다.
그가 이런 말을 꺼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인선까지 정해두었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현은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내 생각에는 김덕배가 영주, 이나연은 경비대장, 이성훈은 행정실무 책임자. 그리고 난 생산직을 총괄해서 관리하려고 해.”
장현의 말에 이나연과 이성훈은 자신이 생각한 역할대로 임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김덕배와 최형석이 장현의 결정에 반발했다.
“뭐? 내가 영주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맞습니다. 큰형님이 영주하셔야죠! 이 녀석이 무슨 영주입니까. 그리고 형님 제가 빠졌습니다.”
최형석이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다는데 성을 내며 큰소리쳤다.
명색이 한 조직의 보스였던 최형석이다.
장현을 만나 자신의 위를 양보했지만, 김덕배가 영주라니! 그동안 잠잠했던 그였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난 영지 건설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형석 넌 나중에 할 일이 있다. 그전에 일단 사령술을 키우는 데 집중해.”
“저도 중요한 임무를 맡는 건가요?”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지. 그러니 다른 건 접어두고 사령술 레벨을 올려서 언데드 군단을 양성하는 데 집중해.”
“음……. 알겠습니다. 큰형님.”
최형석은 중요한 일이 뭔지 궁금했지만, 대형이 먼저 얘기하기 전엔 묻지 않는다는 조폭의 규율이 몸에 배어있었다.
최형석은 그렇게 수긍하고 넘겼지만, 김덕배는 달랐다.
“잠깐. 장현아. 내가 영주라니. 난 동의 못 해. 내가 무슨 영주야. 우리 일행의 대표는 사실상 너야. 헬릭스 성주 앞에서도 네가 대표역할을 했잖아. 인제 와서 내가 영주를 한다니 그건 말도 안 돼. 영주 자리는 네가 맡아야 해.”
김덕배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난 할 일이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난 생산직이야. 무기와 생활용품뿐 아니라 각종 아이템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해. 영주 자리를 맡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리고 넌 이미 자격을 보였다. 오크던전 때 사람들을 이끌던 용기는 어디 간 거냐! 내가 다 각자의 역할을 고려해서 인선한 건데 네 말은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 그건 아니야.”
덕배는 장현의 말에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다시 거절한다면 장현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게 된다.
그건 아니다.
장현의 인선은 실로 적절했다.
최형석이 맡을 일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맡을 일 역시 적절한 역할일 것이다.
“알겠어. 최선을 다해 영주역할을 수행할게.”
“그래. 널 믿는다.”
김덕배의 대답에 만족한 듯 장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이나연 또한 김덕배를 응원했다.
“덕배야, 걱정하지 마.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고마워요. 나연 누나.”
“형님께서 영주 자리를 맡기신 일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 혹시 문제를 일으키는 놈 있으면 말해. 그냥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지.”
“가, 감사합니다. 최형석 형님.”
최형석의 말에 김덕배는 떨떠름해 하며 감사했다.
‘지금껏 가장 문제를 많이 일으킨 사람들이 최형석 당신과 당신 동생들이야.’
그렇다고 속으로 생각한걸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김덕배는 최형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최형석 형님.”
끄덕.
김덕배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그를 언데드로 만들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