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헬릭스 성주 (4)
장현은 다른 의미에서 가만히 있었다.
그는 1회차 때 이미 경험했었다.
‘영지에서 가능한 역량을 키워야 한다.’
1회차 때 장현의 대장장이 역량은 영지전을 준비하며 쌓을 수 있었다.
‘예전처럼 대장장이를 한다고 해야겠지.’
장현이 생각하고 있을 때 성주 옆에 서 있던 로메드가 나섰다.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성 밖에 나갈 자신이 있다면 나가는 걸 말리지 않는다. 대신 이곳에 있으려거든 밥이나 축내는 버러지 따윈 필요 없다. 그런 놈은 성주님께서 나서기 전에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주님께서 물으셨다. 넌 원래 뭐하던 놈이냐?”
김덕배가 로메드 병사의 질문에 문득 바깥의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거대한 보호막이 덮여 있었고 보호막 위로는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보호막은 성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돔에 갇힌 거 같네.’
김덕배는 체념하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프로게이머를 지망했지만, 해커를 하다가 임기제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뒤 끝은 소곤거리듯 흐렸지만, 성주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마족인 그에게서 그 정도 소리를 못 듣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뭐? 프로게이머? 해커? 그게 뭐 하는 거냐?”
성주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네. 프로게이머는 게임대회에 나가서 전문적으로 게임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해커는 통신 보안을 뚫고 침입해 정보를 빼내는 사람입니다.”
“흠……. 통신 보안을 뚫고 침입했다니……. 그건 꽤 쓸모 있어 보이는구나. 그런 재주를 가지고 공무원을 했다니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
김덕배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안회사를 해킹했다가 감옥에 안 가는 대신 최저임금으로 3년을 일했다.
기간을 채우고 나서 전산계 보안 담당 임기제 공무원 공채에 지원했다.
보안회사에 일했던 경험 덕에 다행히 취업할 수 있었다.
비록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일은 정규직 못지않게 했다.
전산과 보안에 관한 일뿐 아니라 어리다는 이유로 서무와 회계작업까지 맡았다.
윗사람은 만만한 그에게 온갖 일을 다 몰아서 넘겼다.
성주는 김덕배의 해커라는 직업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반면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성주 헬릭스가 이번에는 최형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넌 무엇을 했느냐?”
“난 조직폭력배 행동대장이었습니다. 하는 일은 싸우고 뺏은 것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탐나는 것이 있으면 뺏고, 제 것을 탐내는 놈이 있거나 하면 처리했습니다. 아랫것들을 시켜 정기적으로 제 영역을 관리하는 것 또한 제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보호비를 거두고 제때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제일이었습니다.”
최형석은 조직폭력배를 설명했지만, 성주는 그의 말에 호감을 보였다.
“오호, 너는 인간이라기보다 마족에 어울리는 놈이구나.”
마치 칭찬도 욕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최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너는 무엇을 했느냐?”
성주가 이번에는 이나연에게 물었다.
“전 경찰이었습니다.”
“경찰? 그게 뭐지?”
경찰이 뭔지 모르는 성주 헬릭스의 말에 기가 찼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설명했다.
“사회의 치안을 담당해 저런 사람이 타인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흠……. 너는 저 인간보다 약해 보이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물론 잡스러운 기운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런 힘이 없었을 텐데.”
“뭐……. 물론 육체적인 힘은 저 사람이 더 셀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전 국가의 지원을 받기에 인원수도 훨씬 많고 무기도 지원받습니다.”
“뭐 인간끼리의 다툼이라면 인원수에 무기가 더해진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 여기서는 아무짝에 쓸모없지만 크큭.”
이나연은 조롱 섞인 성주의 말투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이어서 성주의 시선이 장현에게 향했다.
“넌 뭘 했었느냐?”
장현이 가만히 성주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내 대답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했지.’
공대생으로 졸업하고 성삼전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업무를 맡았다.
그로 인해 그는 영지 건설에 필요한 일을 맡았다.
개발자 직업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다양한 금속을 만지고 여러 아이템을 만질 수 있었다.
그렇게 경험치가 쌓여 대장장이 직업의 최고레벨로 올라서는 발판이 마련됐다.
‘이번에는 다르게 간다.’
헤파이토스의 대장장이 조각을 얻기 위함이다.
이전과 같은 길을 가게 되면 대장장이 조각을 얻기 힘들 것이다.
대장장이 조각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제작을 많이 해야 할 테고, 거기에 어울리는 직업을 대야 할 것이다.
장현은 이미 그 대장장이 조각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으며, 그의 근처에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장현이 튜토리얼 보상으로 연금술사 조각을 얻었듯, 이정환 역시 튜토리얼 보상으로 대장장이 조각을 얻었다. 바로 장현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장현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로메드 병사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성주님께서 물어보시지 않느냐? 너는 무엇을 했느냐?”
로메드 병사의 호통에 장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공방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일을 했습니다.”
“호오 물건을 만들어서 팔았다고. 흥미로운데……. 어떤 걸 만들었느냐?”
성주 헬릭스는 마족답지 않게 예술품과 인테리어에 유독 관심이 많았었다.
멍청하게도 성주는 자신의 성을 강하게 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무력과 마력만 강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내부의 전투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단은 영주의 호감을 사야지. 그래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장현이 굳이 공방을 언급한 건 헬릭스에게 다가가기 위함이다.
1회차의 경험으로 헬릭스가 가구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딸인 안젤라 때문이라는 것도.
먼저 헬릭스가 관심 가질만한 것을 언급하고 그 뒤에 자신이 성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장현은 차분히 대답했다.
“생활에 필요한 침대, 의자, 그리고 가구들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침대, 의자 그리고 가구라? 침대와 의자는 가구가 아니란 말이냐?”
“풋!”
“크큭.”
성주의 질문에 긴장한 채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쿵!
“성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웃다니 죽고 싶으냐?”
“죄, 죄송합니다. 고향에 있을 때 광고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웃은 사람 중 장현의 옆에 있던 이나연이 대신 변명했다.
“시끄럽다!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않겠다. 인간이여 어서 성주님의 질문에 답하라!”
크로커다일 로메드가 옆에서 호통쳤다.
장현은 이내 대답했다.
“가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가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그건 왜 그렇지?”
성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전개된 상황에 웃음을 참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고 과학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침대 광고이다.
심지어 초등학생 시험에서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에서 세탁기 대신 침대를 고른 답안지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었다.
“가구는 보통 집안 살림에서 사용하는 큰 물건을 이릅니다. 주로 장롱이나 책장 탁자 같은 물건을 이르지요. 그래서 의자는 작은 물건이기에 가구에 넣지 않았습니다. 다만 침대는 가구라기보다는 오히려 건강보조기구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보조기구라고?”
헬릭스는 장현의 말에 눈을 번뜩이며 반문했다.
나이가 들면서 마력으로 신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노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마왕이나 대공 같은 상급 마족이 아닌 바에야 대부분의 마족들도 노화를 겪고 신체가 약해진다.
최근에 몸에 좋은 것은 다 챙겨 먹고 있는 헬릭스였기에 장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맞습니다. 바로 쿠션 때문입니다. 혹시 성주님께서는 침대를 사용하십니까?”
“당연하지! 침대 없이는 못 잔다!”
“역시 그러시군요. 마족이신 성주님도 저희 인간과 같은 면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뭐, 잠자리가 편하길 바라는 건 종족과 관계없는 부분이겠지. 그보다 건강보조기구라고 한 것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봐라.”
헬릭스는 역시 건강보조기구에 관심이 많았던 게 맞았다.
장현은 옛 기억을 살려 툭 던져본 미끼를 무는 헬릭스에게 설명했다.
“건강한 수면이 건강한 신체를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선 침대가 부드럽게 신체를 감싸서 편안한 수면을 이끌어야 하죠. 만약 침대가 좋지 않다면 신체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흠. 어쩐지 요즘 허리가 좀 아프던데 혹시 그 때문인가.”
성주 헬릭스는 장현의 말에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돌렸다.
두두둑.
장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이어서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침대를 비롯해 건강보조기구에 속하는 가구들에는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단순한 미적이나 편리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허리가 안 좋으시다면 지금 앉아있는 의자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척추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의자여야 하죠. 바른 자세가 건강한 허리를 만듭니다. ”
“호오, 그렇군. 그래서 너는 그러한 걸 만들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장현의 대답에 헬릭스는 만족하며 말했다.
“이거 참 쓸모있는 녀석이 들어왔군. 영지전의 승자가 되길 바라마.”
“감사합니다. 성주님.”
장현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순간 로메드 병사의 표정이 살짝 굳는 걸 보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1회차에서도 영지전에서 최종 승리자는 인간이었다.
그 당시 주역은 강신배였지만 이번엔 장현이 될 것이다.
크로커다일족은 애초부터 장현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단지 힘만 센 멍청이에 불과 할 뿐.
‘됐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장현은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1회차를 겪어 성주 헬릭스가 어떠한 종류의 마족인지 알고 있으므로 가능한 대화였다.
헬릭스는 마족답지 않게 사람이랑 유사한 점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건강염려증이 심했다.
1회차에 장현은 헬릭스의 요구대로 각종 건강보조기구를 만들어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예술품과 미술품에 환장했었다.
‘심지어 미식가이기도 했었지.’
헬릭스 부녀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신배는 자청해서 사냥에 나섰고, 수많은 영지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경험들이 지금, 이 순간 도움이 되었다.
장현의 이런 모습에 그의 일행인 김덕배, 최형석, 이나연과 이성훈 물론 강신배 일행들까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장현 씨한테 저런 모습이 있었다니…….”
“와……. 장현이가 저렇게 청산유수 입담을 지녔다니. 지구가 아무 일도 없었다면 가구회사에 취직해도 됐겠어.”
끄덕. 끄덕.
이나연의 감탄에 이어 김덕배의 소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음……. 큰 형님은 역시!”
“영업일을 하셨어도 잘하셨을 거 같아요.”
최형석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한번 장현에게 존경심을 표했고, 공무원 이성훈도 다른 의미에서 장현을 인정했다.
헬릭스가 장현에게서 이제 관심을 끊고 다음 사람에게 시선이 가려 할 때 장현이 다시금 말을 던졌다.
“그렇지만 저의 능력은 다른 것에 있습니다.”
장현의 말에 헬릭스는 의아한 듯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음? 넌 조금 가구 만드는 공방에서 일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외에 다른 재능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가구 공방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고, 저의 재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게 뭐지?”
“무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아이템 장비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기는 그렇다 치고 아이템 장비라고? 어떤 걸 만들 수 있느냐?”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디스플레이? 넌 가구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고도의 기술이 집적된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 있다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는가!”
장현은 사실 직접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들어 보지는 않았다.
공대생으로서 대한민국 일등기업인 성삼전자에 취업을 준비하였기에 최고 매출을 내는 상품인 스마트폰에 관한 공부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난데없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언급한 것은 마왕과 대공이 심혈을 기울여 디스플레이의 성능을 향상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