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6화. 만보(萬寶)
심협은 씩 웃더니 미간을 붉은 빛으로 번득였다. 이어서 검의 허상이 날아가 귀왕 한 마리의 몸을 절반으로 갈랐다.
귀물의 몸은 형체는 있어도 실체가 없으니 이런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귀왕은 더 이상 서혼 대진의 흡수를 버티지 못하고 휙 날아갔고, 몇 호흡 만에 연화되었다.
강력한 혼력이 흡수되자 그의 신혼은 갑자기 3할이나 늘어나 격렬하게 요동쳤고, 극심한 통증이 끓는 용암처럼 폭발하여 경맥을 타고 몸 곳곳으로 전해졌다. 온몸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심협은 꿈속 세계에서 비슷한 고통을 겪어봤기에 당황하지 않았고 전력으로 부주진신법과 황제내경을 운공하여 신혼의 격변을 진정시켰다.
거의 미치게 할 것 같은 통증은 일각 정도 이어지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심협은 눈을 떴다. 표정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눈동자에는 영롱한 빛이 감돌았다.
귀왕의 혼력을 흡수하자 그의 신혼의 힘은 태을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다.
“좋아, 아직 네 마리 남았으니까 신혼이 천존 경지로 돌파하기에 충분하겠어!”
심협은 기뻐하며 심검으로 다른 귀왕을 베고 서혼 대진 안으로 넣었다.
강력한 혼력이 다시 그의 신혼으로 들어가자 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다시 몰려왔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렬했다.
이는 심협의 신혼 경지가 이미 태을 절정에 도달했고 더는 나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치 물이 가득 찬 자루에 계속 물을 부으면 당연히 자루에 큰 부담이 오는 이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신혼의 힘을 끌어올리다 보면 신혼이 탈바꿈하고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터였다.
심협은 전력으로 부주진신법과 황제내경을 운공했고, 반 시진 정도 지나자 통증은 점점 사라졌다.
그의 신혼은 다시 강해졌지만, 아직 천존 경지로 돌파하지는 못했다.
심협은 심호흡하고는 다시 다른 귀왕을 서혼 대진으로 집어넣었다.
강력한 혼력이 전해지고 그의 신혼에 흡수되자 오장육부를 찢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번 고통은 이전보다도 훨씬 커서, 심협의 의지가 바위처럼 단단하다 해도 이를 악물고서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눈, 코, 입, 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한 시진 정도 지나고서야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세 마리 귀왕의 혼력을 흡수하자 심협의 신혼은 더 충만해졌지만, 여전히 돌파는 없었다.
하지만 꿈속 세계에서 돌파했던 경험을 통해 심협은 신혼이 천존의 경지까지 한 걸음 정도 남았음을 알았고, 귀왕 한 마리의 혼력을 다시 흡수하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데 그때, 그의 머릿속 신혼에서도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붉은 빛을 뿜어내더니 작열하는 힘을 뿜어낸 것이다. 꿈속 세계에서 군혼의 힘을 흡수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신혼의 수련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심협은 계속해서 귀왕의 혼력을 흡수해도 되는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했으나, 신혼의 경지 돌파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심검 신통을 시전하여 귀왕을 다시 서혼 대진 안으로 넣었다.
귀광이 순식간에 연화되고 강력한 신혼 본원이 되어 심협의 머릿속으로 흡수되었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기운이 그의 신혼 깊은 곳에서 폭발하더니 이전보다 열 배는 더 강렬한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와 몸 곳곳으로 흘러갔다.
심협은 눈을 홉떴고,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극심한 고통이 그의 모든 능력을 빼앗았고, 법력 운공도 멈췄다.
그는 이 통증이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다. 척추에 마치 뜨거운 쇳물이 흐르는 것처럼 몸이 떨려왔고, 모든 신경이 팽팽히 긴장하여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으면 완전히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 버텼고, 한참 뒤에야 조금씩 몸을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상황은 여전히 호전되지 않아서 넘쳐나는 신혼의 힘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격렬한 전쟁터가 된 것 같았다.
심협은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면서 꿈속 세계의 경험대로 부주진신법과 황제내경을 운공했다.
하지만 과하게 술법을 시전한 결과, 그의 의지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 돼! 이대로 의식을 잃었다가는 신혼이 부서져 죽게 될 터! 버텨야 한다!’
그는 혀끝을 깨물어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두 개의 신혼 비술을 운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또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흡입력이 생기더니 모든 넘쳐나는 신혼의 힘을 빠르게 빨아들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눈부신 하얀 빛이 일렁이더니 통증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온몸이 가볍고 신선처럼 떠다니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돌파했다!”
심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꿈속 세계에서 이미 경험해본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주위의 천지영기가 끓어오르듯 솟구치더니 일제히 심협의 몸으로 들어와 신혼을 채워나갔다.
귀왕들의 혼력을 흡수한 심협의 신혼은 천지영기까지 보충되자 빠르게 강해졌다.
천지영기가 안정을 되찾자 그의 신혼의 힘은 열 배나 강해져 있었다.
신혼의 힘을 조금 운공하자 수많은 빛이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생생한 화면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주위의 풍경이었다.
심협은 놀라지 않았다. 이것은 천존 경지의 신혼만이 시전할 수 있는 신통인 신념성도(神念成圖)였다. 신념을 훑어볼 필요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이 저절로 머릿속에 비치는데, 신식으로 탐색하는 것보다 훨씬 은밀할 뿐만 아니라 더 섬세했다.
다만 이곳에는 금제가 설치된 까닭에 신념성도를 시전해도 반경 10여 리의 상황밖에 보이지 않았다. 꿈속 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신념성도! 정말로 신혼이 천존 경지로 돌파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화령자는 심협의 신혼 변화를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다.
“운이 좋았어.”
심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운으로 될 일이더냐! 예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 평생을 천존 경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제 신혼의 힘이 천존 경지로 돌파했으니 천존의 경지에 발을 담근 것과 다름없다.”
화령자가 숙연하게 말했다.
사실 심협 역시 매우 기뻤다. 신혼이 돌파했으니 꿈속 세계에서처럼 그의 경지는 이제 천존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신혼이 천존 경지로 돌파하긴 했지만, 외부의 힘을 빌려 강제로 돌파한 것이라 기초가 불안정했다. 그는 황제내경을 몇 번이나 운공했고,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서야 신혼이 비로소 안정됐다.
한데 그가 공법을 거두려 하니 법맥 안의 혼돈흑련이 갑자기 가볍게 떨렸다. 머릿속의 신혼도 공명하듯이 약하게 흔들렸다.
심협은 이런 현상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며칠 동안 선천연보결로 혼돈흑련을 연화했는데 진전이 없었다. 혼돈흑련 안의 힘이 그의 연화를 막았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그의 신혼의 힘이 크게 정진하여 혼돈흑련과 공명하자 씨앗 안에 있는 그 힘이 사라질 기미가 보인 것이다.
심협은 서둘러서 가부좌를 틀더니 선천연보결로 혼돈흑련을 연화했다.
이번 제련은 순조로워 법력이 쉽게 흑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혼돈흑련에서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뿌리들이 가볍게 춤추듯 움직이더니 씨앗 안에서 조금씩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심협의 얼굴이었다.
그와 혼돈흑련의 연결이 훨씬 깊어지면서 그 뿌리들은 완전히 통제되어 그의 손발처럼 움직였다.
“엇!”
심협은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혼돈흑련을 연화하고 신혼의 힘이 흑련과 어우러지자 감지 능력이 대폭 향상돼 주위의 공간에 담겨 있는 선천의 힘이 조금씩 느껴진 것이다. 다만 혼돈흑련이 흡수하기에는 이 선천의 힘은 너무 분산되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
화령자가 심협의 이상을 발견하고는 물어봤다.
심협은 숨기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벌써 혼돈흑련을 연화할 줄이야! 적어도 백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화령자는 경악했다.
“신혼의 힘이 강해진 덕인가 봐.”
심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신혼의 힘은 법보를 연화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네가 말한 선천의 힘은 사실 나도 들어오자마자 느끼긴 했는데, 이 공간은 아무래도 그 힘이 담긴 법보에서 파생된 것 같다.”
화령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심협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그는 섭혼번과 전신편, 도천신살대진을 챙기고는 붉은 빛줄기가 되어 떠나갔다.
“하루를 지체했으니 서둘러야 한다.”
“걱정 마. 신혼의 힘이 강해지고 신식이 혼돈흑련과 하나가 되면서 탐색 능력이 훨씬 높아졌어. 하루 정도로는 저들에게 뒤처지지 않아!”
심협은 자신 있게 말하고는 신혼의 힘을 혼돈흑련 뿌리에 넣어서 주위를 탐색하며 이동했다.
이곳의 금제도 혼돈흑련 뿌리의 허공을 뚫는 신통을 막지 못했다. 그 뿌리들은 순식간에 반경 백여 리 곳곳에 나타났고, 심협의 머릿속에 갑자기 일고여덟 개의 신념 그림이 생겨났다. 다만 안타깝게도 공간 법진과 보물의 흔적은 쉽게 찾지 못했다.
심협은 쉬지 않고 혼돈흑련의 뿌리를 매개로 주위 상황을 감지하며 이동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더 지났다.
이 공간은 심협의 예상보다 훨씬 넓어, 하루를 꼬박 날았음에도 끝이 보일 기미가 없었다. 전송 법진과 만보루대의 실마리도 찾아내지 못했다.
“벌써 반경 십만 리 정도를 살폈는데도 아무런 수확이 없다니, 아무래도 엄청 깊숙이 숨겨둔 모양이군.”
한데 다시 백여 리를 날며 혼돈흑련의 뿌리를 발동하던 심협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그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하얀 안개가 가득한 어느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안개 가장 깊은 곳에 금색 누대가 있었다. 누대는 눈부시게 빛났지만 어떤 기운도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혼돈흑련 신통이 아니었다면 감지조차 못했을 터였다.
누대 꼭대기에 새겨진 만보(萬寶)라는 글자가 찬란하게 빛났다.
“만보루대!”
심협은 기뻐하며 누대를 살폈다.
금색 광막으로 뒤덮인 타원형에 부드러운 금색 광망을 뿜어내는 것이 매우 돋보였다.
금색 광막 안에는 도검, 영패, 발우, 깃발 등등의 법보와 광석, 영목, 영초 같은 영재가 수십 개씩 떠 있었는데, 단 하나도 중복되는 것이 없었다.
광막에 막혀 있음에도 이 법보와 영재 모두 놀라운 영력 파동을 뿜어냈다. 예사롭지 않은 보물이 분명했다.
심협은 이미 많은 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보물이 눈앞에 있으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협,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광막 옆의 기둥을 봐라.”
화령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심협이 광막 옆의 백옥 돌기둥을 보니, 그 위에는 ‘한 사람당 하나씩’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심협의 미소는 점점 쓴웃음으로 변했다.
이전의 그 목소리는 정말로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한 사람당 하나씩이라면 왜 저렇게 많이 넣어놓았단 말인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법보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폈다.
검은색 소검(小劍)은 비검류 법보인 듯했고 위력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이런 법보가 차고 넘쳤다.
푸른색 방패도 뛰어나 보였지만, 혈백원번이 있는 그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법보가 아니었다.
푸른색 영패는 위에 교룡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강력한 을목 영력 파동을 뿜어냈다. 회복류 법보인 듯하나, 황제내경을 대성한 그에게는 쓸모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