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세이프존을 향하여 (1)
장현, 김덕배, 최형석 그리고 의식을 잃은 이나연까지 네 사람은 다행히 무사히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뭐지, 전투라도 벌어졌나?”
김덕배가 기차역을 들어서면서 말했다.
해골들이 파괴된 채로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남아있던 일행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전장의 맵을 확인해.”
“아 맞다. 잠시만.”
맵을 확인한 덕배는 잠시 후 밝은 소리로 외쳤다.
“저기 2층에 있어.”
덕배가 가리키는 곳으로 일행은 서둘러 올라갔다.
사람들은 2층 식당가에 있었다.
“여기에 있었군.”
“사, 살았다. 장현이 왔어.”
남루한 차림의 초췌한 표정의 30대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일행을 반겼다.
그와 함께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팔랑크스의 창을 들고 모여 있었다.
이전보다 한층 강해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아있는 동안 몰려드는 스켈레톤들과 싸워야만 했기에 생존자들은 자연히 강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해지겠다고 기차역을 벗어난 김태석 일행은 모두 죽어버렸고, 장현을 믿고 기차역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전투를 반복한 끝에 살아남으며 강해진 것이다.
쾅!쾅!쾅!
크허헝.
멀리서 두 짐승이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이때 방비를 단단히 하고 버텨야 한다.
이나연은 바닥에 눕혀두고 덕배에게 돌보게 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혼잣말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돼, 오빠! 안돼! 개자식들! 두고 봐.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 모습을 보며 장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가씨도 꽤나 사연이 많은 거 같아.”
그 말에 김덕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잠꼬대인지 혼잣말을 계속하던데, 아무래도 누나가 경찰이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거 같아.”
끄덕.
장현은 이나연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덕배에게 맡기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삼두견들의 사체가 인벤토리 입구에 가득 놓여있었다.
[본경기 시작 2일째.]
어느 순간부터 시스템 창 한쪽에 나타난 문구에 대해 누구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본경기에 왔으니 당연해서일 수 있으나 장현은 알고 있다.
장현은 두 마족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3일째에 세이프 존 퀘스트가 뜬다.’
앞으로 하루.
그전까지 기차역을 벗어나야 한다.
세이프존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죽는다.
기차역 밖은 스켈레톤과 삼두견들이 포진해있을 것이다.
우두머리 삼두견이 죽지 않는 이상 삼두견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만티코어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우두머리 삼두견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두 놈이 싸우는 지금이 기회인데……. 슬슬 움직여야겠군.’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 그놈은 자신들을 노릴 게 분명하다.
장현은 몸을 일으켜 식당가로 향했다.
일행들이 기차역 식당가에서 먹을 것을 뒤지고 있었다.
“어, 장현아. 왔구나. 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흐흐. 여기 먹을 게 많아.”
“마나스톤으로 굳이 먹지 않아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잖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이제 지하로 내려가야 해.”
“우걱.우걱. 마나스톤으로 생존 연명하는 거나 링거 맞고 연명하는 거랑 뭐가 달라. 사람은 말이야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이로 음식 씹는 재미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지 뭐냐. 크크크 그런데 지하는 왜?”
덕배가 빵을 우걱우걱 먹으며 반문했다.
그는 어느새 기차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고 있었다.
최형석 역시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으며 장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현은 그런 최형석을 잠시 힐끔 보았다.
굳어있는 그의 얼굴은 부하들이 모조리 죽은 것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다 들어야 하는 내용이면 잠시만 기다려. 불러모을게. 일단 너도 이거 좀 먹고.”
김덕배는 장현에게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내밀더니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모이세요. 장현이 중요한 말을 할 게 있다고 합니다.”
장현은 덕배가 내미는 빵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그리운 맛이다. 확실히 덕배의 말대로 마나스톤으로 에너지를 복용하는 거와는 다르다.
‘영지로 가면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합류할 테니 그중에 요리사가 있으면 좋겠군.’
장현은 잠시 다음에 있을 영지전에 대해 생각하다가 김덕배가 사람들을 데려오자 곧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주위를 살펴봤어. 여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삼두견, 스켈레톤, 좀비들이 들이닥치면 코너에 몰려있다가 지쳐서 죽게 될 거야.”
장현은 멀리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만티코어와 우두머리 삼두견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김덕배가 반문했다.
“그럼 어디로 가게?”
“당연히 놈들로부터 멀어져야지. 지상에는 없지만, 지하에는 길이 있더군.”
“지하라고?”
“그래. 여기 지하도가 있어.”
“나연 누나가 아직 안 깨어났잖아!”
“곧 깨어날 거야. 못 일어나더라도 업고 가야지.”
“그래. 잠시만. 이건 다른 사람들 의견도 들어봐야지.”
장현은 덕배의 말에 살짝 못마땅했지만 따랐다.
자신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굳이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그들은 거부하지 않을 거다.
‘그보다 덕배의 저런 점은 나름 괜찮군.’
사람마다 각자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
앞으로는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필요하기에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김덕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누군가를 찾는듯했다.
“어라, 어디 있지?”
“누굴 찾는 거야?”
장현이 물었다.
“공무원. 나랑 같은 직장 사람이지.”
“너 공무원이었구나.”
“음……. 뭐……. 그렇지.”
덕배는 대충 대답한 뒤 사람들을 지나 한사람에게 다가갔다.
“저기, 주무관님. 모이라는 얘기 못 들었어요? 어서 동료분들 챙겨서 나와요.”
“아, 덕배씨. 미안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저 밖에 괴수끼리 싸우는 소리 들리죠? 일단 저놈들을 피해야 할 거 같아요.”
“여, 여기에 있으면 안 되나요? 여기에 먹을 것도 있고 나가면 다시 도망치면서 계속 싸워야 할 텐데요.”
“여긴 막다른 곳이에요. 인원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인데, 해골 놈들이랑 삼두견은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 알 수 없어요. 음식도 한계가 있고요. 살아남으려면 사냥을 하고 마나포인트를 얻어서 강해져야 해요.”
김덕배는 장현에게 들은 대로 남자에게 설명했다.
남자는 얘기를 듣고 이해한 듯했으나 침울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덕배 씨.”
곧 남자는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주사님들, 우리 모두 이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얼른 일어나시죠.”
“그래, 성훈 씨 수고했어. 우리가 짐이 됐네. 미안해.”
“아우,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남자들과 그의 일행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대부분 먹을 것들과 간단한 무기다.
장현은 김덕배가 찾던 남자와 그 일행들의 대화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무원이라고? 재밌군.’
세이프존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지금과 같은 생존경쟁이 아닌 일종의 영지 전 형태로 경기가 진행된다.
공무원들이 있다면 영지를 일구는데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살아남아야겠지만.
김덕배가 공무원이었다는 게 의외였다.
‘덕배가 생각보다 쓸모가 있겠어.’
오래전 그의 기억에 따르면 공무원 시험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는데, 게임에 빠져있던 녀석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최형석이 장현에게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형님, 이나연이 깨어났습니다.”
“다행히 때맞춰서 깨어났군.”
장현은 움직여야 할 때 들려온 이나연의 회복 소식에 안도했다.
***
이나연은 눈을 번쩍 떴다.
“헉!”
그리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들에 놀랐다.
“뭐, 뭐야? 다들.”
“누나, 몸은 괜찮은 거야?”
“그러고 보니. 전투 중이었는데.”
덕배의 질문에 이나연은 몸을 점검했다.
달라진 게 있었다.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대신 그 자리를 따뜻하고 청량한 기운이 차지하고 있었다.
분노가 끓지도 않았고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나연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의 인장을 만졌다.
“어떻게 된 거지?”
인장이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흉터처럼 만져지던 뱀 문양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게 그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누나, 목걸이요.”
“목걸이?”
그제야 이나연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확인했다.
“장현이 카오스 목걸이를 얻었어요.”
“이 따뜻한 기운은 뭐지?”
장현이 이나연의 의문을 풀어줬다.
“그건 신성력이야.”
“카오스 목걸이는 마기를 신성력으로, 신성력을 마기로 치환해주는 아이템이야. 상태창을 확인해봐.”
장현의 말에 이나연은 서둘러 상태창을 확인했다.
“여신의 신성력?”
이나연의 중얼거림에 장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계열 : 신성력, 분류 – 여신]
[직업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1. 사제. 2. 성기사. 중에 전직할 수 있습니다. 전직하더라도 이미 얻은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전직하시겠습니까?]
‘직업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장현은 생각했다. 지금 이나연이 보고 있을 상태창을 말이다.
‘첫 번째는 대장장이 직업을 얻었을 때처럼 특정한 행위를 성공시켰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이나연과 같다.
직업과 관련된 엄청난 힘을 외부에서 얻었을 때다.
‘신성력이라…….’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라도 확실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마족을 상대하는데 중요한 능력이니까.’
굳이 장현은 이나연의 전직을 정해주는 것보다 그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적성에 맞는 직업이 최고지.’
이나연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뜬 상태창에 놀랐으나 이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직이라고…….”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장현이 되물었다.
“전직 퀘스트가 떴나?”
“음……. 이걸 퀘스트라고 해야 하나요? 디텍터에서 사제나 성기사로 전직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나연의 의문은 당연하다.
튜토리얼 보상으로 디텍터의 직업을 얻자마자 전직하게 됐으니까.
“각 직업이 가진 장단점을 비교해봐. 당신이 원하는 것, 그리고 성향을 고려해서 선택해.”
직업은 성향과 맞아야 한다.
인생이 매 순간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지지만, 때론 선택의 질이 다른 순간이 있다.
지나고 나서 ‘아 그때 그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꿨다.’ 싶은 순간, ‘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싶은 순간 역시 있다.
장현이 회귀 전 화염이 아닌 전기를 택한 순간 역시 그랬다.
그는 이나연의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스스로 져야 한다.
누구도 인생을 대신 책임져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나연은 잠시 눈을 감고 시스템에 뜬 직업들에 대해 고민했다.
‘디텍터는 숨어있는 적들이나 아이템을 찾는 데는 유리해. 그렇지만 전투력이 약해.’
디텍터의 눈과 호신술 익히기로 생존율과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비록 강해졌다 하더라도 마족에게 잡아먹힌다면, 그래서 자신이 얻은 힘이 마족을 위해 쓰인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여신의 신성력.’
이 힘은 자신을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전직해도 이미 얻은 스킬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이나연은 마음을 정했다.
[성기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직업이 디텍터에서 성기사로 변경했습니다.]
알림이 뜨는 것과 함께 이나연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마에서 시작된 여신의 ‘인장’을 중심으로 전신으로 신성력이 타고 흘렀다.
동시에 자신에게 힘을 주는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이름은 아테나, 정의를 수호하는 지혜와 무력의 신이다. 그대에게 수호기사의 자격과 함께 힘을 내린다.]
[직업 : 성기사. lv.1]
-분류 : 아테나의 수호기사
-스킬 : ???
-미개방. 아테나 여신은 마왕에 의해 유폐되어 있습니다. 신족의 스킬은 현재 봉인되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게…….”
“누나, 왜 그래?”
“성기사로 전직했는데, 스킬이 봉인되어 있대.”
“뭐! 아니 그게 뭐야.”
이나연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고 덕배 역시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직했는데 스킬을 쓸 수 없다니. 그럼 안 하는 게 나았지 않은가.
“하긴 마왕이 모든 세계를 다 차지하고 마족의 세상이 되었는데, 신족이 힘을 내기는 힘들겠지.”
이나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직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마족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봉인이 되어 있다면 풀면 돼. 신성력을 일단 키워.”
장현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제이미가 신성력으로 각종 신성마법과 스킬을 쓰는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 받은 지식 중에는 봉인을 푸는 방법에 대한 것도 있다.
다만 지금은 풀 수 없을 뿐.
“알겠어요. 디텍터 스킬도 있으니 가진 것을 키워나가야겠어요.”
장현의 말에 이나연은 기운을 차린 듯했다. 사실 가장 큰 걱정거리인 마족의 인장이 사라졌다는 부분은 큰 위안이 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