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화. 속았지?
전광이 사라졌지만 연기가 자욱했다. 뒤늦게 모습이 드러난 초록빛 해골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뼈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이 가득했다. 척 보기에도 당분간은 회복하기 어려울 듯했다.
이를 본 유비연과 유비서는 초조한 표정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하지만 조요경이 다시 번쩍이더니 새로운 뇌전을 일으켰고,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더는 흑룡을 막아낼 겨를이 없었던 손 파파가 날린 법장이 허공에서 보라색 빛으로 번쩍이더니 쾅 하며 폭발했다.
폭발의 충격에 휩쓸려 흑룡은 뒤로 밀려났고, 조요경도 크게 흔들리자 뿜어내려고 했던 뇌전이 잠시 멈추었다.
“이것들이 감히!”
흑룡이 분노하며 포효하더니 다시 초록색 독무를 뿜어내려 했다.
손 파파는 곧장 돌아서서 서둘러 백옥 우리로 들어갔고, 동시에 손에서 초록색 빛이 반짝였다. 그러자 기다란 대나무 장대가 나타나 초록빛 해골에게로 날아갔다.
백천의 손에서 뺏어온 대나무 장대가 검게 그을린 초록빛 해골의 몸에 닿자 희미한 빛이 일렁이더니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저절로 해골의 척추뼈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날아갔다.
사라진 척추뼈가 대나무 장대로 다시 채워지자 끼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붕괴 직전이었던 해골에 초록색 광망이 퍼지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폭발하여 사방으로 몰아쳤다.
펑! 퍼펑!
굉음과 함께 백옥 우리가 폭발했다.
흑룡이 뿜어낸 독무가 손 파파의 등까지 퍼져, 그녀 등의 피와 살까지 녹아내려 척추뼈가 드러났다.
그때, 사방으로 몰아친 강력한 기운이 초록색 독무를 전부 날려버렸다.
흑룡은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두 눈에서 광망을 번쩍이며 허공에 있는 조요경을 바라봤다. 다시 한번 조요경의 힘으로 초록빛 해골을 제압하려는 것이리라.
한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흑룡의 옆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뇌광이 번쩍이며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심협!”
흑룡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두 개의 머리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만선대진에 갇힌 심협을 바라봤다. 외모와 기운 모두 지금 나타난 심협과 완전히 똑같았다.
“어때? 속았지?”
심협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장난스레 웃더니 명홍도와 헌원신검, 두 개의 신병을 교차하며 휘둘렀다. 두 개의 예망이 갑자기 강하게 번득이더니 허공을 가르고 흑룡을 베었다.
한참을 숨어서 힘을 모아온 일격이었기에 도광과 검망의 힘이 서로 합쳐지자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압박감이 순식간에 흑룡 앞에 도달했다.
흑룡의 머리 둘이 한곳에 모여 초록색 빛과 회색 빛을 동시에 뿜어냈다. 이 두 개의 힘은 하나로 합쳐져 도광과 검망을 막아냈다.
콰쾅!
폭발음과 함께 교차한 도망과 검망이 두 개의 빛을 순식간에 찢어 사방으로 흩어버리고는 그대로 흑룡의 몸에 떨어졌다.
푹! 푹!
두 번의 찌르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비늘이 촘촘한 흑룡의 가슴에 두 개의 깊은 상처가 생겨났고, 거대한 몸은 강한 힘에 충격을 받아 우리 10여 장 밖에 있는 벽에 강하게 충돌했다.
쾅!
진요탑 전체가 강하게 흔들리자 허공의 조요경도 격렬하게 흔들렸다.
만선대진을 유지하던 아흔아홉 명의 수사는 순간 굳어지더니 통제를 잃은 것처럼 멈추었다. 하지만 진법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다.
대진 안에서는 섭채주가 심협을 바라보았다. 심협의 몸은 희미한 허광이 감돌았고 몸이 약간 투명해진 상태였다.
‘거울 요괴! 대진 안의 오라버니는 거울 요괴가 고경으로 만들어낸 거울 분신이었어!’
섭채주는 경위를 알아챘지만, 그럼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협이 고경 안의 금제를 뚫은 이후로 푸른색 고경의 위력이 훨씬 올라가면서 거울 분신이 더욱 정교해진 덕에 기운도 본체와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언제 거울 분신과 교체했단 말인가?
원조 역시 놀랐으나,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숨 돌릴 기회가 생긴 틈을 이용해 서둘러 부상을 치료하고 체내의 독소를 밖으로 빼내려 했다.
“심협! 또 네놈이 내 일을 방해하려 하는구나!”
흑룡의 포효에는 심협을 향한 조룡의 혼의 한이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검은 물체가 멀리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심협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와 검을 꽉 쥔 채 흑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데 그의 옆에서 초록색 물체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심협의 눈에도 희미한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초록색 물체는 흑룡보다 훨씬 작았지만, 엄청난 기세로 곧장 달려들더니 온몸에서 초록색 광망을 뿜어냈다. 허공이 온통 초록색 빛으로 가려졌다.
심협은 흑룡을 향해 달려드는 초록색 존재를 본 뒤, 바로 시선을 거두고는 조요경을 거두려고 위로 뛰어올랐다.
조요경은 요족을 제압하고 요력에 저항하지만, 심협은 인간족이기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고, 허공에서 가볍게 낚아챌 수 있었다.
그가 땅에 착지하는 순간, 흑룡과 초록색 존재가 충돌했다. 바닥이 크게 흔들리더니 초록색 화광이 가느다란 바늘 같은 빛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서 물러나!”
심협은 크게 외치고는 곧바로 만선대진 쪽으로 내달렸고, 손 파파도 바로 물러났다.
유비연과 유비서는 약간 늦어서 초록빛 침에 휩쓸릴 위기였다.
“어서 가!”
유비연이 외치며 유비서를 세게 밀었고 자신은, 그 반동으로 초록빛 침에 휩쓸렸다.
한데 그녀가 초록빛에 삼켜지려는 순간, 그림자 하나가 날아와 그녀를 잡고는 바로 위로 튀어 올랐다.
손 파파는 초록 해골이 유비연을 구한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 파파가 연신 외쳤다.
위기에서 벗어난 유비연은 곁눈질로 그 초록빛 해골을 바라봤다.
모두가 피하자 초록색 광망도 확산을 멈추고 조금씩 줄어들었다.
만선대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심협은 흠칫 놀랐다. 괴뢰 중 여러 명이 초록빛 바늘에 휩쓸려서 등이 부식되고 살점이 사라지면서 검은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검을 든 자세였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섭채주의 앞을 막아선 심협의 거울 분신도 부식되어 점점 사라져갔다.
“뼈를 갉아 먹는 독이라니, 엄청나군.”
심협은 놀란 눈으로 초록색 해골을 바라봤다.
이 초록빛 침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흑룡이 아닌 저 해골의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이때, 흑룡의 거대한 몸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타났다. 그 몸의 비늘은 부식되어 많이 떨어졌지만, 살점은 거의 부식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심협에게 베인 상처는 새까맣게 변했고, 피와 살이 꿈틀거리면서 하얀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와 살이 부식되고 재생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된 것이다.
흑룡은 상처가 가볍지 않았는지 광망이 많이 줄어들었고, 몸도 작아져 검은색 비늘 갑옷을 걸친, 키가 큰 남자로 변해 있었다. 칼로 조각한 것 같은 이목구비와 등까지 길에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심협의 손에 들린 조요경을 보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심협, 조요경을 넘겨라. 그러지 않으면 지금 바로 오홍과 원구의 원신을 폭파하겠다!”
검은 갑옷의 남자에게서 조룡의 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협은 그 말에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넘겨라! 저놈들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조룡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의 가슴에 난 끔찍한 상처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알겠다, 받아라.”
심협은 어려운 결정을 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조요경을 던졌다.
하지만 조요경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심협의 저물 법보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네 이놈!”
무심코 조요경을 따라 시선이 위로 돌아갔던 조룡이 분노로 포효하며 다시 심협을 노려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협이 거울을 던지는 시늉을 하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한 폭의 그림을 수십 장으로 늘려 오홍과 원구 쪽으로 던진 것이다.
조룡이 그 두 사람을 폭파시키려는 순간, 그들을 휘감은 그림이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순간, 조룡은 자신과 오홍, 원구 사이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알아챘다.
“산하사직도!”
조룡과 문수, 원조가 동시에 놀라 외쳤으나, 심협은 개의치 않고 섭채주와 함께 멀리 물러났다.
* * *
산하사직도 안. 북명곤의 몸에서는 법칙의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두 개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오홍과 원구를 각각 감싸 그들과 조룡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
뒤이어 북명곤이 양손을 동시에 결인하고는 기이한 법력을 뿜어내는 손으로 오홍 등의 머리를 꽉 쥐었다.
두 사람의 백회혈(百會穴)에서 푸른 빛이 번득이더니 괴뢰법칙의 힘이 뭉쳐진 가느다란 실 두 개가 천천히 떠올랐다. 하나는 두 사람의 머리로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몸 밖의 허공으로 늘어졌다.
북명곤은 입에서 뱉어낸 검은 도끼를 가볍게 휘둘렀다. 두 사람의 백회혈에서 빠져나온 법칙의 선은 간단하게 끊어졌다.
두 가닥의 실이 끊어지는 순간, 오홍과 원구 두 사람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고, 텅 빈 것 같았던 두 눈은 조금씩 신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신식의 힘이 텅 빈 것처럼 두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두 사람을 살펴본 북명곤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괴뢰법칙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신식의 힘이 크게 손상돼 육체까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품에서 두 개의 단약을 꺼내 그들에게 먹이고는 두 사람의 등에 손을 대고 약의 힘이 연화되도록 도운 후, 진정되자 손을 거뒀다.
* * *
진요탑 5층. 조룡의 눈이 번득였다.
“오홍과 원구의 괴뢰법칙의 실이 완전히 끊어졌군.”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심협을 위협할 수 있는 패가 사라졌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손을 휘두르자 앞서 요물 괴뢰들이 쏟아져 나왔던 하얀색 주머니가 떠오르더니 입구가 활짝 벌어졌다. 그러자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남은 괴뢰들을 전부 감싸 다시 주머니로 들어갔다.
“만괴대?”
문수보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는 저 법보가 낯설지 않았다. 불문의 지보 인종대(人種袋)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산 사람을 넣지 못하고 괴뢰를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담을 수 있는 수에는 제한이 없어서 천군만마의 괴뢰를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협, 오늘 일은 나중에 반드시 갚아주마!”
조룡은 이 말을 남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심협은 전음을 통해 오홍과 원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조룡이 떠나가도록 막지 않고 내버려 뒀다.
조룡이 떠난 것을 확인한 문수보살과 원조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심협에게 향했다. 문수보살은 조금 머뭇거리는 표정이었고, 원조는 심협과 섭채주를 번갈아 바라봤다.
손 파파는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수보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원조는 심협과 섭채주의 실력을 가늠해보는 눈빛이었다.
“심 도우, 우리는 동맹을 맺었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손 파파의 목소리가 때맞춰 들려왔다.
문수보살은 손 파파를 힐끗 봤을 뿐이지만, 원조의 표정은 조금 변했다.
“감사합니다, 손 파파.”
심협이 바로 웃음으로 보답했다.
“아미타불.”
문수보살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불호를 읊고는 돌아서서 떠나갔다.
원조는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이미 떠나간 문수보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휙 날아갔다.