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211화 (1,210/1,214)
  • 1211화. 외롭지 않게

    “가세!”

    부동래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윽! 분하지만…… 어쩔 수 없지!”

    강신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나올 때가 아니다. 어서 벗어나야 한다!”

    눈시울이 붉어진 손오공이 외쳤다.

    한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지인의 부광이 다시 압박해오자 천지 비석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에 띄게 균열로 뒤덮였다. 안에 나타난 공간 균열도 불안정해졌다.

    “빨리 가!”

    손오공이 외치자 마침내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만아가 가장 먼저 사람들의 손에 밀려 밖으로 보내졌고, 뒤이어 강신천 등도 연달아 공간 균열로 들어갔다.

    섭채주는 심협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고 억지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천지 비석의 균열이 더 커져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때, 손오공이 서둘러 날아가더니 양손을 천지 비석에 대고 법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어 마지막 생문(生門)을 간신히 지탱했다. 그러나 비석이 갈라지는 속도가 조금 늦춰졌을 뿐,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서둘러!”

    손오공이 다급히 재촉했다.

    섭채주도 빨리 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심협은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더는 못 버틴다고!”

    손오공이 힘겹게 외쳤다.

    천지 비석의 균열이 크게 번져 공간 균열이 사라지려 했다.

    그때였다. 심협의 팔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검은 연대가 되어 천지 비석 아래를 받쳐 들었다. 그 안에서는 검은 빛이 일렁였고, 웅장한 힘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한순간에 비석이 안정되었다.

    손오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심협과 비석을 번갈아 봤다.

    “제게 맡기고 먼저 나가십시오.”

    심협은 기이한 기운을 뿜어내며 담담한 말투로 손오공과 섭채주에게 말했다.

    손오공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심협의 확고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

    “채주야, 너도 어서 가.”

    심협은 섭채주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재촉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심협의 말이라면 순순히 들었던 그녀가 지금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떠날 뜻은 없어 보였다.

    “또 천 년을 기다리게 하려고요?”

    그녀는 이윽고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심협은 마음이 아파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웃었다.

    “그럼 옆에서 잘 지켜봐. 대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서는 안 돼. 너 자신을 잘 지켜야 해.”

    섭채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그의 뒤에 섰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검은 연대에서 강렬한 검은 빛이 폭발하여 위로 솟구치더니 그 위의 부광과 강하게 충돌했다.

    양쪽이 충돌한 곳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혼돈의 회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때, 천지 비석 가운데의 공간 균열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이더니 몇 명이 차례대로 쏟아져 나왔다.

    자세히 볼 겨를도 없이 심협이 전력으로 혼돈연대를 발동하자 위에서 광망이 폭발했다. 이윽고 거대한 연꽃 허상이 위로 솟아올라 천지 비석을 뒤덮어 부광과 충돌했다.

    요란한 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졌다. 이미 피해가 적지 않았던 부광은 연꽃 허상과 충돌하면서 마침내 부서졌고, 광망도 흩어졌다.

    그러나 천지 비석도 함께 파괴되었다.

    심협이 손을 휘둘러 연대를 소환하여 앞을 방어하게 하고는 몸을 돌려 보니 육화명과 백소천, 오홍 그리고 부동래가 서 있었다. 무만아는 백소천의 뒤에 숨어서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는 겁니까?”

    심협이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듯 물었다.

    “두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까 안심이 돼야 말이지.”

    백소천이 민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심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에는 육화명을 돌아봤다.

    “아니, 뭐 혹시라도 내가 도울 게 있나 싶어서…….”

    “오형은요?”

    “어, 그게…… 아, 그렇지. 나는 두 사람이 들어가려는 걸 말리려다가 실수로 끌려온 것뿐이오.”

    오홍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저도…….”

    무만아가 서둘러 덧붙였다.

    심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육화명이 뻔뻔한 얼굴로 콧등을 긁적였다.

    “뭐, 자네가 패하면 도망쳐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죽어도 다 같이……그리고…… 화령과 함께 죽는 게 낫겠다 싶었네.”

    심협은 고화령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다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럼 온 김에 다들 똑똑히 봐두시오. 내가 저놈을 어떻게 때려잡는지.”

    심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표정에 모두가 의아했으나, 심협은 돌아서서 그들을 등지고 치우에게로 날아갔다.

    몸을 돌리는 동시에 그의 표정은 더없이 굳어졌고, 조금 전에 보여줬던 자신감 넘치는 표정도 싹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짙은 전의뿐이었다.

    검은 연대에 올라서서 헌원신검을 움켜쥐자 온몸의 기운이 폭발했고, 찰나에 불꽃 파문이 되어 주위를 에워쌌다.

    일순 폭발한 기세는 불조나 호천 상제와 비슷해 보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표정이 변했고,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군. 그사이 경지가 더 올라갔다니! 정말로 싸울 수 있는 걸까? 정말로 이길 수 있을까?’

    모두의 머릿속에는 이런 간절한 질문이 메아리쳤다.

    “치우! 어디 있느냐? 다시 붙어보자!”

    심협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허공지인을 연속으로 두 번 연달아 쓰느라 소모가 제법 컸기에 치우는 개천부를 쥔 채 다시 힘을 모으는 중이었다. 한데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협이 나타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공격을 멈춰야만 했다.

    그는 심협 아래에 있는 검은 연대를 바라봤지만, 그 내력은 알 수 없었다.

    “영산의 여래와 호천 상제도 내 적수가 아니었거늘, 네가 무엇이기에 나와 다시 싸우겠다는 것이냐?”

    치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쳤다.

    “난 천 년 뒤에 너를 쓰러트린 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의 숙명이다.”

    심협은 더는 말하지 않고 헌원신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몸 아래의 연대에서 금색 무늬가 반짝이자 검은 빛이 심협을 관통하여 곧장 헌원신검에 주입되었다. 그러자 본래 금색으로 번쩍이던 검날이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현묘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의 파동이 헌원신검의 기운을 대체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검은 기운이 폭발하며 허공을 가르고 치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허공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공간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허공의 웅장한 기개가 검의 허상에 이끌려 오더니 희미한 원기 난류가 되어 치우를 휘감았다.

    “천 년 후? 넌 그때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치우는 힘이 축적되자마자 똑같이 날아올라 양손으로 개천부를 꽉 쥐고 내리쳤다.

    개천부의 부문이 반짝이자 마기가 세차게 주입되었고, 바다처럼 웅장한 파멸의 기운이 안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을 검게 물들였다.

    도끼날의 검은 빛이 거대한 도끼의 허상이 되어 떨어지자 솟아오른 웅장한 천지원기가 검은 폭풍이 되어 충돌했다. 공간이 검광과 도끼의 허상으로 나뉘어 서로 충돌하는 것만 같았다.

    콰쾅!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천지가 격렬하게 흔들리자 백소천 등은 오장육부가 크게 떨렸고, 강렬한 파동의 충격에 숨 쉬기도 힘들었다.

    높은 하늘에서 강하게 충돌한 검광과 도끼 허상은 금방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도끼 허상의 기세가 더 강했다. 그 위에서 폭발하는 광망이 끊임없이 검광의 힘을 갉아먹었다. 거검은 점점 약해지고 밀리기 시작했다.

    섭채주는 두 손을 꽉 쥔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모두가 의연한 표정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만아는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검의 허상이 점점 사라져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됐을 때, 심협은 검은 연대를 몰고 날아올라 헌원신검을 들고 곧장 거대한 검광 속으로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검광의 광망이 폭증하여 실제처럼 변할 기미를 보였다.

    그가 검광 속에서 검을 들어 올려 휘두르려 하자 곧 부서질 것 같았던 검광의 힘이 갑자기 폭증하여 도끼 허상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끝을 내자!”

    그때, 치우가 껄껄 웃더니 마찬가지로 도끼 허상으로 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마기가 용솟음쳐 개천부에 주입되자 두려움이 느껴지던 파멸의 기운이 절대적인 훼멸의 기운으로 변했다. 그 기세는 눈앞의 모든 것을 부수고 앞길을 막는 자를 전부 파괴할 듯했다.

    섭채주 등은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지금은 멈출 것 같았다. 최후의 대결이 임박했음을 안 이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꽈르릉! 퍼펑!

    훨쓴 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이 굉음에 충격을 받아 그들은 거의 동시에 눈과 귀, 입, 코에서 피를 흘렸다.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신통을 시전하여 서로를 보호하며 이어지는 광포한 충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예상했과 달리 충격으로 공간이 찢어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폭발의 여파조차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높은 하늘에 매우 눈부신 빛이 나타났는데, 그 빛은 태양처럼 작열하고 있어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빛은 사라졌다. 그 빛이 있던 자리에는 검은 구멍이 나타났는데, 그 안은 칠흑 같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사방에 비치는 빛조차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심협!”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오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검은 구멍 가장자리에는 부서진 몸뚱이가 수많은 버들개지처럼 떠다니며 검은 구멍에 삼켜지고 있었는데, 그 몸의 주인은 다름 아닌 심협이었다.

    그의 잘린 오른손에는 아직도 부러진 검이 들려 있었고, 검은 연대도 이미 산산조각이 나 함께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파손된 족자 하나도 그의 옆에 떠 있다가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검은 구멍은 점점 붕괴하였고, 곧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점으로 변했다.

    한편, 치우는 개천부를 거꾸로 들고 몸을 약간 구부리고 있었는데, 크게 비틀거리더니 이내 그는 입을 쩍 벌려 주위의 천지원기를 탐욕스럽게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섭채주는 모든 것을 잃은 듯 멍하니 서서 어딘가를 응시했다.

    육화명의 붉어진 눈시울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살의가 차올랐다.

    백소천은 심협을 떠올리며 양손을 합장했지만, 끝내 극락왕생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 어차피 마겁이 강림한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 심형을 외롭게 할 수는 없지.”

    오홍이 한숨을 내쉬고는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심형의 길은 끝났으니 이제 우리 차례요. 외롭게 혼자 보낼 수는 없소.”

    부동래가 기운을 뿜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만아가 입술을 오므리고 말없이 법장을 휘두르자 모두의 발끝에서 맑은 초록색 빛이 솟아올랐고, 이내 온몸이 상쾌해지면서 거의 모든 부상이 나았다.

    “고마워.”

    백소천이 창백해진 무만아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때까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육화명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듯 주저하지 않고 바로 날아올랐다.

    검광이 스며들자 그의 몸이 허공에서 끊임없이 길어져 오래된 청색 대검으로 변했다. 일생의 검기가 전부 안에 녹아들자 검기가 사라지고 검의가 넘쳐났다.

    천지에 이 검보다 더 휘황찬란한 검식(劍式)은 없는 것처럼 하늘 높이 펼쳐졌다. 인, 검이 합쳐진 육화명의 기운은 천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담긴 생애 마지막 검이 치우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백소천도 바로 뒤를 따랐다. 온몸에서 선혈이 넘치며 한 겹의 금칠이 온몸을 뒤덮었다.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몸이 금색으로 물들며 만 장 크기로 변했다. 온몸에서 보광이 뿜어져 나와 부처가 환생한 것만 같았다. 그의 동작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지만, 손바닥을 내밀자 맑은 바람이 불어와 눈 앞을 가리던 모든 구름을 흩어버렸다. 그는 웅장한 기세로 치우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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