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41화 (1,141/1,214)
  • 1141화. 살의(殺意)

    멀지 않은 곳의 보현보살은 양손으로 보병인(寶甁印)을 맺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오불보관(五佛寶冠)이 광명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뿜어져 나오는 보광이 금색의 보병이 되어 그의 몸을 감쌌다.

    한편, 손오공은 그저 평상시처럼 가만히 가부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그의 육체는 음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더 먼 곳, 미소의 등 뒤에는 아홉 개의 꼬리가 연꽃잎처럼 모여들어 그녀를 감쌌다.

    원조의 수단은 손오공과 비슷했는데, 아까 피를 토하긴 했어도 어느새 회복되었는지 현재는 온몸을 검은 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음파의 신식 공격에 맞서고 있는 것인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도산동은 아리따운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두 귀와 코에서는 핏줄기가 지렁이처럼 흘렀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갑자기 멈추자 사람들은 시련을 통과한 것이라 여겨 안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더욱 난폭하고 충격력까지 담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번개가 머리 위로 떨어진 것처럼 모두의 몸이 일제히 흔들렸다.

    심협도 머리를 강하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눈앞이 흐려졌고, 사방에서 “죽여라!”라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는 전력으로 부주진신법을 운공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신혼의 힘을 조금도 발휘할 수 없었다.

    “심 노제! 심 노제!”

    절박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심협이 눈을 번쩍 떠보니 눈앞의 흐릿했던 광경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심협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사방에는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피처럼 붉은 불꽃이 어지러이 흔들렸으며, 저 멀리 무너져 내린 검은색 성벽이 보였다.

    비명이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몸집이 거대한 검은 늑대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누군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발에 밟힌 사람은 간절한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보았으나, 입가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가슴을 위아래로 가파르게 움직였지만, 더는 공기를 들이마시지 못했다. 늑대의 발톱에 생기가 끊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지? 분명 낯이 익은데…… 누구지?’

    그는 심지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 노제…… 나, 나 좀 구해주게…….”

    쉬어버린 목소리에는 삶을 향한 갈망이 가득했다.

    그 순간, 심협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우몽(于蒙)!”

    심협이 마침내 그 이름을 기억해낸 순간, 검은 늑대가 새빨간 입으로 사내를 물고 치켜들었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툭!

    심협은 발 앞까지 굴러온 우몽의 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분노와 의문이 가득했다.

    “왜 날 구해주지 않은 건가?”

    우몽의 머리가 입을 벌릴 때마다 절망과 원망이 묻어 나왔다.

    피를 흘리는 그의 머리를 바라보자 희미했던 우몽과의 추억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자 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죽여! 죽여! 죽여!”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짙은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저 늑대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동해지연, 만불금탑, 시련…… 그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다. 억누를 수 없는 살의, 미칠 듯한 살의만이 그를 지배했다.

    식해의 의식 밖. 심협의 두 눈이 점점 붉어졌고, 피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몸의 기운이 전부 흐트러졌고, 몸 곳곳에서 혈관이 터지고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환상 속의 심협은 땅에 떨어져 있는 도를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시커먼 늑대 요괴에게로 다가갔다.

    검은 늑대 요괴도 피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심협은 도를 높이 들어 늑대 요괴를 베려 했다.

    그 순간, 늑대 요괴는 두 눈이 초록색으로 번득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혔다. 마치 어서 베라는 듯이…….

    잔혹하게 웃으며 도를 휘두르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달빛이 갑자기 십협의 얼굴로 내리쬐었고,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심협이 위를 올려다보니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어둠 속에서 크고 둥근 ‘달’이 조금씩 드러났다.

    달빛이 아닌 음청(陰晴)이 절반씩 차지한 반흑반백(半黑半白)의 달은 심협의 시선이 닿은 순간 저절로 돌기 시작했다.

    회전이 점점 빨라지더니 반흑반백의 달은 흑백의 두 마리 물고기가 되어 서로 꼬리를 물고 쫓아갔고, 점점 빨라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헤엄치던 두 마리 물고기가 갑자기 튀어나와 심협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심협은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그제야 저 뒤에서 부주신산이 우뚝 서서 희미한 빛을 발하며 자신을 깨우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협은 콧방귀를 뀌고는 신식의 힘을 방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환상에서 깨어났다.

    * * *

    심협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이 온통 핏빛이었다.

    이마에 느껴지는 온기에 그는 손을 들어 피눈물을 닦아냈다.

    시야가 마침내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 표정이 매우 기이했다. 누군가는 분노로 가득했고, 누군가는 슬픔에 빠져 있었으며, 누군가는 광기를 폭발시켰다. 다만 하나같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모두 흐트러졌고, 기혈의 흐름이 비정상이었다. 이곳의 소음이 신식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와 피와 살에도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이었다.

    심협이 잠깐 넋을 놓는 순간 바로 식해로 침투하려는 것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재빨리 돌아보니 도산동이 환영에서 풀려났는지 두 눈을 떴는데, 두 눈이 붉은 것이 기이한 상태였다.

    도산동은 갑자기 발버둥 치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만 기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환상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무언가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두 손을 미친 듯 휘저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그녀는 넘어졌고,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기를 썼다.

    ‘못 버티고 광장에서 도망치려는 건가?’

    도산동은 일어났다가 다시 넘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내리치려 했다. 고막을 터뜨리려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일어 그녀를 감싸더니 그대로 들어 올려 먼 곳으로 날려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다.

    심협이 돌아보니 미소가 제때 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두 눈이 붉게 물든 것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했다.

    미소는 다시 눈을 감고 계속해서 음파의 공격에 대항했다.

    * * *

    만불금탑 밖. 2층 주위에 새겨진 불상에서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누군가 나타나 공중에서 떨어졌다.

    소백룡은 그게 호족 여자임을 확인하고는 관심을 끊은 반면, 손 파파 등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 여자를 바라봤다.

    유비연이 일어나 다가가려 하자 손 파파가 호통쳤다.

    “돌아오너라!”

    “그냥 보고만 올게요.”

    유비연이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돌아와서 앉아라! 사조께서 나오실 때까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손 파가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자 유비연은 투덜거리며 다시 돌아와 앉았다.

    만불금탑에서 떨어져 꿈쩍도 하지 않던 도산동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더니 넋을 잃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몸을 가누고는 다급하게 단약을 꺼내 삼켰고, 이어 가부좌하고 앉아서 치료하기 시작했다.

    * * *

    수미전 대전 밖. 금색 하광이 번쩍이며 바깥을 뒤덮은 독운과 서로 엉켜 끊임없이 푹푹 소리를 냈다.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운은 여전히 뚫지 못하고 있었다.

    만독호로를 든 백천의 표정은 어두웠다. 수미전의 금색 하광 금제가 이렇게 강력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독운의 부식력으로도 여전히 그것을 없애지 못했다.

    “백 도우, 그대의 독운으로는 수미전의 금제를 뚫지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좀 도와도 되겠소?”

    조룡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서두르시오! 이러다가 안에 있는 보물을 다 빼앗기게 생겼소.”

    백천은 상대가 자신을 비웃고 있자 언짢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조룡은 피식 웃고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색 첨추(尖錘)가 손바닥에 떠올랐다.

    그가 한 손으로 법결을 맺고 가리키자 첨추가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운을 뿜어내며 빠르게 회전하면서 단숨에 몇 배로 커졌다.

    곧장 수미전을 향해 날아간 첨추가 금색 하광을 찌르고는 빠르게 회전하자 강한 바람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3척 이상 파고들었다. 수면에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처럼 주위의 독운이 일제히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계속 겉에서 교전하던 독운이 금하(金霞) 금제 안으로 들어가면서 침식 속도가 빨라지자 백천의 눈이 반짝였고, 조룡에 대한 불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편, 두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정탐하던 섭채주는 무력으로 자신의 기운을 억눌러 주위와 하나가 되어 조심조심 다가갔다.

    * * *

    수미전 안.

    자 선생은 밖에서 누군가 금제를 부수려 하는 것을 감지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조각칼을 들고 바닥에 엎드려 조금씩 진문을 새기며 이 대전에 있던 법진을 복원하는 중이었다.

    대전 밖에서 치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안에서는 끼긱거리며 조각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 뒤에야 자 선생은 땀으로 범벅이 된 고개를 들었고, 바닥과 주위의 다섯 기둥이 선으로 연결된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전 밖을 향해 차갑게 비웃고는 손을 뒤집어 마경(魔鏡)과 손가락뼈, 불경(佛經), 구슬 그리고 뿔을 꺼내 다섯 개 기둥 아래에 각각 내려놨다. 이 모든 것은 검은색이었다.

    약한 공간 파동을 일으키는 이 다섯 가지 물건이 땅에 내려와 법진과 하나가 되자 검은색 마기가 퍼져 나와 바닥과 기둥의 무늬를 가득 채웠다.

    자 선생은 법진 가운데로 가서 정신을 가다듬고 가부좌를 틀더니 양손을 결인하고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웅장한 마기가 흘러나와 법진과 하나가 되었다.

    거의 동시에 만불금탑의 꼭대기 층에서는 우뚝 선 두 개의 흑백 돌기둥에 새겨진 복잡한 부문이 희미하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두 돌기둥 뒤쪽에 유광(流光)이 떠오르더니 허공에 흑과 백으로 절반씩 빛나는 거대한 안개 소용돌이가 나타나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가운데는 마치 깊은 동굴 같아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소용돌이 안에서 마기와 영기가 교차하더니 상상할 수 없는 순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흑백 돌기둥이 마주 보고 있는 소용돌이 반대쪽, 흑백이 서로 연결된 곳에는 기이한 핏빛 가면이 박혀 있었다. 가면은 옥으로 만들어져 매끄럽고 섬세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형상만 보자면 매우 거칠어 보이지만, 선은 복잡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듯한 느낌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마치 진짜 사람 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가면은 돌기둥에서 뻗어 나온 하얀색의 가는 사슬에 묶여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한눈에 봐도 모종의 금제임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없는 탑 안. 하얀 사슬에 묶여 있던 핏빛 가면의 텅 빈 눈에서 갑자기 기이한 파동이 일더니 혈광이 번득였다.

    실제 같은 혈광이 가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수미전을 바라봤다.

    그러나 혈광이 멀리 뿜어져 나가기도 전에 흑백 돌기둥에 있던 하얀 사슬이 격렬하게 반응하며 핏빛 가면 위에 하얀색 전광이 흘렀다. 이어서 가면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던 혈광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 조용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