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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165화 (1,165/1,214)
  • 1165화. 잠복

    심협은 바로 백소천의 뒤를 따라 내려와 순양비검을 날려 보내 수많은 금빛 검의 허상으로 배 위의 생명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요마는 우두머리인 큰곰 요괴뿐이었다.

    배 위에 가득한 시체들을 본 큰곰 요괴는 간담이 서늘해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금방 끝난다고 했지?”

    심협은 의기양양한 백소천을 보며 씩 웃고는 큰곰 요괴에게로 걸어갔다.

    “너희는 누구냐? 원하는 게 뭐야?”

    큰곰 요괴는 놀라서 물었다.

    심협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곧장 달려들어 큰곰 요괴가 반응하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그의 미간을 눌렀다.

    큰곰 요괴는 눈이 뒤집히면서 기절했다.

    심협은 곧장 섭혼을 진행했는데, 기억 속에서 이 요괴들 전에 수많은 마족이 북구노주를 완전히 마화시킨 후 동승신주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어서 더 기억을 살피던 심협의 표정이 굳어 갔다. 바다를 건너 출정한 요마들 사이에서 육화명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 큰곰 요괴의 기억 속 육화명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맸으며, 미간에는 흉터 같은 이상한 마문이 새겨져 있었다.

    잠시 후, 심협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손을 들어 큰곰 요괴의 머리를 내리쳐 신혼을 소멸시켰고, 뒤이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양지화가 타올라 곧 배 전체를 뒤덮더니 재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다.

    백소천은 바로 금종을 거두고는 다시 날아올라 비주로 돌아갔다.

    “북구노주는 이미 완전히 마화되었고 요마들은 동승신주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저 요괴의 기억에서 육형을 봤는데, 이미 마족에게 지배당하여 한 무리가 되어 동승신주로 갔습니다.”

    “잘됐군. 동승신주에는 투전승불의 화과산이 있으니 곧바로 공략당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북구노주보다는 육화명을 구해내는 게 더 수월할 거야.”

    백소천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럼 바로 동승신주로 출발하죠.”

    고화령이 재촉했고, 심협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능소비주를 조종해 동승신주로 향했다.

    며칠 뒤, 동승신주 서부. 황혼 무렵의 구불구불한 해안가는 더 이상 석양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경치가 아니라 온몸이 칠흑처럼 시커먼 마물들로 온 해변이 가득한 광경이었다.

    하나같이 중무장한 이들은 두 눈이 빨갛게 빛나고 있었고, 피에 굶주린 전의가 얼굴에 가득했다. 전열을 갖추었지만,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웠다.

    바다에서는 한 척의 거대한 검은색 배가 뭍에 다가오자 수천의 마물이 뛰어내렸고, 물살을 가르며 다가와 해안가로 올라왔다.

    반대쪽 해안 깊숙한 곳, 숲의 빼곡했던 나무는 전부 베어졌고, 반경 백여 리의 해안가에는 수백 장 크기의 거대한 법진 제단 열여덟 개가 우뚝 솟아 있었다.

    검은 빛으로 뒤덮인 검은색 제단에서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열여덟 개의 우뚝 솟은 굴뚝 같았다.

    이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평범한 연기가 아니라 북구노주 쪽에서 끌어온 마기로, 바닷바람을 이용해 동승신주 중부를 향해 휘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대주 침략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족은 이런 방법으로 동승신주를 북구노주처럼 완전히 바꿀 계획이었다.

    검은색 제단 아래. 주위를 둘러싼 수천 마족 수사들은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몸이 뒤덮여 짙은 마기가 몸에 감돌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거대한 이수들이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형태가 모두 달랐다. 어떤 것은 머리에 외뿔이 달렸고 몸은 물고기 비늘로 뒤덮여 있었으며, 어떤 것은 도마뱀 같았다. 또 어떤 것은 사냥개처럼 생겼는데, 똑같이 생긴 머리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크기가 백 장에 이르는 괴수들의 머리에는 예외 없이 칠흑 같은 철 기둥이 비스듬히 박혀 있었는데, 기둥에는 마문에 새겨져 있었다.

    놈들은 잠든 것처럼 눈꺼풀이 축 늘어져서 아무리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마수들 주위에는 또 수천 마리의 검은 마령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허공을 떠다니고 몸이 허화한 게 귀신 같았다. 다만 매우 창백한 얼굴에 새까맣고 칠흑 같은 커다란 동굴 같은 두 눈동자에서는 검은 마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이때, 또 한 무리의 마족이 해안가 쪽에서 달려오자 제단 옆을 지키던, 키가 9척에 근육질의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가 외쳤다.

    “새로 온 것들은 곧장 마탑(魔塔) 아래로 가서 마기를 흡수하여 경지를 높여라!”

    새로 도착한 수백 명의 마족은 마치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처럼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제단의 빛이 뒤덮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리에서 유독 세 사람이 두드러졌는데, 그들은 마탑으로 가지않고 느릿느릿 걸어 금방 제일 뒤로 처졌다.

    “거기 셋!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어서 서두르지 못해?”

    근육질의 남자가 호통을 치자 가장 뒤에 있던 세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그중 비쩍 자가 그대로 쓰러지자 다른 두 사람이 바로 그를 부축했다.

    “두령님, 이 친구는 북구노주에서 요물의 기습을 받아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서둘러 그 외쳤다. 인간족과 매우 비슷한 외모에 피부가 까무잡잡했고, 이마에 뿔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러나 외모만을 봐서는 심협이 분명했다.

    반대쪽에서 부축하고 있는 것은 백소천, 쓰러진 척한 자는 당연히 고화령이었다.

    세 사람 중 마탑에 들어가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심협뿐, 다른 둘은 폭로될 위험이 있기에 이런 하수로라도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다쳤으면 더 서둘러라! 마기가 치료해줄 것이다!”

    “네!”

    심협은 서둘러 대답했다.

    “어떡하죠?”

    고화령이 전음으로 물었다.

    “안 되면 바로 치고 들어가는 수밖에!”

    “육화명을 찾기도 전에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마탑 영역 안에 들어가면 정체가 탄로 날 텐데……?”

    “두 분 모두 저에게 붙어서 앉으십시오. 제가 마기를 흡수하면 될 겁니다.”

    심협이 잠시 생각하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돌아보니 거대한 검은색 매가 허공을 맴돌며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오래국이 반격하니 우리가 가서 지원한다. 다들 지체하지 말라!”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천지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는 세 번 외친 후에야 날개를 펼치며 저 멀리 날아갔다.

    한편, 그 말을 들은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오래국은 동승신주 중남부에 있는 곳으로, 화과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나라다. 마족이 이미 오래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동승신주의 영토 절반 이상은 이미 마족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검은색 매가 명령을 내리고 날아가자 마탑 주위가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다. 마탑 아래 가부좌하고 앉아 있던 마족 수사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나라! 오래국으로 간다!”

    상반신을 노출한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진선기 이상의 고위급 마족 10여 명이 벌떡 일어나 잠을 자고 있던 마수의 몸에 올라탔다.

    그들이 앉는 순간, 마수들이 눈을 번쩍 뜨더니 허공을 찢는 듯한 포효를 질러 댔다. 그러나 결국 마족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른 마족도 일제히 대열을 이루어 그 마수들의 뒤를 따랐고, 곧 엄청난 수의 마령이 그 뒤를 따라갔다.

    심협 등은 마탑 아래에서 마기의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대군을 따라 오래국으로 출발했다.

    상반신을 노출한 남자는 뒤 처졌던 세 사람을 확인하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용감하게 참전하는군.”

    심협 등은 그 목소리를 당연히 듣지 못했다. 그들의 귓가에는 마족들의 열광하는 환호성만이 들려왔다.

    심협은 내심 의아했다. 아무리 마족들이 본능적으로 싸움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부활한 치우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군.’

    천지를 찢어버리는 존재를 떠올리자 심협의 마음속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오래국으로 가는 길은 역시나 마족의 땅으로 전락해 있었고, 길 양쪽에는 대량의 요족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 대부분이 화과산의 원숭이들이었다.

    길옆의 풀숲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는 온전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이 이미 썩어서 악취를 풍겼다.

    심협은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 년 뒤의 세계에서 그는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백소천과 고화령은 소름이 끼치고 속이 불편해졌다.

    한참을 걷자 어느 성에 도착했다.

    성벽 일부와 성루가 무너져 내리면서 생겨난 거대한 틈은 몸집이 거대한 마수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백소천과 고화령은 인간 지옥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건물과 집들은 모두 부서져 있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부서진 벽과 먼지가 날리는 폐허뿐이었다.

    폐허마다 인간의 시체가 보였는데, 그들은 수사도, 병사도 아닌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무참히 도륙당한 상태였다.

    성벽 밑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곳에는 백 명 정도 되는 마족 부상자들이 모여서 쉬고 있었다. 그들은 성벽의 벽돌 몇 개를 가져와 화덕을 만들었고, 그 위에 커다란 솥을 세워서 진한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

    이를 본 심협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보글보글 끓으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국물에서 작은 팔뼈가 눈에 들어왔다.

    대군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서둘러 성을 지나 다른 성문에 도착했다. 심협은 그곳에서 땅에 떨어져 있는 거대한 현판을 발견했다. 동구국(東邱國)이라고 쓰인 현판이었다.

    동승신주는 남첨부주와 달리 인간이 세운 나라는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도시이거나 소국(小國)뿐이었다. 그러니 한 성의 멸망은 곧 한 나라의 멸망을 뜻했다.

    심협은 참지 못하고 성 내부를 돌아봤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아무도 모르게 미끄러져 성벽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마족 대군이 점점 멀어져갔고, 성안의 마족 부상자들은 솥에서 끓고 있는 ‘음식’을 즐기려 했다.

    그중 하나가 깨진 그릇을 들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국물과 고기를 담으려 하는데, 성벽의 그림자에서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와 칼로 목을 그었다.

    그자의 커다란 머리가 풍덩 하고 국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나머지 마족 부상자들이 벌떡 일어나 경계했지만, 조비극은 귀신처럼 그들 사이를 빠르게 누비며 그들 속에서 튀어나와 목숨을 거뒀다.

    이내 심협의 사명을 완수한 그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마족 대군은 마침내 오래국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동승신주의 몇 안 되는 대형 도시가 있었다. 높게 솟은 성안에는 본래 수백만 명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온통 폐허뿐이었다.

    성벽은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일고여덟 개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인간의 시체가 가득했는데 완전히 짓밟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성벽 사이로 보이는, 산처럼 쌓인 시체를 통해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사적인 저항에도 인간들은 결국 강대한 마족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성안은 역시나 인간 지옥이었다. 마족은 수많은 인간족 시체를 모아서 산처럼 쌓아놨다. 물론 묻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영지가 없는 마수들에게 먹이로 던져주기 위함이었다.

    어떤 마족 수사들은 거대한 단로를 만들어 대량의 시체를 집어넣었고, 남은 혈육의 힘을 모아 혈단을 연단했다.

    이 광경을 둘러보던 심협이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성에서 ‘식사’를 하던 마수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어 성 반대쪽을 바라봤다. 그쪽 하늘은 불꽃에 붉게 물들어 이글거리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심협은 이 방대한 기운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전투승불께서 저기서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기운이 흐트러져 있소.”

    그는 서둘러 고화령 등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임무는 육형을 구출하는 것이니 먼저 그를 찾은 뒤에 도와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상의하고 있을 때, 부대를 이끌던 마족의 두령들이 전선으로 달려가라고 재촉했다.

    마족에게 이끌려 마수들이 미친 듯 달려가기 시작하자 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대지가 흔들렸다.

    심협 등도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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