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화. 구조
고화령은 고개를 들었지만, 눈빛은 공허했다. 그녀는 심협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말했다.
“심 도우, 육화명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육형에게? 무슨 일입니까!”
심협의 질문에 고화령은 바로 눈이 촉촉해졌을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말해주겠네.”
정교금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전에 대당 변경에서 전해온 첩보에 의하면 수많은 요물에게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인다고 했네. 조사해보니 북구노주에서 도망친 자들이었지. 다만, 당시는 정보가 너무 적어서 북구노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고, 내가 두 사람을 보내서 조사하게 했는데…… 휴우…….”
정교금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때, 감정을 추스른 고화명이 말을 이었다.
“저희는 북구노주에 도착한 뒤 바로 육지로 내려가지 않고 외곽 해역부터 조사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주(大州)에서 도망쳐 나오는 요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육지로 내려가 북구노주를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북구내주 남부는 상황이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요족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서 듣자 하니 곳곳을 휩쓸며 피를 빨아먹는 마물이 마침내 활동을 멈췄다고 합니다.”
심협은 뭔가 의아했지만,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저와 육화명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북구노주 중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 중부의 지헐산맥(支歇山脈) 근처에서 수많은 마수의 공격을 받았고, 간신히 물리치고 돌아오다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령들에게 발각됐지요. 마지막에는 태을 경지의 두 마존이 공격해왔습니다. 육화명은 저를 구하려다가 마존에게 중상을 입었고…… 결국…….”
고화령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협은 침울한 눈빛으로 원천강과 정교금을 돌아봤다.
“고 도우의 이야기로 미루어 마족은 노략질을 멈춘 것이 아니라 치우를 위한 기혈을 충분히 모은 듯합니다. 북구노주 전체가 그들에게 점령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육형은…….”
심협은 이를 악물었다.
요족들이야 탈출할 가능성이 있다지만, 북구노주에 살고 있던 보통 생령들은 어떤 상황일까? 그리고 육화명은……? 심협은 그의 결말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데 원천강이 그런 심협을 안심시키듯 말을 꺼냈다.
“사천감에 있는 육화명의 장명등(長命燈)은 아직 빛나고 있네.”
“아직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도가 사라졌다면 장명등은 꺼졌을 것이요, 육체만 죽었다면 신혼은 장명등에 이끌려 사천감으로 돌아왔을 터. 허나 두 상황 모두 나타나지 않았네.”
“다행이군요! 제가 바로 가서 구해오겠습니다.”
심협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기뻐하기는 이르네. 장명등은 꺼지지 않았으나 등불이 초록색으로 변했네. 신혼에 마기가 침투하여 마령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커.”
“마령(魔靈)이 뭡니까?”
심협이 당황하여 물었다.
“북구노주에서 음물 같은데 실체가 없고, 영지가 없으면서 온몸에 마기가 충만한 존재들을 만났습니다. 뇌 속의 마핵(魔核)을 부수지 않으면 죽일 수가 없었지요. 생전에는 평범한 생령이었으나 기혈이 모두 뽑히고 육체가 썩었으며 남은 삼혼칠백(三魂七魄)이 마기에 물든 존재들이었습니다. 실력은 강하지 않지만, 수가 무척 많았죠.”
고화령이 설명했다.
“그들만 물든 것이 아니라 요물 중에도 물들어서 오직 살육밖에 모르는 마수가 된 것들이 있네.”
정교금이 보충했다.
“그 마령들은 보통은 본체가 강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저는 육화명이 마령에 지배됐지 않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마족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자원을 낭비할 리가 없지요. 육형은 실력으로나 대당 관부라는 배경으로 보나 이용 가치가 충분하니 무사할 겁니다.”
심협의 확신에 찬 말에 고화령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국사님, 저는 천궁 대신 북구노주로 가서 육형을 구해오겠습니다.”
심협의 말에 원천강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인 내가 가는 게 도리이거늘…….”
정교금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과거의 변고로 정교금은 경지가 크게 떨어져 본래 경지를 회복하려면 100년은 걸릴 터였다.
“국공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육형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원천강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너무 위험하네. 몸조심하고, 절대로 방심하지 말게. 만약 이미 늦었다면…… 자네라도 무사히 돌아오게.”
정교금이 힘겹게 당부했다. 그는 심협의 실력을 믿고 있고 육화명을 무사히 구해오리라 믿었지만, 지금의 북구노주는 호랑이 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게 생각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고화령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우는 부상이 심하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심협이 고개를 저었다.
“심 도우는 북구노주의 상황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제가 육화명과 헤어진 곳을 모르니 혼자 가면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닙니까?”
그 말에 심협은 일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가 같이 가야만 육 도우를 구해올 가능성이 더 커질 겁니다.”
“하지만 자네는 부상이…….”
“북고노주로 가는 길에 요양하면 문제없습니다!”
정교금의 지적에 고화령은 바로 답했다. 그녀는 이미 결심을 굳힌 터라 누구도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원천강이 단약을 건네며 당부했다.
“아무리 급해도 오늘은 무리이니 조금이라도 정양한 뒤 내일 출발하게.”
고화령은 당장 떠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원천강과 정교금은 떠나는 심협과 고화령을 배웅했다.
“그럼 내 제자를 잘 부탁하네.”
정교금이 한숨을 쉬며 미안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물건을 꺼내 심협에게 건넸다.
원천강도 무언가를 꺼내 심협에게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받은 심협은 내심 당황했으나, 곧 인사를 마치고 곧장 떠나갔다.
한데 장안성 성문 밖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낯이 익은 모습에 자세히 본 심협은 실소가 터졌다. 훤칠한 몸에 월백(月白) 승복을 입고 있은, 이목구비가 단정한 이 귀공자는 바로 백소천이었다.
심협과 눈이 마주친 백소천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백형, 어떻게……?”
백소천을 바라보던 심협의 시선은 그의 반짝거리는 머리로 향했다.
고화령도 놀란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얘긴 관두지. 내 이미 육화명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으니 같이 북구노주로 갈 것이네.”
백소천이 어색해하며 화제를 돌렸으나, 심협은 꿋꿋하게 물었다.
“백형, 체념한 겁니까? 아니면 체념을 못 한 겁니까? 왜 갑자기 불문에 귀의한 거요?”
“헛소리! 이건 불문의 비법을 수련하다가 이렇게 된 거지 불문에 귀의한 게 아니다! 봐, 수계(受戒)가 없잖아! 그냥 머리가 다 벗어졌을 뿐이야.”
백소천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자신의 민머리를 보여줬다. 정말로 수계의 흔적이 없었다.
“오, 정말이군요. 한데 백형의 법호는 무엇입니까?”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한 번만 더 법호 얘기를 꺼내봐!”
백소천이 노발대발하며 쏜살같이 달려들더니 심협의 목을 졸랐다.
심협이 껄껄 웃으며 사과하고서야 백소천은 목을 졸랐던 팔을 풀었다.
한바탕 소란 끝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백소천이 고화령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육형은 운이 좋은 사람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세 사람이 나섰는데 육형 하나 못 구해내겠소?”
어제보다 안색이 한결 나아진 고화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이 손을 휘두르자 푸른 비주가 앞에 떠올랐다. 그 위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은은한 빛으로 뒤덮인 것이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건 국사께서 주신 능소 비주입니다. 7일이면 북구노주에 도착한다 하셨으니 정양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회복에 전념하세요.”
“알겠습니다.”
심협의 말에 고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주는 세 사람이 올라타자 유광이 되어 하늘 저 멀리 사라졌다.
* * *
세 사람이 장안성을 떠난 지 7일이 지났을 때, 구름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가는 능소비주에서 저 멀리로 북구노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요.”
뱃머리에 선 심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린 백소천의 얼굴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천 장 앞의 하늘은 칠흑 같은 구름에 온통 뒤덮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짙은 마기와 강렬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눈을 감고 정양하던 고화령도 천천히 눈을 뜨더니 그곳을 보고는 놀랐다.
“제가 도망쳐 나올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마기가 북구노주 너머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예상보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듯합니다.”
심협이 한숨을 내쉬는데, 구름 아래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주를 조종하여 구름 아래로 내려가 보니 수백 마리의 요마가 검은 나룻배를 타고 파도를 가르며 바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것들이 왜 밖으로 나가는 거지? 설마…… 다른 주를 점령하려는 건가?”
“내려가서 다 쓸어버리고 우두머리를 찾아서 섭혼해 보자고. 그럼 뭐든 알아낼 수 있지 않겠나?”
“안 됩니다. 우리 목표는 육형의 구조이니 괜히 일을 키우지 맙시다.”
“저것들은 다 오합지졸 아닌가? 경지가 가장 높은 저 큰곰 요괴도 고작 진선 후기에 불과하니 단번에 깔끔하게 처리하면 발각되지 않을 걸세.”
백소천의 설명은 일리가 있었으나, 심협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저렇게 많은 요물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마족이 경각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심형, 벌써 며칠이나 지나서 육화명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북구노주에 도착하면 어차피 누군가를 잡아서 물어야 하네. 그러니 차라리 저들에게 묻는 게 낫지 않겠나?”
심협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백소천이 재촉했다. 아무래도 육화명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심협은 평소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협이 고화령에게 물었다.
“백 도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심협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가서 제압하고 자네가 나서서 제거하면 금방 끝날 걸세.”
“백형이 완벽하게 제압한다면 말이죠.”
“잘 보고 있게.”
백소천이 피식 웃더니 몸을 날렸고, 그의 몸은 금빛이 되어 곧장 바다로 내려갔다.
출정의 기쁨에 소란스럽던 나룻배의 요물들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내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위를 올려다봤다. 그곳에서는 10여 장 크기의 금신역사(金身力士)가 내려오고 있었다.
“적이다!”
큰곰 요괴가 가장 먼저 이를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금신역사는 배에 내려섰고, 그 순간 온몸에서 금빛을 뿜어내 반투명한 거대 금종이 되어 배 전체를 뒤덮었다.
뎅!
금종이 뒤덮는 순간, 낮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소리는 종 안에서만 울려 퍼졌고, 밖으로는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나룻배 위의 요마들은 갑자기 가슴에 거대한 산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경지가 약한 자들은 오장육부가 터져 죽었다.
진선기의 요마들은 죽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