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화. 인종로(人種爐)
“어흥!”
부동래는 포효하며 백 장 크기의 호랑이 본체로 변했고, 온몸에서 기세를 폭발시켰다. 천 장의 바람 칼날이 사방에서 솟아올랐다.
“크아아아!”
오홍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용의 포효가 하늘을 채우는 동안 그의 몸은 신룡의 본체로 변했다. 사방에 구름이 일어나고 수증기가 가득 찼다. 마치 동해를 이곳에 불러와 생애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구름에서 용이 솟아오르고 바람에서 호랑이가 솟아올랐다. 둘이 서로 어우러지자 운기가 충만해졌고, 수증기가 가득해지니 기세가 충만했다.
섭채주의 눈빛은 슬픔에서 증오로 증오에서 공허로 바뀌었다. 그녀도 날아올라 손을 내밀어 허공을 잡자 약목신궁이 나타났다.
그녀가 활을 당기자 체내의 무신결이 전력으로 운공되어 금빛 화살이 생겨났고, 온몸에서 무력이 거세게 뿜어져 나와 남김없이 화살로 모여들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조무 허상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거대한 몸들은 고개를 숙여 아래의 가녀린 존재를 바라봤다. 굳은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찰나의 순간, 조무의 허상들도 힘에 이끌려 유광이 되어 금빛 화살에 녹아들었다. 웅장한 힘이 겹겹이 쌓이자 무시무시한 파동이 폭발했다.
치우는 저 멀리서 생사를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젊은 수사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떠한 연민도 없었다. 그저 경멸과 가소로움뿐이었다.
“개미들이 나무를 흔들어봐야 결국은 헛수고이거늘.”
그때, 그는 섭채주의 몸에서 폭발하는 힘의 파동이 느껴지자 마침내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십이조무의 힘인가. 저 어린 것이 십이조무의 힘을 합칠 수 있다니, 귀한 광경이로군. 허나 이제 목숨이 끊어질 터. 그 힘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치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개천부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한데 그 순간, 어째서인지 개천부가 무거워지고 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앞서 허공지인을 세 번 사용했는데, 특히 마지막으로 심협에게 사용했던 그 일격에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한 탓이었다. 또다시 그와 같은 공격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가장 번거로운 적은 이미 죽었고, 저들은 자신의 적수가 아니니 개천부를 사용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좋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너희와 놀아주마!”
개천부를 거두고 허공을 움켜쥐자 검은 창이 손에 나타났다. 그는 창을 든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은 구멍 안. 심협의 부서진 몸은 끝없는 어둠 속을 조용히 떠다녔다.
그의 부서진 시체 옆에는 산하사직도도 떠 있었다.
한데 이때, 그림이 갑자기 빛나며 천천히 펼쳐졌다. 그림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산은 무너지고 강이 끊겼으며 성이 쓰러져 마치 종말의 광경 같았다.
“심협! 어이, 심협!”
조금 쉰 듯한 외침이 그림 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 어두운 공간 안에서 그 목소리는 모기가 윙윙대는 것 같았고, 한참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림 속의 오래된 나무 아래, 누군가 뒷짐을 진 채 나무를 빙빙 돌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바로 화령자였다.
“심협 이 녀석아. 죽은 거냐? 대답이라도 좀 해봐!”
화령자가 초조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아, 나를 미리 산하사직도로 옮겨 놓고 정작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한 게야? 나를 산하사직도에 가둬놓고 죽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
화령자는 원망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옆에서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조비극이 한참이나 침묵하더니 탄식했다.
“주인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돌아가신 모양이오. 주인님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소.”
그 말을 들은 화령자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 떨더니 말을 뚝 그쳤다.
한참 뒤, 그가 갑자기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 오랫동안 쓰지 않았는데, 아직 쓸모가 있으려나?”
그러더니 그 물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번득이며 사람 크기의 오색 석로(石爐)로 변했다.
“화 선배, 뭘 하려는 거요?”
조비극이 텅 비어버린 눈으로 물었다.
“뭘 하냐고? 사람다운 짓 좀 해보려고 한다! 심협 이 녀석이 걱정되니 마지막으로 도와줘야지.”
화령자는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조비극은 적, 청, 황, 백, 흑, 다섯 가지 색깔의 돌 연로를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또다시 물었다.
“선배, 이건 도대체 뭐요? 또 뭘 하려는 거요?”
“말했잖아, 사람다운 짓 좀 하려고 한다고……. 그리고 이 연로는 말이다. 오채석(五彩石)으로 만든 인종로(人種爐)라는 거다.”
조비극은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오채석은 알고 있었다. 과거 여와가 만든 석보천(石補天)의 원재료로 세상 절정의 천재지보였다.
“설마……?”
조비극이 또다시 물으려 하자 화령자가 말을 끊었다.
“그만!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심협의 삼혼이 다 흩어질 거다! 그때 가서 만들어내면 본연의 맛이 안 나니 그냥 좀 지켜봐라.”
화령자가 당부하고는 손을 뒤집어 원형 진반을 꺼냈다. 곡현성반과 비슷하면서도 또 완전히 달라서 마치 개조하여 연화한 것 같았다.
화령자가 손을 들어 진반을 몇 번 찍자 축소되어 있던 법진이 성반 위에 빠르게 만들어지더니 은백색 빛이 뿜어져 나갔다.
그림 속 세계의 하늘에 바로 칠흑처럼 어두운 구멍이 나타나 바깥 세계와 연결되었다.
뒤이어 그는 한 손으로 성반을 들고 다른 손으로 인종로의 귀퉁이를 잡더니 무지개가 되어 그 칠흑 같은 구멍을 통해 검은 구멍 공간으로 나갔다.
산하사직도는 천천히 족자 모습으로 돌아갔다.
화령자가 둘러보니 심협의 몸은 버들개지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허공에 떠 있었다.
“허! 참담하군.”
화령자는 혀를 끌끌 차고는 뒤이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반이 날아가며 빠르게 커졌다.
이윽고 성반평대가 나타났다.
화령자는 인종로를 성반평대 한가운데 놓은 뒤 심협의 부서진 몸들을 둘러보더니 허공에 소매를 휘둘렀다.
무형의 바람이 빗자루처럼 허공을 쓸고 지나가자 심협의 조각난 몸이 날아왔다.
“그래도 다행히 주요 부품은 다 있으니 조금만 채워주면 문제없겠어.”
화령자는 꼼꼼히 살펴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는 인종로의 뚜껑을 열고 심협의 부서진 몸은 물론이고 부러진 헌원신검과 옆에 떠다니는 혼돈흑련 파편까지 다 넣었다. 그리고는 소매에서 금실로 만든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담긴 오색토(五色土)를 인종로에 뿌렸다.
그제야 다시 뚜껑을 닫고 인종로를 향해 법결을 맺었다.
다음 순간, 사람만 했던 석로 안에서 갑자기 큰불이 났고, 오색 광망이 동시에 번쩍이기 시작하더니 현묘하기 짝이 없는 빛을 뿜어냈다.
여기까지 마친 뒤에도 화령자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성반평대 위를 왔다 갔다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특이하여 걸음마다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한바탕 걷고 나자 평대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번쩍였고, 법진의 네 모퉁이에서 검은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위에는 집채만 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깃발마다 그림과 무늬가 다 달랐는데, 각각 초혼번(招魂幡), 인혼번(引魂幡), 응혼번(凝魂幡) 그리고 회혼번(回魂幡)이었다.
초혼번은 남서쪽 사문(死門)에, 회혼번은 북동쪽 생문(生門)에 걸려 있었다.
법진이 운공하기 시작하자 네 개의 혼번이 순서대로 번쩍이더니 검은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뒤이어 미묘한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지는 것이 마치 망자의 혼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검은 빛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심협의 신혼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번혼진(四幡魂陣)으로도 못 찾을 만큼 철저히 깨진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심협 녀석의 신혼은 워낙 단단해서 그 짧은 시간에 완전히 소멸했을 리가 없어!’
당황한 화령자는 바로 가부좌를 틀더니 한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러자 몸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몸 주위에 실오라기 같은 금색 실들이 올라와 허공으로 흘러 들어갔고, 머리카락처럼 나풀거렸다.
한참 뒤,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삼계에 없다니!’
* * *
심협의 신혼은 혼돈의 안개에 갇혀 있었다.
그는 길고 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금도 몽롱한 잠에 빠져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치우…… 치우를…… 죽여야 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마음속에 울려 퍼지자 그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러나 멍하니 주위를 둘러봐도 희뿌연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개 속에서는 누구도, 어떤 물건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공허와 혼돈뿐이었다.
그제야 심협은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어 신혼이 어디를 떠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협은 당황한 마음을 억누르고 안개 속을 헤매며 단서를 찾아 적어도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는 알아내려 했다.
신혼을 발동하자 순식간에 수천 리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여전히 공허와 끝없는 안개뿐이었다.
‘치우의 수단이 분명하다!’
심협은 속으로 이를 갈고는 다시 천 리를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멈췄을 때, 그의 마음에는 더욱 큰 실망만이 남아 있었다.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초조함에 다시 쉬지 않고 날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마침내 이곳은 끝없는 공허와 허무만이 존재하는 감옥 세계임을 깨달았다. 그의 신혼은 이곳에 갇혀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멈춰서 망망한 안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그는 차분하게 지금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이곳에 갇힌 것은 치우의 수단일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앞서 치우와 최후의 일격을 겨룰 때, 자신은 힘과 경지 그리고 저력까지 모든 방면에서 치우에게 패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매우 현저했다. 그 정도 차이라면 굳이 기묘한 수단으로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신혼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
‘신혼이 소멸하지 않았다면 명부로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곳이 명부가 아님은 분명하니,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심협은 한참을 생각했지만, 끝내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심협은 어렴풋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는 분명 낯이 익었다.
“……화령자?”
다시 자세히 들어보려 했으나 가물가물하여 잘 들리지 않았다. 환각 같기도 해 그는 바로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설령 정말 빈사 상태에 나타난 환각이라고 해도 이상하긴 했다. 그랬다면 정작 듣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는 화령자가 아니라 아마도…….
‘채주는 무사할까?’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패배 이후 그들의 결말을 생각해봤다.
삼계는 천 년의 암흑을 피할 수 없으리라.
‘내가 여기서 죽으면 천 년 뒤에 옥침을 품은 내가 시공을 넘어 그때의 삼계를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인가?’
심협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옥침을 꺼내려 했으나, 이내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잔혼 주제에 저물 법기에서 옥침을 꺼내려 하다니.’
한데 다음 순간,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떠올린 것만으로 옆에서 노란 빛이 번쩍이더니 바로 그 옥침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이럴 수가!”
심협은 크게 놀라면서도 기뻤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려 해보니 천몽침은 실체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기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심협의 손이 닿는 순간, 황색 기체가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그러다가도 손을 떼면 순식간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협은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옥침을 잡을 수가 없자 그만뒀다. 그리고 이번에는 헌원검을 소환해보려 했지만, 한참을 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검의 본체는커녕 무기가 뭉쳐진 검의 허상도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