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3화. 혈제(血祭)
문수와 보현의 법보가 닿기도 전에 하얀 서적은 펑 하며 터졌다. 동시에 하얀 문자가 빼곡히 튀어나와 두 보살과 흑백진군, 심협을 뒤덮었다.
문자들에는 강력한 환력이 담겨 있었는데, 흑백진군이 가장 먼저 당하고 말았다. 그는 일순 어지러워 술법을 시전하던 두 손을 그대로 멈췄다.
문수와 보현도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눈빛이 흐려졌고, 수많은 문자가 반짝이자 기이한 환술에 갇혀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됐다.
심협도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는 신혼의 힘이 이미 천존 경지에 도달하였기에 부주진신법을 운공하자 곧바로 정신이 들었다.
손오공과 소백룡, 섭채주, 백영롱 등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검은 그림자가 이들 앞에 나타나더니 하늘을 뒤덮는 수많은 곤봉 허상이 공격해왔다. 허상마다 강력한 힘의 법칙이 담겨 있어 허공이 끓어올랐다.
손오공 등은 각자 법보를 꺼내 들었다.
“최후의 발악이냐? 어림없다!”
심협이 차갑게 외치고는 붉은 대검을 쏘아 보냈다.
이 대검은 서른두 자루 순양검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으로, 그 강력함은 헌원검이나 명홍도에도 뒤지지 않았다. 심협이 전력을 기울인 이 검은 순식간에 미소를 뒤쫓았다.
대검이 단숨에 분열하여 다시 서른두 자루 비검이 되더니 미소를 베기 위해 폭풍우처럼 날아갔다.
난폭하고 뜨거운 검기가 반경 백 장을 뒤덮자 허공이 웅웅 흔들렸다.
미소는 개의치 않고 몽운환갑을 발동해 순식간에 허화 상태로 변했다. 검기와 서른두 자루 순양검 모두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관통했다.
그녀는 소매에서 하얀 빛을 발사해 돌기둥의 핏빛 면구를 휘감았다.
이를 본 심협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오색 빛을 발하는 아홉 개의 구슬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정해주로, 어느 정도 연화를 마친 상태였다.
아홉 개의 정해주는 오색 빛이 되어 쏜살같이 하얀 빛을 공격했다.
정해주는 공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안에는 매우 풍부한 공간의 힘이 담겨 있다. 심지어 매우 무거워서 충돌하는 힘만으로도 번천인에 뒤지지 않았다.
하얀 빛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자 주위의 허공도 격렬하게 떨려왔다.
심협이 결인하여 발동하자 정해주에서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눈부신 오색 영광이 순식간에 반경 10여 장을 가득 채웠다.
오색 빛에 비친 미소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는데, 허화한 몸도 상당 부분 실체로 돌아왔다. 이 오색 영광은 주로 사람의 눈을 공격하는데, 특히 영목 신통을 수련한 사람에게는 상극이었기에 미소가 더욱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협이 검결을 맺자 서른두 자루 순양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다시 순양칠살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소는 몽운환갑에서 눈부신 영광을 뿜어내며 재빨리 뒤로 날아갔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녀는 검진이 완성된 찰나 그곳을 빠져나가 신마의 기둥 반대편에 떨어졌다.
뒤이어 그녀가 소매를 휘두르자 사람의 형상이 빠져나오더니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신마의 기둥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이 여자는 외모를 알 수 없었지만, 심협은 한눈에 정체를 알아봤다. 바로 청청이었다.
헌원전 앞에서의 전투 이후 청청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워낙 약한 터라 개의치 않았건만, 미소에게 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청청을 내보내다니, 왜지? 자 선생이 심마를 저 여자의 몸에 붙여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자 선생이 살아 있는 것인가?’
심협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더니 눈을 차갑게 반짝이며 바로 결인했다.
명홍도가 재빨리 나오더니 유성처럼 단숨에 수십 장을 뛰어넘어 청청을 베었다.
푹!
섬뜩한 가벼운 소리와 함께 청청은 몸이 반으로 잘리고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치 절반으로 잘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그녀는 양손으로 이상한 법인을 맺었다.
청청의 잘린 몸이 펑 하고 터지면서 핏빛 허상으로 변하더니 앞으로 날아갔고, 단번에 하얀 사슬 대진을 관통하여 핏빛 면구에 떨어졌다.
면구는 탐스럽다는 듯이 이 혈광을 흡수하더니 더욱 선명해졌고, 겉에 핏빛 마문이 떠올라 점점 사람 얼굴로 변해갔다. 바로 청청의 모습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살기가 핏빛 면구에서 폭발하자 하얀 사슬 대진이 강하게 흔들렸다.
“혈제(血祭)!”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치우무결에 적혀 있던 혈제 비법이 떠오른 것이다. 육체와 신혼을 제물 삼아 강제로 마기를 자극하는 신통. 혈제의 혼백은 잠시나마 기령의 역할을 충당할 수 있다. 청청은 미소에게 조종당해 혈제의 술을 시전한 것이리라.
그가 오른손을 뒤집자 금색 검광이 바람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그 위로 수많은 금색 뇌전이 감돌았다. 바로 헌원신검이었다.
면구를 향해 헌원신검을 크게 내리치자 면구가 입을 살짝 벌려 기이한 웃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비어 있던 두 눈에서 갑자기 두 줄기 혈색 번개가 뿜어져 나와 헌원신검과 충돌했다.
꽈꽝!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헌원신검이 튕겨 날아갔다. 그러나 이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강력한 헌원신뢰는 핏빛 면구 위에 떨어졌다.
면구는 이 번개에 베이자 살기가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청청의 얼굴은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나 두 눈의 살기는 더 짙어졌고, 입도 더 크게 벌렸다.
끈적끈적한 대량의 혈무가 그 입에서 뿜어져 나와 사슬 대진을 뒤덮고는 그 안으로 스며들자 하얀 사슬이 순식간에 핏빛이 되어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핏빛 면구는 전력을 다해 몸부림치며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혈광이 되어 만불금탑 밖으로 날아갔다.
심협은 무거운 표정으로 튕겨 날아가는 헌원신검을 움켜쥐고는 양발에서 뇌광을 뿜어냈고,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핏빛 면구 앞에 보라색 뇌광이 번쩍이면서 심협이 나타났다. 그의 몸에서는 금과 흑의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산과 바다를 뒤집을 듯한 기운이 폭발했다. 폭발의 여파는 핏빛 면구를 뒤로 날려버렸다.
심협은 그 틈에 웅장하기 그지없는 법력을 운공하여 성난 파도처럼 헌원신검에 주입했다.
콰콰쾅!
주위의 천지영기가 요동치면서 헌원신검을 향해 몰려왔고, 순식간에 탑 꼭대기 공간을 뒤덮는 영기 소용돌이가 생성됐다.
헌원신검의 금빛은 태양처럼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그 상태에서 더 많은 신뢰가 뿜어져 나와 크고 두꺼운 금뢰로 변해 검을 휘감았다. 천지를 개벽한 신뢰의 검처럼 변한 이 신검에서 수십 장 길이의 금색 검망이 뿜어져 나갔다.
심협이 양팔을 휘두르자 헌원신검은 거대한 금색 검의 허상이 되어 핏빛 면구 위로 떨어졌다.
면구는 이 위기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혈광을 미친 듯이 뿜어냈다. 그러자 대전 안의 마기가 성난 파도처럼 몰려왔다.
찰나의 순간, 수십 장 크기의 피바다가 만들어졌고, 핏빛 면구 주위에는 매우 견고해 보이는 집채만 한 핏빛 해골이 나타나 보호하듯 막아섰다.
헌원신검이 요란하게 날아오며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금색 검의 허상이 스쳐 가면서 피바다가 단숨에 갈라졌다. 이 피바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헌원신검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핏빛 해골을 베었다.
콰지직!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핏빛 해골도 반으로 잘렸다.
헌원신검의 속도는 조금 느려졌지만, 여전히 번개가 치는 듯한 기세로 핏빛 면구를 베어 갔다.
콰쾅!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려 퍼졌고 금빛과 핏빛 광망이 폭발하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의 파도가 일더니 주위의 허공을 강렬하게 흔들었다.
이 충돌로 인한 폭풍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멀리 날아갔고, 도산동의 하얀 문자들도 바람 앞의 낙엽처럼 순식간에 소멸했다.
도산동은 신음했고, 코에서 피를 흘리며 눈이 뒤집혀 정신을 잃었다.
미소가 서둘러 날아와 그녀를 안고 도망쳤다.
환술 신통이 깨지자 흑백진군과 문수, 보현이 차례대로 회복됐다.
정신이 들자마자 탑 안의 상황을 살핀 문수, 보현 두 보살은 깜짝 놀랐다.
흑백진군도 안색이 변했지만, 뭔가 생각났는지 바로 평정심을 되찾고는 빠르게 신마의 기둥 위로 날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한편, 충돌 여파는 원조와 손오공, 섭채주 등에게도 닿았다. 원조는 다수를 상대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절대적인 열세였는데, 거대한 충돌로 인한 폭풍이 휘몰아치자 그 틈에 싸움터에서 벗어났다.
손오공 등도 억지로 이 충돌의 힘에 맞서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섭채주는 원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천과 격전을 벌이느라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기에 반응이 느려졌고, 결국 물러나는 게 늦는 바람에 몰아치는 기류에 휩쓸렸다. 그녀는 불안정하게 휘청거렸다.
이를 본 원조는 눈빛을 번득이더니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색 곤봉이 빠르게 길어져 대번에 수십 장을 뛰어넘어 섭채주를 노리고 다가왔다. 이어서 단단하고 곧았던 곤봉이 갑자기 거대한 검은색 뱀처럼 흐물거리며 섭채주의 허리를 칭칭 감았다.
“이리 와라!”
원조가 팔을 당기자 섭채주의 몸이 끌려갔다.
손오공과 백영롱 등은 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지만, 막기에는 이미 늦고 말았다.
섭채주는 그 고운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곧장 평정을 되찾고는 소매에서 붉은 빛을 내던졌다.
원조는 차갑게 웃고는 주먹을 휘둘러 이 붉은 빛을 부숴버렸다.
한데 그때, 그 부서진 붉은 빛 안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바로 오홍이었다.
오홍이 팔을 휘두르자 금빛이 손에서 뿜어져 나갔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색 용창이 원조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
금창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10여 장을 단숨에 뛰어넘었고, 원조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는 창끝에서 날카로운 법칙의 힘을 폭발시켰다.
원조는 얼굴을 찔러오는 통증에 서둘러 몸을 틀어 이 일격을 피했다.
그 틈에 섭채주가 빠르게 주문을 외자, 등에서 금백의 빛이 번쩍이며 한 쌍의 커다란 나비 날개가 나타났다.
금백의 두 가지 광망이 나비 날개에서 뿜어져 나와 하나로 합쳐지자, 찰나의 순간에 금백의 광역(光域)이 생성되며 법칙 공간 같은 강렬한 시간 법칙 파동을 뿜어냈다.
금백 광망은 주위의 허공으로 들어가서는 수염처럼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섭채주의 몸이 허공에 고정되면서 검은색 곤봉으로도 끌어당기지 못하게 됐다.
“시간 법칙은 역시 범상치 않구나! 허나 네 경지가 너무 약하다!”
원조가 차갑게 웃더니 몸을 빠르게 팽창시켜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배로 커졌다. 동시에 곤봉도 검게 빛나며 강력한 힘을 뿜어냈다.
금백 광역이 종잇장처럼 사분오열되면서 그 뿌리가 산산조각나자 섭채주는 다시 원조에게로 끌려가 금방 그의 앞에 도착했다.
원조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입에서 검은색 주머니를 뱉어냈는데, 이 주머니는 순식간에 커져서 섭채주를 뒤덮었다. 이전에 북명곤이 그랬듯이 섭채주만 손에 쥐고 있으면 심협은 머리를 숙이고 명령에 따를 터였다. 게다가 이전에 마족이 자신들의 비술로 다른 사람의 법칙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으니 섭채주에게서 시간 법칙을 빼앗아온다면 자신의 실력은 다시 크게 정진할 것이다.
한데 섭채주는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등의 날개에서 빛을 강하게 뿜어냈다. 금백 광막으로 검은색 주머니의 앞을 막으려던 것이다.
한데 그 순간, 이 커다란 검은색 주머니와 섭채주 사이의 허공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검은색 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이 뿌리에서 오래된 동전을 감싼 노란 빛이 날아와 쏜살같이 검은색 주머니에 꽂혔다. 그러자 주머니는 갑자기 영광을 모두 잃더니 평범한 보자기처럼 툭 떨어졌다.
“낙보금전!”
원조가 경악한 듯 외쳤다.
그사이 검은색 뿌리가 다시 팔처럼 허공을 가르며 다시 낙보금전을 내던졌고, 이 동전이 이번에는 곧장 검은색 곤봉을 맞혔다.
그 순간, 검은색 곤봉도 영광이 사라졌고, 빠르게 원래 크기로 줄어들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