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화. 부탁
심협은 한숨을 내쉬고는 체내의 법력을 쉬지 않고 산하사직도에 주입하여 흡수 신통을 발동했다.
흑백진군이 결인을 맺자 신마의 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삼색 빛줄기가 3할쯤 커졌다. 그러자 소서천을 뒤덮은 은빛이 갑자기 몇 배로 밝아져 실제처럼 되면서 소서천이 요동쳤고, 허공이 격렬하게 흔들렸으며, 건물들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가라!”
심협과 흑백진군이 동시에 외치자 산하사직도의 위력이 최대로 발동됐다.
은빛이 뒤덮은 영역의 모든 것이 강하게 흔들리고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한순간에 전부 산하사직도 안으로 사라졌다.
신마의 기둥도 산하사직도 안에 나타나자 기둥 뒤에 있던 흑백의 소용돌이가 사라졌고, 기둥의 영광과 그 위의 영문도 전부 사라졌다.
“신마의 기둥이 어떻게 된 거죠?”
심협이 깜짝 놀라 물었다.
“괜찮네. 신마의 우물이 닫히면서 기둥의 금제가 잠시 사라진 것뿐이야.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신마의 우물 입구를 풀어놓으면 신마의 기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네.”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데 천둥이 울려 퍼지는 듯한 굉음이 갑자기 밖에서 들려왔다.
거대한 공간 균열이 비경 곳곳에 나타나 빠르게 커졌고, 광포한 공간 폭풍이 뿜어져 나와 비경 안의 모든 것을 거침없이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경은 마치 거울이 깨진 것처럼 공간 폭풍에 삼켜졌다.
심협은 한탄하며 시선을 돌렸고, 다시 산하사직도를 발동하여 거대한 그림을 빠르게 줄이고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비경은 빠르게 무너졌고, 잠시 후에 공간 폭풍에 완전히 삼켜졌다. 공간 균열도 천천히 봉합됐다.
동해지연은 이 폭풍의 영향으로 해수의 영기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공간 폭풍이 사라지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평온해졌다.
* * *
동해 상공. 심협 일행이 나타났다.
이전에 만요맹과 화과산의 원숭이들이 싸웠던 흔적은 이미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고, 부서진 배들도 보이지 않았다.
만요맹은 핵심 세력이 대부분 동해지연에 묻혔으니 다시 일어서기는 힘들 것이다.
“심 도우, 신마의 우물을 어디에 놓을 생각이오? 신마의 우물 입구가 도우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마족이 이미 알게 되지 않았소? 심 도우가 강하다 하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테니, 빈승의 생각으로는 우리 영산에 두면 어떨까 하오. 영산 비경 안에는 이전에도 신마의 우물이 있었으니 여러 방어 금제가 갖추어져 있소. 또한 영산의 비경에는 많은 공간 대진이 있으니 설령 북명곤 같은 도둑이 훔치려 해도 걱정이 없을 것이오.”
문수 보살이 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문수 도우, 신마의 기둥은 이미 심 도우가 차지했으니 영산으로 가져가 봐야 소용없어. 그리고 이번에 본 심 도우의 실력이라면 신마의 우물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게.”
“음, 그렇다면 보현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손오공의 의견에 문수 보살은 보현 보살을 돌아보며 물었다.
보현 보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오공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문수 보살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마의 우물을 놓을 장소로 생각해둔 곳이 있고, 어떻게 마족을 막아낼 것인지도 계획이 있으니, 그들 손에 넘어갈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심 도우가 고생 좀 해주시오. 혹시라도 무슨 변고가 생기면 언제든 영산에 연락하시오. 내 반드시 도우러 가겠소.”
문수 보살이 합장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심협도 답례했다.
두 보살은 인사를 남기고는 멀리 날아갔다.
심협이 웃으며 손오공을 돌아봤다.
“대성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 말에 손오공이 씩 웃었다.
“신마의 기둥을 어디에 놓을 생각이냐?”
손오공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잠시 망설이다가 묻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아, 걱정은 마라. 그걸 노리는 게 아니니까. 그저 많은 작자가 관심을 끊지 않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대성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마족과 요족들이 빼앗으러 저를 찾아올까 봐 걱정하시는 것이겠지요.”
심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조님의 방촌산도 함락될 뻔했는데 너 혼자 위험하지 않겠느냐?”
손오공이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그 부분은 대성께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마족이든 요족이든, 오히려 그자들이야말로 제게서 이걸 뺏어갈 실력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긴, 네 녀석의 정진은 정말 믿지 못할 정도지. 됐네, 생각한 바가 있다니 나도 더는 묻지 않으마.”
손오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우리도 이만 가보겠네.”
백영롱도 떠나려는 듯 일어났다.
“아, 잠시만요.”
심협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갑자기 두 사람을 불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는 이 신마의 우물 입구를 동해 용궁에 놓을 생각입니다.”
그 말에 멍하니 있던 오홍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흥분한 듯 눈이 반짝였다.
신마의 우물 입구는 삼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영맥으로, 매년 엄청난 천지영기와 마기를 뿜어낸다. 그 영력과 마기들만으로도 삼계 최절정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으니, 그 우물 안에 들어가서 수련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축복도 없을 정도였다. 문수 보살이 신마의 우물을 영산에 놓고자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신마의 우물을 동해 용궁에 놓을 수 있다면 10년 안에 동해 용궁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심지어 그보다 더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동해 용궁은 영산보다도 크게 약한 터라 이 기둥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용궁이라……. 좋은 선택이구나.”
손오공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우리에게 이 얘기를 한다는 건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인가?”
백영롱이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화과산과 여아촌이 동해 용궁와 동맹을 맺어 함께 이것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대신 이 우물의 이점을 세 종문이 나눈다면 서로에게 이득이겠지요. 원천강 국사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손오공과 백영롱 모두 심협의 말에 화색이 돌았다. 신마의 우물의 이점이라면 누구든 탐낼만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바로 오홍을 돌아보았다. 의견을 말하라는 것이다.
“확실히 동해 용궁의 힘만으로는 신마의 우물을 지키기 힙들 것입니다. 여아촌과 화과산이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홍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신마의 우물 입구를 동해 용궁이 독점한다면 분명 많은 이목을 끌 터. 여아촌과 화과산의 도움을 받는다면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그럼 바로 여아촌으로 돌아가 문내의 고수들을 보내겠소.”
백영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화관산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보내겠네. 단, 이 일은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 내 대외적으로는 신마의 우물을 화과산에 놨다고 소문을 내겠네.”
“감사합니다.”
손오공의 호의에 심협과 오홍이 포권했다.
손오공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른 일이 없으면 난 이만 가보지. 전에 데려온 애들이 근처 섬에서 날 기다리고 있거든.”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번에 마족과 싸우는 도중에 저는 그들의 변화가 더 급격해졌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원골 마기로 치우를 부활시키려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심협이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원골 마기…….”
백영롱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골 마기에 대해 아는 게 분명했다.
반면 손오공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원골 마기는 여섯 개 다 모아야 치우를 부활시킬 수 있는 거 아닌가?”
“소문으로는 그렇습니다. 한데 그 소문의 출처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족이군.”
손오공이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점점 원골 마기를 전부 모으지 않아도 치우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군. 방촌산으로 가서 선조님과 의논을 해봐야겠어.”
손오공이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천궁과 대당 관부, 다른 종문들에 알리겠습니다.”
“자유를 되찾자마자 이런 변고가…….”
백영롱이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근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손오공과 소백룡이 먼저 떠났고, 뒤이어 백영롱도 손 파파 등을 이끌고 떠나갔다.
“저도 빨리 스승님께 이 일을 말씀드려야겠어요.”
“나는 여기서 아직 일이 좀 남았으니, 마무리되는 대로 찾아갈게.”
심협은 떠나가려는 섭채주에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말했다.
섭채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그래.”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홍과 용궁으로 돌아온 심협은 곧장 소요경을 열어서 거울 요괴와 원구, 눈물 요괴를 꺼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심협은 원구와 거울 요괴에게 물었다.
“그게…….”
원구가 턱을 쓰다듬으며 머뭇거렸다.
“왜?”
“동해 용궁에 남아서 종문의 객경이나 공봉(供奉) 같은 걸 하고 싶대요.”
거울 요괴가 대신 말했다.
소요경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최하급 봉공이라도 좋습니다.”
원구는 서둘러 덧붙였다.
심협과 눈이 마주치자 오홍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심 도우, 오 도우.”
원구가 기뻐하며 말했다.
“너는?”
“저는 당연히 주인님을 따라가야죠.”
심협의 물음에 거울 요괴는 웃으며 답했다.
“이번에도 위험했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위험해질 거야. 나와 함께하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어.”
“전 무섭지 않아요.”
거울 요괴가 망설임 없이 답하자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주인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거울 요괴는 심협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뭔데?”
“부디 눈물 요괴 언니를 용서해주세요.”
거울 요괴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했던 심협은 말없이 웃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함께 고난을 헤쳐왔으니 언니가 죽는 걸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주인님이 언니를 살려만 주신다면 주인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 말에 심협만이 아니라 눈물 요괴도 놀란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럴 것 없어. 나도 눈물 요괴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단, 벌은 받아야지. 그녀를 용궁 대옥(大獄)에 백 년간 가둘 생각이야.”
심협은 이미 생각해둔 바를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거울 요괴가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너도 억지로 나를 따라다닐 것 없어. 네가 용궁에 남길 원한다면 오형도 분명 환영할 거야.”
“물론이지!”
심협이 웃으며 말하자 오홍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용왕님.”
거울 요괴는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예를 올렸다.
일이 마무리되자 오홍은 심협과 함께 수정궁을 벗어나 용궁 깊은 곳으로 향했다.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금지처럼 보이는 산호 숲을 지나자 호위 병사도 보이지 않았다.
“오형,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오는 내내 참고 있던 궁금증이 폭발했는지 심협이 물었다.
“신마의 우물을 두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오.”
오홍이 신비롭게 웃으며 답하자 심협도 더는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